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설탕 정제 기술의 변화와 뼈 수요 급증 (1810년대)
• 1811년: 프랑스의 산업가들에 의해 골탄(Animal Black)을 이용한 사탕무 설탕 여과법이 개발되었습니다. 이 방식은 설탕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흰색으로 정제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보였습니다.
• 1815년 이후: 불과 수년 만에 유럽 전역의 사탕무 설탕 제조업체들이 이 기술을 채택하면서, 정제 공정의 핵심 원료인 '동물 뼈'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2. 동시대의 기록과 목격담 (1820년대 ~ 1850년대)
• 1822년 10월: 영국 런던의 일간지 The Times에 '생존한 군인(a living soldier)'이라는 익명의 투고가 게재되었습니다. 기고자는 전년도에 대륙(유럽 본토)으로부터 100만 부셸 이상의 인간 및 동물 뼈가 헐(Hull) 항구로 수입되었으며, 이 중 상당수가 워털루를 비롯한 주요 격전지에서 수거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 1858년: 프랑스의 의학 저널에 카페(Caffe) 박사의 회고록이 실렸습니다. 워털루 전투에서 형제를 잃었던 그는 전장 발굴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고 진술하며, 그곳에서 수거된 뼈들이 골탄으로 가공되어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의 사탕무 정제 공장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기록했습니다. 다만 이는 사건 발생 약 40년 후의 개인적 기억에 의존한 진술이었습니다.
3. 원료 가격의 급등과 시장 상황 (1830년대)
• 1830년대 중반: 설탕 산업의 팽창과 함께 뼈의 가치는 계속해서 상승했습니다. 벨기에 등의 기록에 따르면 1832년 100kg당 2프랑 선에 거래되던 뼈의 가격은 1837년 14프랑까지 급등했습니다. 이러한 정량적 수치는 당시 유럽 시장에서 종류를 막론하고 '뼈'라는 원자재의 경제적 가치가 매우 높았음을 보여줍니다.
4. 현대 학술 연구와 고고학적 조사 (2010년대 ~ 현재)
• 2012년 이후: 워털루 전장에 대한 현대적 고고학 발굴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으나, 약 20,0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규모에 비해 실제 발견된 인골은 단 2구에 불과했습니다.
• 최근 연구 및 가설 제기: 벨기에 국가문서보관소의 베르나르 빌켄(Bernard Wilkin), 역사학자 로빈 셰퍼(Robin Schäfer), 글래스고 대학의 전장고고학 교수 토니 폴라드(Tony Pollard) 등은 공동 연구를 통해 논문(The Real Fate of the Waterloo Fallen)과 저서 『Bones of Contention』을 발표했습니다.
◦ 연구진은 당대의 언론 보도 및 증언(1차 사료) 과 원료 가격 급등 및 전장 내 인골의 극심한 부재(정황 근거) 를 연결하여, 당시 전사자들의 유해가 골탄 원료로 유입되었을 것이라는 유력한 가설을 제기했습니다.
◦ 다만 이는 직접적인 물증에 기반한 최종 결론이 아니며, 연구진 역시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전사자 유해의 행방에 대해 더 실질적이고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며 유보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직후라는 특수한 시기와 유럽 일부 지역을 배경으로, 급증하는 골탄 수요 속에서 격전지의 유해가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학술적으로 제기된 사례입니다.
...
그랬다고 합니다.
사실 공산품은 그것보다도 더 저렴한 옥수수로 만든 액상과당을 더 많이 쓰는게 현실이죠.
그럼에도 비정제 오가닉 사탕수수은 동남아만 가도 진짜 저렴하다는...음식에 코코넛 풍미를 올려준다는 코코넛 설탕이 오히려 더 비싸더라구요.
이 때문에 “나폴레옹 전쟁 전사자들의 유해가 설탕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도 오래전부터 전해져 왔습니다. 가장 자주 인용되는 자료는 1822년 10월 영국 일간지 The Times에 실린 ‘A Living Soldier’라는 필명의 기고문입니다. 작성자는 전년도에 유럽 대륙에서 100만 부셸이 넘는 인간과 동물의 뼈가 영국 헐(Hull) 항으로 수입되었으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워털루를 비롯한 주요 전장에서 수거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뼈들이 비료나 설탕 정제용 골탄으로 사용되었다고도 적었습니다.
그러나 이 자료를 해석할 때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당 글은 정부 조사나 공식 통계가 아니라 익명의 기고자가 작성한 신문 투고이며, 그 내용을 뒷받침하는 세관 기록이나 운송 장부가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당시 사회에서 이러한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서의 가치는 있지만, 이것만으로 실제 대규모 반출이 이루어졌다고 단정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합니다.
1858년 프랑스 의학 저널에 실린 카페(Caffe) 박사의 회고도 자주 인용됩니다. 그는 워털루 전투에서 형제를 잃은 뒤 전장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수거된 뼈들이 골탄으로 가공되어 설탕 공장으로 보내졌다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이 회고는 전투가 끝난 지 약 40년이 지난 뒤 작성되었습니다. 인간의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왜곡될 가능성이 있으며, 당시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이야기가 개인의 기억과 결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대 역사학에서도 이 회고를 중요한 참고 자료로는 인정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한편, 당시 뼈의 가격이 급등한 것은 비교적 분명한 사실입니다. 벨기에 기록에 따르면 1832년 100kg당 약 2프랑이던 뼈 가격은 1837년 약 14프랑까지 상승했습니다. 이는 당시 뼈의 수요가 매우 컸음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경제 자료입니다. 그러나 이 가격 상승이 곧바로 전사자의 유해가 산업적으로 대량 수거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에는 도축 산업이 확대되면서 동물 뼈의 공급도 증가했고, 골탄뿐 아니라 비료 산업에서도 뼈의 수요가 크게 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가격 상승만으로 인간 유해의 대규모 이용을 입증하기에는 논리적인 비약이 있습니다.
최근 들어 워털루 전장에 대한 고고학 조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약 2만 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진 전투 규모에 비해 실제 발견된 인골이 매우 적다는 점은 분명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하나의 원인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전투 직후 이루어진 매장 작업, 이후의 재매장, 농경지 개간, 토지 개발, 자연적인 훼손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골이 적게 발견된다는 사실은 설명이 필요한 현상이지만, 그것이 곧바로 골탄 산업으로 이어졌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이러한 자료들을 종합해 벨기에 국가문서보관소의 베르나르 빌켄(Bernard Wilkin), 역사학자 로빈 셰퍼(Robin Schäfer), 글래스고대학교의 전장고고학자 토니 폴라드(Tony Pollard) 등은 당시 언론 보도와 회고록, 뼈 가격의 상승, 고고학적 조사 결과를 함께 분석했습니다. 연구진은 전사자들의 유해 일부가 산업적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내용을 논문 The Real Fate of the Waterloo Fallen과 저서 Bones of Contention에서 제시했습니다.
다만 이 연구의 핵심은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지 ‘사실’을 입증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연구진 역시 직접적인 물증이 부족하다는 점을 여러 차례 언급했으며, 전사자의 유해가 실제로 골탄 공장으로 운반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문서나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이 가설은 여러 정황이 서로 맞아떨어지는 흥미로운 해석이지만, 현재 단계에서는 어디까지나 개연성이 높은 가설로 이해하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입장에 가깝습니다.
결국 “워털루 전사자들이 설탕이 되었다”는 표현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산업 구조와 시장 상황을 고려하면 일부 유해가 산업 원료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제기할 수 있지만, 그것이 대규모로 이루어졌는지,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 실제로 설탕 정제용 골탄으로 사용되었는지는 아직 확실하게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연구는 이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여러 정황 증거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며, 최종적인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기에는 추가적인 발굴과 문헌 연구가 더 필요한 상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