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보면 막연하게 전국 시대를 거친 ... 역전의 용사들....
그리고 개전 초기에 질풍처럼 방어선을 돌파하고 나아간...
이 두 가지가 왜곡의 주요 근거 인 듯합니다.
물론 전국 시대의 실전 경험을 한 이들의 실력을 무시하거나 애써 낮춰 잡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나치게 왜곡하는 것까지 나아갈 필요가 없는데, 그런 영상이 우후죽순으로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즉,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아야 하겠습니다.
# 상비군과 농민군
대개 상업이 발달하고 국가의 체력이 좋으면 상비군 규모가 일정 수준 이상이 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상비군은 모두 돈입니다. 국력이 뒷 받침 되어 준다면 상비군은 아주 강력한 힘이 됩니다.
아무래도 직업적인 전문성을 농민군이 완전히 채울 수는 없는 노릇 이죠.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수십만의 대규모 원정군을 꾸려야 했습니다.
아무리 전쟁을 밥 먹듯이 했던 전국 시대라고 하지만,
마냥 여유가 있어서 대군을 조직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상당수가 돈이 곧 상비군임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왜군에 대한 과장된 표현에 쉽게 넘어가게 됩니다.
즉, 당시 왜군은 징집된 농민 비중이 가장 높았습니다.
그럼 기록에서 다루는 귀신 같은 칼솜씨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어떤 경우에는 병졸들도 그러했다라고 하는데..... 애초에 근거 자체가 틀렸습니다.
기록의 대부분은 사무라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직속 정예인 하타모토들입니다.
이런 점을 알아야지만이 정기룡 장군과 황진 장군의 활약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 정기룡 장군
육전에서 60전 60승의 무패의 승리를 자랑하는 정기룡 장군
앞에서 위에서 말한 정예 왜군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마치 사무리이의 검술이 압도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당대 조선의 무관들의 실력은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기록에 보면 전 후 왜군 검술을 배우게 했다던지,
왜검의 기술을 도입한다던지 하는 것들은
상대의 장점을 배우는 차원이었고, 앞서는 부분을 도입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관 개개인의 역량에서 뒤쳐지는 것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경험이 풍부한 장수의 수 면에서는 뒤쳐졌지만요.
전국시대의 실전을 거치며 백병전의 달인이 된 정예 무사들의 수가
일본이 훨씬 더 많았다는 점...
지휘관 급의 경험 또한 풍부했다는 점 등에 비쳐보면,
전력 상의 기울기가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다만, 왜군이 하나 같이 ...칼솜씨가 귀신 같다 라는 식의 엉뚱하게 떠 돌아 다니는 이야기들은
애초에 성립 자체가 안된다는 얘깁니다.
왜군 중 대다수가 농민 중에서 차출 되어 나왔는데, 무슨 백병전의 달인이겠습니까.
실제는 왜군 병졸들은 전국 시대의 보병 방진을 구성하고, 4~5미터 가량의 장창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병졸의 상당수는 조총 사수로 훈련 받았습니다.
제가 한 과장 조금 보태 백 번은 이야기 했던... 칼을 도대체 누가 찰 수 있었냐는 것입니다.
못해도 권력과 재력이 있는 가문의 친위 사병,, 사무라이 정도는 되어야 칼 한 자루를 쥐는 셈이며,
대부분은 지휘관 급입니다.
병졸이 가지고 있던 카타나는 싸구려...한 번 쓰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즉, 가문을 대표해 나온 사무라이와 호위대 정도면 정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다 보니 정기룡 장군의 전술이 먹혔습니다.
심리전과 정보전에 모두 능했고, 지휘 능력 및 군 운영,
수성 능력에서 모두 뛰어났습니다.
왜군의 보급, 사기, 이동을 파악하고, 각종 병법에도 능하니,
전승으로 활약할 수 있었습니다.
정기룡 장군에 빙의해 봅니다.
적을 상대하는데 대부분 농민이라지만,
상대적 비중의 차이일 뿐이지
절대수로 보면 이렇게 많은 정예병이 가능한가 싶은 상대...라면,
정면 승부를 내면 승산이 안 보이겠죠.
그래서 택한 유인 매복 과 같은 유격 전술을 사용하여,
승리를 취하고 피해는 최소화 했고,
큰 전쟁에 임해서는 적군을 무수히 참살 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왜군의 수가 많고,
경험 많은 지휘관이 많고, 정예 병의 수도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 군사 전부가 무슨 살인귀라도 되는 식의 정보는 애초에 잘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쟁 초기에 대군의 기습에 당해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지만,
머리 속에서 바로 떠오르는 잘 알려진 무장 몇과,
이전에 소개한 적이 있는 황진 장군과 같은 출중한 무관들이 나서서
그것을 만회하는 많은 작전들이 먹혀들었던 것입니다.
정기룡 장군의 경우 상관을 구출하기 위해
적진 한복판에 돌격해 왜군들을 압도하고 구출해 온 기록이 선조실록에 실려 있으며,
가토 기요마사 부대와 맞붙어 선봉에서 왜군 장수들을 참살한 전력도 있습니다.
왜군이 아주 무력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당대 조선군의 무과 출신들의 실력이 너무 가려지는 것은 맞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조선의 무과는 말 위헤서 화살을 쏘고, 창을 휘두르며, 여러 병기를 다룰 줄 아는
무인을 선발하는 국가 공인 시험으로,
조선 무관은 거의 인간 병기급이었습니다.
그래서 정기룡 장군이 택한 전술에 기마 전술이 있었던 것입니다.
국가를 방어 하는 시스템이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마저도 초반에 무너지고,
안 그래도 경험 많은 왜군이 이를 잘 활용했던 것이 사실이나
이런 점 때문에 지나치게 왜군에 대한 판타지적 묘사를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을 불식시키려면,
아무래도 정기룡 장군의 활약상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조명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활약상에 비해 제대로 된 조명이 몇 차례 밖에 되지 않아 모르는 사람도 많을 정도인데,
그 활약상을 쫓아가다 보면 ... 흔히 기억하는 것과는 양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병전에서 거의 대적 불가라는 식은...
실제와는 거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가 있었지만, 다는 아니다라는 것이고요.
다가 아니라는 것은 ... 육전에서 활약한 5명 정도의 장군의 활약상만 쫓아가도...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도 없이 다이묘 개개인의 부대의 역량의 차이는 있으나 강력한 군대였고 달성 불가능한 수준의 전략적 목표 설정과 그 과정에서의 실책으로 일본이 패배한 것이 임진왜란입니다.
방점을 잘 못 찍는 것 같습니다.
유튜브 등을 통해 번지는 정예...이 의미를 본문에 다 적어 놓았음에도,
요점과 다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병졸로 종사한 세대가 ....
이 글의 주제인....유튜브에서 말하는 강력한 검술로 여럿을 벤다는 식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병졸 중 정예가 많다고 하면, 그것은 창으로 된 방진과 조총 숙련도에 해당합니다.
그 숙련이라는 것이 쇼츠나 게시글로 퍼지는 그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농민 중 군사 훈련을 받는 아시가루는,
제식, 창, 조총 장전 같은 것을 훈련합니다.
오히려 이런 것이 전쟁에서 위력을 발휘 합니다.
제가 잘 못 전해지는 이야기라고 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개인 무력을 드러내는 부분...
대부분 사무라이라는 것입니다.
병졸은 그런 훈련을 받지도 않고 전쟁시에 쓰일일도 별로 없는데,
애초에 창이나 조총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데,
무슨 카타나를 휘두르는 장면에서 등장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렇게 보셔도 됩니다.
예를 들어 김시민의 행적을 쫓아 가며 전투 상황을 보게 되면... 대략 보일 것들이 보일 것이니까요.
그중 사무라이는 6만에서 10만명 정도라고 검색되네요.
참고로 조총수는 3만명정도였고 이들도 조총 발사 후
백병전을 대비하기 위해 일본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네요.
징집병으로 끌려간 경우도 분명 존재했으나 인원맞추기로 끌려가는경우지 긴 전국시대와 마을간 다툼으로 생긴 용병적개념도 존재했고요
주무장은 창과 총은 맞지만 그시대 군대라 자기가 칼 준비하기도 했고
아시가루말고 하급사무라이들도 있고요
1. 왜군의 실상으로 언급한 전국시대 거쳐 사무라이와 호라모토를 제외하면 대다수가 징집된 농민병이고 이들의 개인 용기술은 부족했다는 지적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건 앞서 언급한 소설 삼국지연의와 같은 전쟁 영웅담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에 왜군을 과소평가하는 겁니다.
이미 일본은 조선 침략을 위해 대 군사가 필요하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이를 위해 장기간의 군사 훈련과 상비군을 운용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이제 막 끝난 전국시대 상황과 호족들의 불만을 둘려야 하는데 여기에 대규모 병력 양성을 하면 또 다른 불씨가 되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 조총이라는 것을 수입하게 된 겁니다. 즉 조총의 연사력은 문제가 있지만 숙련되지 않은 농민병은 열을 맞춰 교호로 발사하는 방식으로 군대플 편성하면 장기간 군사훈련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고 실제로도 적중률을 떠나 조선 군사들에게는 소형 화기에서 처음 듣는 화약 굉음에 혼미백산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2. 그리고 조선의 군사력을 너무 미화했습니다. 조선은 이미 봉족의 문란, 대립의 성행으로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자로 군대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조차도 전투를 할 수 있는 군사훈련을 받아서 상비군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즉 언급한 무과나 병기 운용 능력은 극소수의 지휘관 뿐이었고, 장수라 해서 무과출신만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조선은 건국부터 이미 단군조선은 부정하고 기자조선을 시원으로 한 모화사상에서 기초한 국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멸한한 한송시대의 문학을 숭상하고 명나라를 아비의 국가로 대했습니다. 즉 소중화 정책이었죠. 좋게 이야기하면 문치였고 기록의 역사를 가진 국가라 할 수도 있겠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조선이 고려의 외세가 아닌 신하였던 이성계가 반정을 통해 세운 역성 정권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모화사상에 빠졌고, 그 과정에서 역사를 바로 세운다고 많은 기록을 춘추관, 사관제을 포함해 승정원 등이 있었는데 이 곳은 역사 왜곡과 수거, 분서를 했었습니다. 그래서 삼국사기를 조선시대때 개찬 혹은 수찬했다고 강단사학계는 주장하는데, 그러면 왜 원초는 수거령을 통해 없앴는지 답변하지 못하고 있죠. 그리고 고려사 역시 역성 정권이기 때문에 당연히 고려왕들을 모화사상에 입각해 비판해야 했었으나 고려사에 나온 지명에 대해서는 고려의 땅을 오히려 확장했다는 조선이 고려의 지명 조차 정확히 비정하지도 못하는 곳이 4,000여개에 이릅니다. 강단사학계는 소중화에 따라 명나라 즉 중국의 지명을 옮겨왔다는데, 그건 지금 수백년이 흘러 원지명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모른다고 해명할수도 있지만 당대 실록은 보면 당대 왕들이 고려의 지명을 정확히 비정하지 못하고, 백제는 아예 도읍 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삼국사기를 개찬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다시 군대 이야기로 돌아오면, 조선 전기는 오위체계 및 병농일치의 보법을 기본으로 했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정규군의 의미가 없습니다. 방군수포가 만연했고, 앞서 말한대로 봉족으로 인해 대립제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정규군이나 농민 의병이나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의병장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그들이 거병해서 맞선 이유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독립군의 개념으로 의병을 생각하는 분들이 대다수가 아닐까 합니다. 앞서 말한대로 조선은 봉족의 대립제가 만연해 있었던 사회입니다. 병농일치의 보법이기 때문에 봉족의 대립제가 만연해 있다는 건 말 그대로 썩은 군대 그자체이고, 국짐당 및 윤석열처럼 돈이 있고 빽 있으면 군대 안 가고 아무것도 없는 자들만 그냥 여러차례 끌려가는 게 비일비재했다는 뜻입니다. 사실 역사에 관심 있으시면 오위, 봉족, 대립을 한 번들은 들어보셨겠지만 이게 그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해주는 곳은 없죠.
모화사항에 빠진 조선은 징집도 반대가 심했고, 상비군 수준으로 훈련도 되지 않았고, 농민 의병과 차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무관 이야기 하면서 잘 정비된 국가 시스템의 무과시험과 다재다능한 군인이라고 하시는데 앞서 언급한대로 조선은 이미 임란 전부터 봉족과 대립으로 군정이 문란한 상황이었고, 무관은 무과 출신이 장악한 게 아닙니다. 조선은 역성정권이었기 때문에 고려의 무신 정권의 역사 뿐 아니라 본인들과 같은 반란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성리학을 받아 국가 통치 이념으로 택한 겁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군사와 무반의 통제와 관료는 문관 출신이 장악했습니다. 무관이니 무과 출신이 했을 것이라는 드라마 너무 많이 보신 것 아닌지.....영하 및 도원 수, 부원수 모두 예외없이 정승이나 판사의 문관들이 겸직했었습니다. 그리고 병조판서요? 조선시대 병조판서를 보면 대부분 문관 출신입니다.
임란때 활약했다고 알려진 권율 장군 역시 식년시 문과 출신이니 무관 출신이 아니며 당시 도원수로 군대를 지휘했었습니다. 조선 전기 최고의 장수로 여진 정벌과 6진을 개척했다는 김종서 역시 문과 출신입니다.
그러면 하위조직은 무관이 아닐까?
지방 관찰사, 수령은 군사권은 모두 문관의 관찰사가 지휘했고,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대사를 겸직했었습니다.
그리고 의외로 잘 모르시는데, 무관 출신은 신분적으로 정 2품까지만 오를 수 있었던 게 조선시대 입니다. 즉 무과 출신으로는 신화적 인물이라 보시면 되요. 그게 바로 이순신, 김시민, 신립 등입니다. 모두 임란때 전공을 인정받은 인물이죠. 그러면 임란 전에는 없었냐? 바로 김종서를 도와 6진 개척한 이징옥 그리고 남이 정도입니다.
그리고 의병장으로 나섰던 인물들은 바로 지방 향리 출신들이예요. 그들이 왜 의병장으로 나섰을까요? 앞서 말한대로 바로 봉족과 같은 군역제 때문이죠. 세금보다 더 무시무시한 게 바로 징집입니다. 당대 봉족제가 문란하다고 했었죠? 그러면 누가 좋고 누가 힘들까요? 즉 지방향리는 좋고, 평민은 아주 죽을 맛이겠죠?
네, 지방향리로 호의호식하며 사는데 듣도 보도 못한 놈들이 쳐들와서 본인의 기득권을 망가트리려고 하죠. 왕은 도망갔고.....그러면 온 동네 사람들이 본인의 노비나 다름없고, 고리로 묶여 있는데 이들을 데리고 맞서는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벌써 대립제를 잊고 여기에 반론 펼 생각하지 마세요. 대립으로 군역이 완전히 망가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평민은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국가 무과시험, 군사훈련....나아가 조선의 군대는 상비군이었다는 주장을 하시려는 겁니까?
일본은 사무라이 칼로 침공한 게 아닙니다. 오로지 조총을 사열로 사격하는 것으로 밀고 올라온 것입니다.
조선은 왕부터 도망갔고, 대신도 그를 따랐습니다
왕이 버린 나라에서 지역 토호로 잘 먹고 잘 살던 지방향리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고리와 대립으로 종속된 평민들과 싸웠던 겁니다.
임란은 이순신이라는 장군이 없었다면 조선은 역사에서 없어질 뻔 했습니다. 기승전결 이순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