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말했고, 순자는 성악설(性惡說)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간은 본래 선도 악도 아니며 환경에 따라 결정된다는 견해, 즉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을 말합니다.
그런데 지지론은 다섯가지 성향을 기반으로 하기에 다소 다릅니다.
지지론에 따르면 인간은 유전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태어날 수 있습니다.
산후조리원 신생아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모두 다릅니다. 어떤 아기는 조용히 잠을 자고, 어떤 아기는 끊임없이 웁니다. 어떤 아기는 낯선 자극에도 편안하고, 어떤 아기는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같은 날 태어났고, 같은 환경에 있지만 이미 다릅니다. 아직 어떤 경험도 쌓이지 않은 상태인데도 이미 다릅니다. 이것이 선천적 성향입니다.
1~2살 아기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모두 다릅니다. 어떤 아이는 낯선 사람을 보면 방긋 웃으며 다가가고, 어떤 아이는 엄마 뒤에 숨습니다. 어떤 아이는 넘어져도 털고 일어나고, 어떤 아이는 한참을 웁니다. 어떤 아이는 새로운 음식을 거침없이 먹고, 어떤 아이는 입도 대지 않습니다. 이것이 타고난 성향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환경에 따라 본인의 의지에 따라 다시 선해질 수도, 다시 악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비록 선천적 성향은 바꾸기 어렵지만, 후천적 성향은 경험과 성찰을 통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어떤 경험을 하느냐, 어떻게 성찰하느냐에 따라 최종 성향은 충분히 바꿀 수 있습니다.
비유하며, 각 타고난 반죽 재료가 다른 쌀, 밀, 옥수수 가루처럼 근본 재료는 처음부터 다른거죠.
거기에 어떤 재료를 추가하고, 얼마나 치대고, 어떻게 굽느냐에 따라 결과물은 달라질 수도 있고
서로 비슷한 모양이 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하지만 겉모습이 비슷해 보여도 근본 재료는 다른거죠.
사람도 마찬가지인거죠. 어떤 성향을 타고났더라도, 내부의 의지나 외부의 환경이
그 성향의 발현을 억누르거나 통제하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는
그 사람의 본질을 알기 어렵죠. 성향이 없어진 게 아니라, 눌려 있는 것이라 봅니다.
다만 쌀반죽이 밀가루반죽이 될 수는 없듯, 타고난 본질을 완전히 바꾸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반죽을 받았든, 어떻게 빚느냐는 여전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거의 비슷한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환경 과 경험은 합쳐도 될 것 같습니다.
어떤 경험을 하는가를 포괄하는 것이 환경이나
그것을 겪는 주체의 입장에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경험이니까요.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본 성향은 사실 흔들기 어려운 ... 강고한 무언가로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런데, 사람의 일생은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사고라는 것은 사실 경험에 기반합니다.
따라서 어릴 때는 이 경험의 비중이 적지만
점차 커져 가게 되고...
성인이 되고 난 후에는...
그 사람은 곧 그 사람의 경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죠.
타고난 성향은 이 경험을 쌓아 가는 틀이라고 할 수 있어서,
모든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하는지 영향을 주는 것이니
부모의 역할은 이 경험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게 돕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를 위하고 욕심이 있으니까요.
인간의 본성은 생존과 번식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 관점에서 보면 타인보다 내가 먼저 살아남으려 하고, 내 자손을 더 잘 키우려 하는 것이 본능입니다. 이것이 때로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방향으로 작동하기에 악해보일 수 있습니다. 성악설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이 있습니다. 생존이라는 본성 안에는 혼자 살아남는 것뿐만 아니라 함께 살아남는 것도 포함됩니다. 인류가 이만큼 번성한 것은 서로 협력했기 때문입니다. 기생이 아닌 공생도 결국 생존 본성에서 나온 전략입니다. 그렇다면 본성이 반드시 악의 방향으로만 작동한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생존을 위해 가족을 챙기고 그게 더 넓은 의미로 쓰이는게 마을,국가,세계까지 가는거니까요.
기본적으로 공감력이 약하게 태어나면 사이코패스가 되는거고
성악 성선 다 맞는 말이죠.
후천적 경험과 뇌의 변화로 바뀔수도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