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노바디의 비밀과 위대한 음악가의 집념의 추적기
1. 거장의 무심한 일탈, 《Mr. Nobody Plays Trenet》
1950년대 중후반, 당대의 클래식 거장 알렉시스 와이젠베르그는 가명 뒤에 숨어 흥미로운 사고를 하나 칩니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샹송 가수 샤를 트레네의 명곡들을 극도로 화려하고 세련된 피아노 곡으로 편곡해, ‘Mr. Nobody(아무개 씨)’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LP를 발매한 것이죠.
2004년, 피아니스트 아믈랭이 그를 처음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아믈랭은 나름의 확신을 품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진중한 클래식 피아니스트 분위기상, 대중음악(Popular song) 같은 사소한 장르에 한눈을 파는 것은 본인의 커리어에 치명적인 오점이 될 수 있었기에 정체를 숨겼을 것'이라는 추측이었죠. 하지만 정작 거장을 만났을 때, 와이젠베르그는 그런 세간의 시선 따위는 신경도 안 썼다는 듯 그저 무덤덤하게 답했습니다. "그냥 그 녹음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고 말이죠.
2. 음악계의 탐정, 베일을 벗기다
세월이 흘러 이 희귀한 음반은 캐나다 출신의 초절기교 피아니스트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에게 운명처럼 흘러들어갑니다. 어느 날 한 친구의 소개로 이 녹음을 처음 접한 아믈랭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대체 누구의 작품인지, 누가 연주하는 것인지조차 전혀 모른 채 오직 귀를 사로잡는 환상적인 선율에 단숨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죠.
이 곡을 직접 연주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아믈랭은 수소문 끝에 '미스터 노바디'의 정체가 다름 아닌 와이젠베르그라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하지만 악보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고, 와이젠베르그가 기록을 남겼는지조차 불투명했습니다. 결국 아믈랭은 오직 자신의 초인적인 청음에만 의지해 음반을 들으며 한 음 한 음 악보를 그려나가는 '한 달간의 집요한 독공(채보)'에 돌입합니다. 다행히 와이젠베르그의 타건이 워낙 명징했던 덕에 6곡의 채보를 무사히 마친 아믈랭은 이를 자신의 정식 레퍼토리로 삼아 무대 위에서 선보이기 시작했습니다.
3. '완벽하지 않은 채보 반, 저작권 반'의 교착 상태
아믈랭이 이 환상적인 샹송 편곡을 연주하자, 전 세계 피아노 마니아들과 연주자들로부터 악보를 달라는 요청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아믈랭은 단 한 명에게도 악보를 내어줄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완벽하지 않은 채보 반, 복잡하게 얽힌 저작권 반'이라는 거대한 두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완벽주의자였던 아믈랭은 오직 귀로만 받아 적은 자신의 초기 채보본에 음이 누락되거나 불완전한 부분이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유포를 망설였습니다. 게다가 원곡자(트레네), 편곡자(와이젠베르그), 채보자(아믈랭)가 얽힌 실타래 같은 저작권 문제까지 겹치면서, 전 세계 피아니스트들은 늘 침만 삼키며 아믈랭의 연주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4. 2013년, 먼지 쌓인 창고에서 발견된 반전
반전은 와이젠베르그가 타계한 이듬해인 2013년에 일어났습니다. 거장의 막내딸 마리아(María)가 아버지의 음악 아카이브를 정리하던 중, 존재조차 몰랐던 아버지가 직접 끄적여둔 친필 초고 악보 4곡을 극적으로 발견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곧바로 아믈랭에게 이 스캔본을 보냈고, 아믈랭은 흥분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이 친필 악보를 분석하던 아믈랭은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와이젠베르그 이 거장이, 정작 녹음할 때는 자기가 써놓은 악보대로 치지 않고 완전히 즉흥적으로 변형해서 연주했던 것이죠! 게다가 친필 악보는 본인만 알아볼 수 있게 축약된 스케치에 가까웠습니다. 왜 청음만으로 한 채보가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었습니다.
5. 출판사가 뚫어낸 장벽, 마침내 세상 밖으로
이 오랜 교착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의 신생 출판사 뮤즈 프레스(Muse Press)의 에자키 쇼타(Shota Ezaki)가 구원투수로 등판했습니다. 출판사가 발 벗고 나서서 그간 아믈랭을 가로막았던 까다롭고 복잡한 저작권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해 준 것입니다.
덕분에 아믈랭은 온전히 고증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최종 악보는 아주 독특한 '2중 구조'로 편집되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 Manuscript 버전: 거장의 친필 초고를 다른 피아니스트들도 읽을 수 있게 정돈한 버전 (4곡)
• Recording 버전: 음속 속도를 늦춰주는 프로그램을 동원해, 와이젠베르그가 음반에서 실제로 연주한 음들을 고증하고 음악적으로 완성한 아믈랭의 채보 버전 (6곡)
(한 악보에 위 아래로 표시)
'미스터 노바디'라는 유쾌한 가명으로 묻힐 뻔했던 음악이 마침내 완벽한 정식 스코어 《Weissenberg arranges Trenet》로 발매되자, 늘 레퍼토리의 갈증에 목말라하던 전 세계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이 마침내 이 매혹적인 곡들을 자신들의 연주회 무대 위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파아니스트 손열음
피아니스트 아르툰 미스치얀
피아니스트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 의 전곡 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