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회사는 남초 사회다. 구성원의 90%가 남자고 그 중에서도 참 구별하기 쉬운 인류들로 구성되어 있다.
“빽팩과 체크무늬, 둥그런 몸매, 뿔태안경, 털 숭숭난 다리와 반바지, 양말 신은 슬리퍼, “
나름 입사전에 잘 입고 잘 꾸미고 킹카였던 인간들도, 회사 생활 3개월 쯤 되면 늘어난 티셔츠에 주름진 반바지, 쓰레빠를 끌고 사무실 누비게 된다.
10% 쯤 되는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일이 있는 날이 아니면, 하이힐을 신거나, 스커트를 입거나, 샤랄라한 원피스를 입고 세팅된 모습으로 출근하지 않는다.
똥머리, 무지티, 반바지 혹은 청바지, 슬리퍼 같은 샌달....
그나마 벗어나는 사람들이 사업팀 쪽 마케팅/홍보 담당자 들이고, 간혹 보이는 센스 있는 외모와 옷차림은 그래픽 쪽 사람들 뿐이다.
전쟁에도 사랑은 피어나고, 몰아치는 스캔들의 폭풍과, 인사이동과 해고 조치에도 연인은 탄생한다.
어느날 OO 메신저로 뜬금없는 메시지가 왔다.
뜬금녀 : 야 너 OO년생이라며, 너 나보다 나이 많은 줄 알고 있었다 .
나 : ….?
뜬금녀는 홍보팀 담당자였고, 평소 업무 관련 미팅이나, 담배/음료 타임, 동료들과의 수다에 가끔 끼어 가벼운 농담 정도만 주고 받는 사이였다.
나 : OO 년생은 아니긴 한데, 그렇다고 홍보녀님께 반말 들을 입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약간 놀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 홍보녀 보다 1살 어렸다. )
홍보녀 : 어…아 그래요. 미안해요~ 전 저보다 어린 줄 알고..미안합니다. 좀 친근하게 친구하고 싶어서 그랬어요.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 했어요,
나 : 아니요 뭐 회사에서 나오는 정보로 그렇다면 착각할 수 있죠.
홍보녀 : 아 아니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사과하는 의미로 밥이라도 사드릴께요. 죄송합니다.
나 : 아 아니에요, 안사주셔도 됩니다. 그리고 전 OO년생 입니다. 누나!!
홍보녀 : 야!!! 뭐라고….
사실 게임회사는 나이가 많고 적고 상관없이 다 OOO님이다. 정말 개인적인 친분이 생기고 같이 동고동락하다 보면, 형이고 동생이고, 누나고 언니가 되지. 그래도 기본은 OOO님 이었다 .
이 사건 이후로 홍보녀랑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서로 호침은 OOO님으로 통일 반말 하면서 지내게 되었고, 가끔 내가 누나라고 부르면 질겁 하면서 싫어 했었다.
몇 없는 여직원들이야 우리 생각엔 다들 친할 것 같지만, 그들만의 취향으로 알아서 끼리끼리 그룹을 형성하고, 그룹별로 나눠 지내는게 보통이다.
홍보녀는 친한 인사과 직원과 짝꿍이었고, 홍보녀와 인사과 직원(이하 인사녀)도 함께 어울리게 되어 회사 끝나면 간간히 셋이서 같이 술한잔 먹거나, 영화도 보고, 연극도 보는 관계가 되었다.
어느날 홍보녀로부터 도움 요청이 왔다.
‘오늘 XXX 기자랑 식사 자리가 있는데 혹시 같이 가 줄 수 있냐?’는 부탁이었다. 사업 업무가 주가 되기 시작했던 시점에서, 게임 웹진쪽 기사들이랑도 친해지면 나쁘지 않다라는 판단 이었고, 사실 주변에서도 어느 정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홍보나 마케팅이 필요한 상황에 서로 도움 주고 좋다는 추천이 있어, 마다할 이유는 딱히 없는 상황이었다.
근데 사실은 이 XXXX 기자라는 친구가, 업무 외에 살짝 다른 관계를 원하는 뉘앙스를 자꾸 풍겨, 곤란한 상황이니, ‘조금 도와 줄 수 없겠냐?’는 요청이었다.
이 시기 게임산업의 웹진기자와 홍보 담당자는 갑과 을이 서로 순환하는 관계다.
회사가 돈이 많을 때는, 광고 집행을 빌미로 회사가 갑이 될 수 있고, 회사가 돈이 없고, 회사에 대한 언론이 나쁜 상황이나, 회사에 불리한 업데이트 등이 기사화 되어 올라올 때는, 웹진이 갑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담당자들끼리의 적당한 유대 관계로, 이 순환에 상황에서 발생하는 마찰을 ‘음 이번엔 내가 봐줄께,’ ‘음 이번엔 우리 그쪽에 광고 집행할께,’ 하는 미묘한 공생 관계가 형성 된다
다만 늘 그렇듯, 사람이 하는 일이고 남녀가 관계 되다 보면, 회사 업무를 개인에 대한 호감으로 착각하거나, 갑/을 관계의 역학을 이용하여, 남녀 관계로 발전되길 희망하는 사례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홍보녀의 요청은 이런 상황에서, 남녀 관계로 발전될길 희망/강요하는 웹진기자와의 만남을 적당히 무마해 달라는 요청 이었다.
나 : 같이 가는 건 좋은데 내 입장이 좀 웃긴데. 그 사람은 홍보녀님하고 관계를 발전 시키고 싶어 하는 입장이고, 내가 그 자리에 끼어서 방해한다는 상황이 되면, 그 기자와 내 관계가 나빠질 것 같고, 우리 프로젝트에도 그렇게 도움이 되질 않을꺼 같은데 그래도 같이 가 달라고?
홍보녀 : 그런거 있잖아 ‘우린 회사 업무상 만나는 관계지 나는 당신과 개인적인 관계로 발전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업무상 관련된 만남만 요청해 주세요’ 라고 하는 무언의 표시
그래서 1:1로 만나자는거 님이 필요 한거지.
나 : 으흠. 1:1로 만나자는 건데 내가 거기 껴있으면,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아 얘는 나를 회사 업무 말고 개인적으로는 만나지 않고 싶다’는 걸 그 친구도 눈치 챌 것 같다는 의미지?’
홍보녀 : 응 맞아. 부탁 할께 이번에 한번만 도와줘 대신 다른 괜찮은 웹진 기자나, 메이저 기자들 그쪽 팀장 라인까지 내가 다 소개 시켜 줄께. 좋은 사람들로만.
나 : 흠 내키진 않는데 회사 법카로 맛난거 사준다면야 콜.
홍보녀 : 기자 만나는거라 법카를 쓸수 있으니까 여튼 고마워 다음에 내가 은혜 갚을께.
그날 저녁 괜찮은 음식점에서 그 착각기자와 함께 만났다.
나 : 안녕하세요 기자님 반갑습니다 .OOOO 프로젝트 리드를 맞고 있는 OO 입니다.
홍보녀 통해서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정말 좋으신 분이고, 저희 회사 관련해서도 좋은 얘기 많이 해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착각 기자 : 어..네 아.. 혼자 나온다고 들었는데 리드님도 같이 나오셨네요.
홍보녀 : 네 이번에 사업리드님도 같이 나와서 기자님이랑 얘기하면 엄청 좋을 것 같아서 제가 부탁 드렸어요.
나 : 사업리드 하면서,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리고 제가 모르는 마케팅이나 홍보 부분도 많이 알고 싶구요. 특히나 기자 분들은 제가 살면서 만나보기 정말 어려운 직업 이시거든요
개인적으로 글쓰는 직업 가지신 분들 존경 하는 마음도 있구요,
착각기자 : 아휴 별 말씀을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존경이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게임 산업에 일하시고, 거기다 사업 리드시면, 모두 부러워 하는 직업이시잖아요. 제가 더 부럽습니다.
나 : 부러운 사람끼리 그럼 한잔 할까요? 하하……
홍보녀/착각기자 : 하하하. ..네 좋아요.
저녁 내내 이런 분위기만 계속 됐다.
나와 홍보녀는 “응 눈치 챙겨, 회사 일 얘기만 하자.”
착각 기자는 “응 알았어 이렇게 얘기하는데도 내가 눈치 못 채면, 나도 사람 아닌것 같아.”
적당한 사회력과 적당한 개그로 다행히 저녁은 즐거운 듯 마무리가 되었고, 이 사건 이후로 홍보녀는 더이상 그 착각기자의 오인을 받지 않게 되었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서로가 적당한 선의 경계를 잘 이해하고, 그 선을 넘지 않을려고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OO년 후에 돌아 온 한국 게임 산업에서는 이걸 잘 안 지키는 애들이 눈에띄게 늘어 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