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대형 서점엔 백색소음이 책과 나란히 놓여 있었다.
캐주얼한 복장의 중년 여자는 고상한 표정으로 입술에 손을 가져간 뒤, 식기세척기가 자동으로 물을 분사하듯
검지손가락에 침을 연신 묻혀가며 책을 넘기고 있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 무리는 참새처럼 웃고 참새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며 책을 고르기보단 먹이를 찾으려는 듯 머리칼을 흔들어댄다.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는 베스트셀러 섹션을 향한다.
그의 시선은 타인을 향하지 않은 채 자신이 고를 책만을 향한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움직임으로 흔한 손님이란 응당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행동한다.
동공은 조금 커져 있었지만 선한 눈빛을 유지하고 있다.
누가 봐도 건실한 청년으로 보일 그는 서점 내 공간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온몸으로 느낀다.
생각하거나 계산하지 않고, 그저 느낀다.
사람들의 동선과 움직임을.
사람들이 소리 내다가 멈출 때의 순간들을.
분위기의 미세한 변화를.
손바닥에 약간의 땀이 나기 시작하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진 않는다.
이때다 싶은 순간이 온다면 그 이상 신중하게 시간을 끌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그 어떤 것보다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 결제하지 않은 책을 자신의 가방에 넣는다.
구태여 주변을 두리번거릴 필요는 없었다.
느끼면 그만일 뿐.
이런 생각을 하던 그는 얼굴에 가려움을 느끼며 여드름이 나기 시작한 부위를 가볍게 긁는다.
아직 그의 손엔 미세한 땀방울이 맺혀 있다.
그는 아직 목표량을 채우지 못했다.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끝을 봐야지란 생각을 하며 다른 섹션으로 장소를 옮긴다.
그제서야 그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조용히 관찰한다.
그의 눈동자엔 소리가 없었다.
조금은 목이 마른 느낌도 들었으나 신경 쓰일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얼굴과 몸은 은은한 활기로 차 있었다.
그의 동작엔 부자연스러움이란 없었고 그렇게 다음 목표물도 그의 가방에 들어갔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다고 느낀 그는,
기계식 시계에 있는 수백 개의 톱니바퀴가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파텍필립, 오데마피게 브랜드의 시계를 떠올리던 그는 문득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다.
그날 이곳에서 처음 느끼는 종류의 시선이었다.
다만 의심의 시선이라기보단,
어린 시절 자주 받았던 시선의 냄새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는 아까 긁었던 여드름을 재차 긁으며 호흡을 길게 가져간다.
'어릴 적 수없이 느꼈던 그 냄새가 맞을까?'라고 생각하던 그는,
발렌타인 데이만 되면 책상에 가득 차 있던 편지와 초콜릿 선물들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때의 선물들이 결과적으로는 그에게 독이 되었단 생각까지 미치자,
한결 더 차가워진 마음은 그의 얼굴을 더욱 선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 표정 그대로 날아온 시선을 향해 사뿐히 바라본다.
여학생들이었다.
순간 여드름 안쪽에서 미세한 바람이 새어나오는 듯한 느낌이 든 그는 다시 한번 여드름을 만져본다.
숨결이 나올 정도의 구멍은 아님을 확인하며 그는 안도한다.
작업을 마친 후에는 신속한 퇴장이 원칙이었기에 그는 슬슬 갈 채비를 한다.
옷매무새를 만지며 무심결에 한 번 더 여학생들을 본다.
'해랑이?'
중학생 때 사귀었던 1년 후배의 이름이 불현듯 떠오른다.
언덕 위에서 나누었던 3시간 동안의 첫 키스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녀일 리 없어.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으니.'라고 그는 생각한다.
얼마간 멍하니 있던 그가 눈에 초점이 잡힐 때 본 것은 『노르웨이 숲』이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 책을 집어 든 채 평범한 사람들처럼 책을 조금 읽기 시작한다.
아무 곳이나 펼친 뒤 고작 두 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 이 책을 읽어야만 한다고 느낀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데스크로 가 카드를 건네며 결제한다.
그는 직감한다.
이 책은 사야 한다고.
그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책이니 재미있을 것이다.
가방에 들어 있는 다른 책들의 존재는 잊은 채,
그는 서점을 나와 어딘지 모를 냄새가 나는 쪽을 향해 걸어간다.
구조를 다양한 매체로 풀어내는 작업을 합니다.
글과 사진, 그리고 영상까지.
아래 signature에 남겨두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