프롤로그
코로나가 세상을 멈춰 세웠던 몇 해 전, 나는 스캐너를 하나 샀다. 오랫동안 상자에 담아둔 편지와 사진, 낡은 서류들을 디지털로 옮겨두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언젠가는 해야지 하고 미뤄두기만 했던 일이었다.
스캔을 마친 파일들은 폴더 어딘가에 저장된 채 다시 열리는 일이 드물었다. 나이가 들고 여유로운 시간이 조금씩 늘면서, 나는 하나둘 그 파일들을 다시 꺼내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삼십 년 전, 그녀에게서 받은 편지들을 다시 보게되었다.
내용을 다시 읽어보니 편지 속 인물이 나라는 생각도 더 이상 들지 않는다. 그녀도 나도 이제 그때 그 사람들이 아니다. 세월이 지나 나이가 들었고, 다른 세상에서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런 과거의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면, '그때는 그랬겠구나' 라는 추억에 빠지게 된다.
그때 받았던 많은 편지들의 내용을 글로 만들어 보고 싶어서 스캔 해놓은 편지들을 텍스트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쉬운 일인 줄 알았다. AI의 도움을 받으면 생각보다 쉽게 텍스트 변환이 가능할 줄 알았다. 그러나 아직은 AI가 손글씨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몇 개를 시도해보다가, 오류 난 부분을 하나하나 비교해서 수정하느니 내가 직접 원본을 보고 타이핑하는 쪽을 택했다.
양이 엄청나게 많다. 타이핑은 힘들고 오래 걸리겠지만, 이 많은 글을 그 당시 그녀는 직접 손으로 썼을 것이다. 그녀의 노고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 생각하며 작업을 이어갔다.
이 편지들에는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 내가 쓴 편지다. 그녀가 내게 보낸 편지는 이렇게 상자 가득 남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보낸 편지는 어디에도 없다. 아마 그녀에게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편지라는 한쪽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만, 그때의 나를 더듬어 되살리는 중이다. 그녀가 "네 편지 잘 받았다"고 적은 날, 정작 내가 무슨 말을 써 보냈는지는 이제 나조차 알지 못한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1995년 10월이었다. 나는 스물세 살이었고, 그녀는 나와 동갑이었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우리는 눈 깜짝할 새에 가까워졌다. 그 무렵 우리 가족은 십수 년의 남미 이민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다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만난 순간부터, 머지않아 아주 멀리 떨어지게 되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셈이다.
그때 내 차는 파란색 Fiat Duna였다. 차 안에는 라이온 킹의 아기 사자 심바 인형이 놓여 있었다. 그녀의 편지에 두고두고 등장하게 될 그 파란 차, 심바와 릴라 인형,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하철과 거리, 스페인어가 한국어 사이로 자연스레 섞여 들던 나날 속에서, 우리는 어렸고 순수했고 순진했다. 그 시절 그녀와 함께한 시간 동안 나는, 어쩌면 한 편의 드라마 속 주인공이었다.
이 편지들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뜨겁게 매일같이 이어지던 편지가 어느 날부터 뜸해지고, 끝내 멎는다. 그 끝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이야기의 마지막에 가서 털어놓으려 한다. 지금은 다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뉴욕으로 부쳐진 그 편지들을 처음부터 다시 펼쳐볼 참이다. 삼십 년 전 그 날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