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체 산업이 유례없는 ‘하이퍼 불(Hyper Bull·초강세장)’에 올라탄 가운데 우리 증시와 수출은 초유의 호황을 맞았다. 지난 5월 6일 코스피는 6000선을 넘어선 지 70일 만에 7000 시대를 열었다. 수출 역시 지난 4월까지 11개월 연속 해당 월 기준 사상 최대 기록을 이어갔다. 중동 전쟁 충격이 반영될 것이란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다만, 일각에서는 반도체 의존도 심화에 따른 부문별 양극화와 원화 약세 등 한국 경제의 ‘대만화(Taiwanization)’를 우려하는 시선도 고개를 든다. 대만은 한국을 훌쩍 웃도는 경제성장률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쏠림에 따른 낮은 노동소득 분배와 임금 양극화, 부진한 소비, 높은 부동산 가격 등 그늘도 상당하다. 전문가들은 고환율과 K자형 양극화를 함께 겪는 한국 경제가 저출생·고령화, 산업 공동화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할 경우, 대만 전철(前轍)을 밟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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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는 한국 경제가 반도체 쏠림과 고환율에 노출된 대만을 닮아간다는 진단도 내놓는다.
대만 경제는 반도체와 수출 등 국부에 모든 자원을 쏟아부은 구조다. 의도된 통화 약세와 가격 경쟁력을 기반으로 한 수출 주도 성장이 경제 동력이다. 대만처럼 정책적으로 의도된 통화 절하(切下)는 ‘양날의 검’으로 평가된다. 수출 경쟁력 유지를 위해 의도된 통화 절하는 수입 물가를 높이고 자산 구매력을 낮춰 가계 실질 부를 줄인다. 그 대신, 수출 기업에는 가격 경쟁력이라는 보조금을 줘 저소득 가구에서 수출기업으로 사실상 소득 이전과 유사한 효과를 낸다.
아시아 대부분 제조업 국가는 자국 통화 약세를 유도했고 수출 기업이 벌어들인 달러로 외환보유고를 쌓아 다시 수출 산업을 키우는 성장 모델을 펴왔다. 문제는 이 모델이 성공하려면 수출 기업이 벌어들인 돈을 다시 국내 설비투자, 고용, 임금으로 환류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대만은 이 연결고리가 사실상 와해됐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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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대만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8.7%에 달했지만, 반도체와 비반도체 산업 간 격차는 오히려 확대됐다. 특히, 2024년 이후 수출이 40% 증가할 동안, 소비는 거의 늘지 않았다. 지난해 3분기 대만 GDP 대비 수출 비중은 75%까지 상승한 반면, 민간소비 비중은 44%로 낮아졌다. 이는 반도체 산업이 자본 집약적이고 소수 IT 대기업 중심으로 운영돼 기업 이익이 노동소득으로 폭넓게 배분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1∼10월 대만의 월평균 임금은 6만4000대만달러(약 290만원)로, 한국(420만원)의 70% 수준에 그쳤다.
최근 한국 경제 역시 대만과 겹치는 대목이 적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조영무 NH금융연구소 소장은 “대만은 TSMC 등 반도체 산업이 경제를 지탱하지만, 이면에는 극심한 쏠림이 있다”라며 “한국도 반도체 산업 성장의 온기가 국민 대다수에게 전달되지 않는 구조적 문제가 심화하고 있다. 증시 또한 지수 상승 기여도의 절반 가까이를 2~3개 종목이 차지한다”고 진단했다.
한국 수출 호황의 체감도가 낮은 것도 반도체 중심 성장의 파급 경로가 과거 제조업 호황기와 달라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과거에는 수출 증가가 생산 확대 → 고용 증가 → 가계소득 개선 → 소비 확대로 이어지는 경로가 비교적 선명했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은 자본집약도가 높고 생산 과정의 수입 의존도도 커 전후방 연관 효과가 제한적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산업연관표 기준 반도체의 취업유발계수는 2.4명으로 전산업 8.2명, 서비스업 10명은 물론 제조업 평균 5.1명에도 크게 못 미친다. 반도체 부문 취업자 수도 8만5000명으로 전체 취업자의 0.3% 수준에 불과하다. 수출에서 반도체 비중은 최근 30%대 후반까지 올랐지만, 고용과 소득 기여도는 오히려 약해졌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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