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李대통령 "금융기관 공공성 너무 취약…'포용금융' 의무 주지시켜야"
李대통령, 김용범에 "금융기관 준공공기관 지적, 잘 하셨다"(종합) - 연합인포맥스
李대통령 "금융기관, 독점 영업하면서 공공성 너무 취약…서민 방치" | 뉴스1
"한은 지원으로 이자 수익 半공적역할…유리한 방안만 뚝 떼서 영업"
"서민 배제않는 '포용금융' 주지시켜야"…'금융개혁' 김용범에 힘싣기
김용범 실장 페북 메시지:
<금융의 구조 시리즈를 시작하며>
하나의 질문이 금융을 떠돌고 있다.
왜 가장 여유 있는 사람은 가장 낮은 금리를 누리고,
가장 절박한 사람은 가장 비싼 돈을 써야 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 질문에서 출발한다.
신용이라는 기준을 돌아보고,
시장이 작동하는 방식을 들여다보고,
마지막으로 그 구조를 어떻게 다시 설계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세 편에 걸친 짧은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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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 한국 금융은 왜 이토록 잔인한가: 신용등급이라는 불완전한 과학
이 질문은 낯설지 않다.
형태만 바뀔 뿐 반복되어 왔다.
처음 들었을 때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왜 가장 여유 있는 사람이 낮은 금리를 누리고, 가장 절박한 사람이 가장 비싼 이자를 내야 합니까. 거꾸로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처음엔 헛웃음이 났다.
신용의 기본을 모르시는 질문이라 생각했다.
돈을 갚을 능력이 증명된 사람에게 낮은 금리를 주는 것.
당연하다. 그것이 금융의 ABC이자 흔들리지 않는 질서니까.
우리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질문은 틀린 게 아니었다.
신용의 기본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당연시해 온 그 ‘전제’의 심장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금융은 도대체 누구를 지키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잣대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고 있는가.
어느 날 대통령이 다시 입을 뗐다.
“한국 금융은 왜 이렇게 잔인합니까.”
그땐 웃을 수 없었다.
그 말이 송곳처럼 가슴에 박혔다.
금융위원회가 술렁였다. 당혹감이 공기처럼 감돌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대답했다.
“이 시스템이 왜 존재하는지, 그 근본부터 다시 의심해 봅시다.”
그 말을 내뱉으며 나 자신을 돌아봤다.
나는 이 잔인한 시스템을 설계하고, 작동시키고, 정당화해 온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명백한 공범이다.
이 글은 그 비겁했던 자각에서 시작된다.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다. 처절한 성찰이자, 어떻게든 바꿔보자는 몸부림이다.
금융의 출발은 실로 단순하다.
남는 돈이 있고, 필요한 돈이 있다.
금융은 그 간극을 잇는 다리일 뿐이다.
질문도 단순해야 한다.
“이 사람은 돈을 돌려줄 사람인가.”
담보가 있다면 계산은 쉽다. 못 갚으면 뺏으면 그만이다.
문제는 사람의 신용만 남았을 때다.
그때부터 금융은 사람을 분석하기 시작한다.
얼마를 버는지, 빚은 얼마인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
이 복잡한 생애를 숫자로 압착한다.
그 결과물이 바로 ‘신용등급’이다.
이 발명품은 제법 근사해 보였다.
불투명한 미래를 수치로 환산하는 시도. 합리적이다.
실제로도 잘 들어맞는다. 등급이 높은 사람이 실제로도 돈을 잘 갚는다.
하지만 비극은 그 지점에서 싹튼다.
신용등급이 상환 능력을 측정한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
등급은 철저히 ‘과거’만 본다.
안정적인 궤적을 그리며 살아온 삶은 우대하지만, 거친 풍랑을 견뎌온 삶은 가차 없이 깎아내린다.
연봉이 같아도 정규직과 자영업자는 신분이 다르다.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금융 거래 기록이 없으면 잠재적 낙오자가 된다.
실직, 질병, 이혼 같은 삶의 가혹한 변수들은 모델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신용등급은 미래를 예측하지 않는다.
그저 정교하게 요약된 ‘과거의 잔상’일 뿐이다.
그런데 이 숫자가 세상에서는 절대적인 신이 된다.
대출의 성패를 가르고, 금리의 높낮이를 정한다.
한 사람의 경제적 경로를 좌우한다.
이것은 점수가 아니라 구조다.
금융이 설계한 보이지 않는 계급장이다.
시스템은 ‘평균의 정답’을 위해 개인의 억울함을 기꺼이 희생시킨다.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한 사람의 사정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질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왜 가장 힘겨운 이가 가장 무거운 금리의 짐을 지는가.
분명히 해둘 게 있다.
이것은 단순히 금리를 낮춰주자는 동정론이 아니다.
위험을 무시하자는 무책임한 이야기도 아니다.
위험은 실재하고, 그에 따른 가격표는 필요하다.
진짜 문제는 그 위험의 분류가 정말 ‘공정하고 정교한가’에 있다.
답은 단순하다.
그가 더 위험한 인간이라서 높은 금리를 내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만든 시스템이 그를 ‘위험한 집단’으로 묶어버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사람의 실체가 아니라, 우리가 짠 설계도에 있다.
역설적이게도 모델이 정교해질수록 시스템은 더 위태로워진다.
숫자를 맹신하게 된 금융은 더 과감하게 돈을 빌려주고, 더 높은 레버리지를 쌓아 올린다.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이 커질수록 거품은 부풀어 오른다.
2008년의 파국이 증거다.
금융은 리스크를 잘게 쪼개고 섞으면 안전해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집값이 일제히 고꾸라지는 현실 앞에서 모델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중요한 건 이 지점이다.
재앙을 만든 건 개별적인 인간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신용을 재료 삼아 탐욕의 탑을 쌓은 구조였다.
그런데 위기 이후 세상은 어떻게 변했는가.
미증유의 충격을 겪었으니 근본적인 성찰과 혁신이 뒤따를 줄 알았다. 하지만 금융은 오히려 더 엄격하고 폐쇄적인 성을 쌓았다. 서류는 늘었고, 점수는 더 촘촘해졌으며, 문턱은 더 높아졌다.
성찰은 멀었고, 대신 격벽 구조만 더 철저해졌다.
구조의 실패를 개인의 책임으로 치환하는 교묘한 방향 전환이었다. 문제를 만든 곳과 통제받는 곳이 완전히 달라진 셈이다.
그 결과, 금융의 양극화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성 안의 사람들은 더 공고한 보호를 받았지만, 변방의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올 통로를 찾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 왜 이토록 시스템이 정교해질수록, 그들은 오히려 안으로 초대받기가 더 어려워지는 걸까.
이 지점에서 다음 질문이 시작된다.
누가 위기를 만들었는가.
그런데 왜 개인들만이 그 책임을 떠안고 시장 밖으로 밀려나는가.
2편 — 금융위기는 누가 만들었나: 절벽으로 설계된 도넛 시장
금융위기가 휩쓸고 간 자리를 복기해보면 기이한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시스템을 뒤흔든 파국은 언제나 거대 자본의 위험이 임계치를 넘어설 때 시작되었지만, 그 대가를 가장 가혹하게 치르는 건 역설적으로 가장 밑단의 개인들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금융사도 예외는 아니다. 저축은행 사태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의 무리한 질주가 멈춘 결과였고, 레고랜드 사태는 당연시되던 보증의 신뢰가 하룻밤 새 무너진 참사였다. 조선사 부실, ELS 등 파생상품의 몰락까지. 시스템을 마비시킨 거대한 폭발은 언제나 자본의 최전선, 그들만의 정교한 설계와 모델 속에서 잉태되었다.
개인의 책임이 가벼웠다는 뜻이 아니다. 2000년대 초 신용카드 대란처럼 무분별한 소비가 사회적 홍역을 치르게 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국지적인 ‘부실’이었을 뿐, 금융 시스템 전체를 무너뜨리는 ‘재앙’의 몸통은 아니었다. 오히려 개인은 이 거대한 성벽을 지탱하는 가장 성실하고 안정적인, 금융의 기초 토양에 가까웠다.
그런데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위기를 만든 몸통들은 ‘대마불사’의 논리로 살아남거나 구조조정이라는 명분 뒤로 숨지만, 후폭풍은 대출 서류 한 장 들고 은행을 찾은 중저신용자들에게 향한다. 리스크 관리라는 명목하에 가장 먼저, 가장 서늘하게 문전박대당하는 건 늘 이들이다.
이 기이한 비대칭은 신용등급과 금리라는 숫자로 그 민낯을 드러낸다. 상위 등급은 낮은 금리로 안온하게 자금을 조달하지만, 그 아래는 깎아지른 듯한 고금리의 절벽이 기다린다.
문제는 그 두 지점 사이가 크게 비어 있다는 거다. 마치 가운데만 휑하게 뚫린 커다란 도넛 같다. 양극단에는 시장이 존재하지만, 정작 가장 많은 사람이 머물러야 할 허리춤은 외면당한 채 방치되어 있다.
왜 이런 기형적인 모양새가 되었을까.
사람의 삶과 신용은 흐르는 강물처럼 연속적이다. 키나 몸무게가 그렇듯 대부분의 사람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중간에 모여 있고, 위험도 그 궤적을 따라 점진적으로 변하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금융의 렌즈는 이 무지개 같은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우량’과 ‘불량’, ‘승인’과 ‘거절’이라는 이분법적 칼날로 사람의 인생을 잘라 낸다. 신용점수 1점 차이로 1금융권의 문턱과 고금리 시장의 경계가 갈리는 건 통계의 과학이라기보다 운영의 편의를 위한 단순화에 가깝다. 삶의 위험은 완만한 오르막인데, 금융이 내놓는 답안지는 중간 계단이 통째로 빠져버린 끊어진 사다리다.
이건 금융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회피 전략’ 때문이다.
은행에게 중간 지대는 가성비가 맞지 않는 구간이다. 데이터 깨끗한 우량 고객을 기계로 걸러내는 건 쉽고 싸다. 반대로 아주 높은 이자를 물려 리스크를 상쇄하는 고금리 시장도 나름의 수익 모델이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정말 갚을 의지가 있는지 정밀하게 들여다보고 금리를 조정해야 하는 구간은 품이 많이 든다. 리스크는 관리해야겠고 비용은 쓰기 싫으니, 그 구간을 다루지 않는 선택이 더 합리적으로 작동해 온 셈이다.
핀테크가 등장하면 이 구도가 깨질 줄 알았다. 하지만 정보가 늘어날수록 선별은 날카로워졌을지 모르나, ‘회피’라는 본성은 바뀌지 않았다. 데이터는 사람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더 우아하게 거절할 명분을 찾는 근거로 전락했다.
결국 정부가 보증을 서고 금리를 낮추며 이 빈자리를 안간힘을 다해 메운다. 물론 필요한 일이다. 그나마 그래서 금융이 전면적으로 부정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건 임시방편일 뿐, 구조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문제는 공급의 ‘양’이 아니라, 공급이 멈춰버린 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왜 가장 어려운 사람이 가장 높은 금리를 내는가.”
현실은 그보다 더 나쁘다. 그들은 높은 금리를 내는 게 아니라, 선택지 자체를 박탈당했다. 시장에 입장할 티켓조차 얻지 못한 채 쫓겨난 것이다.
이게 과연 시장 경제의 자연스러운 결과일까.
금융은 완전한 자유시장이 아니다. 국가의 면허를 받고, 공적 자금의 지원 아래 작동하는 제도적 산물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처참한 결과 역시 철저히 ‘설계된 구조’의 산물이다.
위험은 연속적인데, 금융은 그걸 가차 없이 끊어버린다. 그리고 그 경계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더 높은 비용을 감수하며 시장 밖을 떠돈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치밀하게 방치된 구조적 모순이다.
앞서 밝힌 대로 나 역시 이 시스템의 한복판에 있었기에 이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이 글은 누군가를 탓하기 전에 던지는 자백이자 반성이다. 우리가 만든 이 구조는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바꿀 수 있다.
이제 본질적인 질문을 마주해야 한다.
어떻게 이 절벽을 메우고, 다시 다리를 놓을 것인가.
3편 — 끊어진 시장을 잇는 방법: 금융을 다시 연결하는 설계
내 글을 두고 수많은 말이 오가는 것을 보았다. 성토와 조롱, 놀람과 공감까지. 나 역시 이 시스템의 한복판에서 위기를 수습하고 공적자금을 집행했던 사람이다. 그러니 이 비판들이 나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는 걸 잘 안다.
글을 쓴 목적은 신용질서를 무너뜨리거나 무책임한 탕감을 주장하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질서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그 과정에서 도대체 어떤 구간이 버려지고 있는지를 보자는 것이다. “이럴 수밖에 없다”는 변명 대신, 왜 그런 근본적인 질문이 반복되는지 그 불편한 근원을 따라가 보려는 시도다.
한국 금융의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개별적인 삶의 모습과 위험은 흐르는 강물처럼 연속적인데, 금융은 그걸 구간으로 나누어 다룬다. 그 사이에 생긴 틈, 그 깊은 골짜기에 수많은 사람이 빠져 있다. 복지와 공적 서민금융이 그 틈을 메우려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멈춰버린 금융의 엔진을 다시 돌리게 만드는 건 제도를 다시 설계하는 문제다.
방법은 세 가지다.
첫째, 은행이 ‘회피’를 합리적인 선택이라 믿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
현장의 반론대로 특정 구간에서 손실률이 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임계점이 과연 불변의 물리 법칙인가? 혹시 우리가 가진 낡은 측정 도구가 만들어낸 ‘자기실현적 예언’은 아닌가? 금융이 그 지점을 두려워하며 뒷걸음질만 칠 때, 그 빈자리를 메우는 건 불법 사금융과 절망이다.
이 판을 바꿔야 한다. 가계대출이 고신용자라는 안전한 온실 속에만 갇혀 있지 않도록 대출의 구성을 흔들어야 한다. 특정 구간을 비워두고서는 성장이 어렵도록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것이다. 그때서야 은행은 움직일 것이다. 거절할 명분을 찾는 대신 어떻게든 ‘튀는 리스크’를 세밀하게 쪼개고 선별할 방법을 고민할 것이다. 은행이 자기 문제로 고민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계단식 위기’를 넘어서는 진짜 금융의 근육이 생긴다. 그것이 금융의 본업이다.
둘째, 낡은 신용평가라는 ‘틀’을 과감히 넓혀야 한다.
언제까지 과거의 연체 기록이나 카드 이력만 쳐다보고 있을 건가. 금융 이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갚을 능력이 없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이미 매일의 소비와 납부, 플랫폼 활동을 통해 수많은 삶의 신호를 만들고 있다.
이 데이터들은 중요한 신호다. 기술이 없어서 안 쓰는 게 아니다. 기존 방식으로도 충분히 수익이 나니 절실하지 않은 것뿐이다. 특히 인터넷은행들에게 이 숙제를 엄중히 맡겨야 한다. 그들이 가진 데이터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지 명확히 증명하게 해야 한다. 금융에서 가장 무거운 책임은 규제가 아니라 면허에 따른 책임이다. ‘체리피킹’은 인터넷은행의 사명이 아니다.
셋째, 서민금융기관의 역할을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야 한다.
서민금융기관에 비과세 혜택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현실은 조합원 대출보다 중앙회 예치가 늘어나는 구조다.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흐르지 않는다. 문제는 전제에 있다. 기존 서민금융기관은 ‘서로 아는 관계’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현실은 달라졌다. 노동은 유동적이고 소득은 분산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흩어져 있다. ‘관계’를 전제로 한 기존 모델과 사람들이 ‘유동’하고 ‘원자화’된 기반의 현실 사이에 거대한 간극이 생긴 것이다.
단순한 지원 확대가 아니라 모델의 조정이 필요하다. 기존 기관이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할 유인을 설계하거나, 유동성을 전제로 작동하는 새로운 형태의 서민금융 주체를 허용해야 한다. 형태가 아니라 결과로 평가해야 한다. 누가 더 창의적이고 덜 차별적인 방식으로 이 난제를 해결하는가, 그 기준으로 평가하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결국 이 모든 제안은 하나로 귀결된다. 끊어진 시장을 다시 잇고, 방치된 시장을 메우는 것이다.
지금 한국 금융은 거대한 성채와 같다. 성안에는 낮은 금리를 누리는 고신용자들이 안온하게 머물고, 성벽 바깥 ‘성저십리(城底十里)’에는 금융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두텁게 산재해 있다. 이 견고한 이중 구조가 우리 금융의 서글픈 민낯이다.
여기서 우리는 금융당국의 역할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당국은 건전성 관리와 시스템 위기 방지를 지고의 사명으로 삼아왔다. 소비자 보호조차 피해 구제에 치중했을 뿐이다. 냉정하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 당국은 혹시 ‘건전성’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결과적으로 성안의 기득권을 더 두텁게 만드는 역할을 해온 것은 아닌가. 구조적 모순을 방치한 채 성벽을 높이는 데만 급급했던 것은 아닌가.
이제 눈을 들어 성 밖 저 멀리를 바라보아야 한다. 거기에서 금융의 사명을 다시 되새겨야 한다. 다소 거칠고 과격한 질문은 내가 던졌지만, 그 해법은 금융당국과, 면허라는 특권을 부여받은 시중은행·인터넷은행·서민금융기관이 내놓아야 한다.
신용질서는 배제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더 정교한 구분과 이해에서도 만들어진다. 무분별하게 돈을 늘리자는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제도 금융이 충분히 돌아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더 정확하게 평가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신용체계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방향이다.
은행들이 서민금융상품에 출연하고 재정이 중금리 상품을 만들어 시장을 보완하려는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포용금융은 별도의 구호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연속적인 위험에 연속적으로 대응하도록 금융 구조를 바꾸고 끊어진 구간을 다시 잇게 설계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이것이 잔인한 금융의 시대를 넘어, 연결된 금융으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이다.
<보론: 1997년이 남긴 그림자와 소유구조의 메커니즘>
연재를 이어가는 동안 금융 현장의 반응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당국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은행들도 조용히 내부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런데 논쟁이 개별 은행의 영업 방식이나 신용평가 모델의 정교함 같은 미시적 쟁점으로 흩어지는 것을 보며, 한 가지를 더 짚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글이 미시 모델을 탓하는 게 아니다. 그 모델이 작동하는 운동장의 기울기를 보자는 것이다.
혹시 모를 오해도 풀고 싶다. 이 글은 정부가 은행의 팔을 비틀겠다거나, 외국인 지분을 강제로 낮추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민간 금융에 국가가 개입하자는 주장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 은행이 왜 이런 선택을 반복하는지, 그 뿌리를 솔직하게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구조를 이해해야 설계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신용평가 모델을 방어하는 사람들은 리스크 기반 가격 결정이라는 시장 원칙을 내세운다. 그 기술적 성취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데이터에 기반한 정교한 모델링은 금융의 발전이 맞다. 그러나 모델은 구조를 반영하지 못한다. 모델은 주어진 환경과 규제, 그리고 자본의 성격이 만들어낸 과거의 결과값을 전제로 작동한다. 이미 형성된 구조를 상수로 받아들이고 계산할 뿐이다. 금융이 오랫동안 특정 구간을 외면해 왔다면, 모델은 그 공백을 위험으로 인식하고 다시 배제를 정당화한다. 배제가 배제를 강화하는 자기강화적 루프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모델 자체가 아니라, 그 모델을 그렇게 선택하게 만드는 더 깊은 구조다.
그 구조의 뿌리는 1997년에 있다.
외환위기는 한국 금융의 지배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꿨다. 시스템 붕괴를 막으려면 외국 자본이 필요했고, 그 자본은 들어왔다.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실제로 한국 금융의 안정성과 신뢰 회복에 기여했다. 이 점은 공정하게 인정해야 한다.
문제는 그 이후다. 외국인 지분이 유독 높은 것을 두고 대한민국 은행의 경쟁력이 뛰어나서라고 보기는 어렵다. 냉정하게 보면 오히려 반대다. 한국 은행이 외국 자본에 매력적인 이유는 면허와 규제라는 국가의 틀 안에서 안정적으로 보호되는 구조 때문이다. 예대마진 중심의 사업 모델, 비교적 낮은 변동성, 안정적인 배당. 이 조합이 우리나라 은행을 성장 산업이 아니라 안정적인 배당 자산으로 만든다. 외국인 지분이 월등하게 높은 것은 경쟁력의 결과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수익 구조에 대한 선호의 결과에 가깝다.
자본의 성격이 바뀌면 리스크를 보는 눈도 바뀐다. 글로벌 투자자에게 리스크 관리란 부실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변동성을 줄이는 것이다. 이 기준이 의사결정의 핵심이 되면 금융의 선택은 자연스럽게 정해진다. 고신용 구간은 변동성이 낮고 관리가 쉬우니 자본이 집중된다. 중간 신용 구간은 기회는 있지만 변동성이 크고 설명이 어려우니 점점 기피된다. 이것이 의도적인 배제라기보다 구조가 만들어낸 합리적 선택의 축적이다. 그러나 결과는 냉혹하다.
같은 신용평가 모델을 써도 독일 슈파르카세나 일본 지방은행은 다른 결과를 낸다. 그 차이는 기술이 아니라 자본의 성격과 운동장의 기울기에서 온다. 모델이 같아도 운동장이 다르면 결과가 다르다는 뜻이다.
여기에 건전성 규제가 더해진다. 건전성 규제는 한국 금융을 지켜온 핵심 장치였고, 그 공로는 분명히 인정받아야 한다. 다만 모든 규제는 동시에 유인을 만든다. 리스크를 낮출수록 자본 효율성이 개선되고, 이 기준은 은행의 의사결정에 그대로 반영된다. 은행은 점점 더 안전한 구간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간 구간에 대한 금융 공급은 구조적으로 축소된다.
제도 금융이 다루지 않는 구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더 높은 비용의 시장으로 이동하거나, 금융 시스템 바깥으로 밀려난다. 신용 격차는 고용, 소득, 자산 격차와 맞물리며 증폭된다. 그리고 그 비용은 결국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
이 구조를 바꾸자는 것이 왜 민간 영역에 대한 부당한 개입인가. 은행은 완전한 민간 기업이 아니다. 국가의 면허 위에서, 예금자보호라는 공적 안전망을 등에 업고, 위기 때면 구제금융의 보호를 받는 준공공 기관이다. 그 특권에 상응하는 사회적 역할을 요구하는 것은 시장 개입이 아니라 계약의 이행이다.
외국인 지분율을 강제로 낮추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유구조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구조가 만들어내는 의사결정의 방향이다. 장기적 관점을 가진 자본이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환경, 중간 신용 구간을 정교하게 평가할 역량,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여지. 이 세 가지가 함께 작동할 때 지금의 단층은 완화될 수 있다.
1997년 체제가 남긴 안정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선택이 만들어낸 구조까지 이제는 점검할 때가 됐다.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시스템의 안정을 얻었다. 동시에 우리 경제의 잠재력을 직접 심사하고 키워낼 금융의 일부를 외부 자본의 논리에 맡겨왔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들판을 되찾는 일은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구조 위에 다시 우리 방식의 질서를 보태는 것이다. 포용금융은 금리를 낮추는 문제가 아니다. 위험이 더 정확하게 가격으로 반영되도록, 금융이 더 많은 사람을 제도안으로 품도록 구조를 다시 설계하는 문제다. 구조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설계할 수 있다.
저신용자가 대출을 받으려면 높은 이자를 내야하고, 고신용자는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다..이건 자본주의의 근본입니다
이게 싫다면 전체 글로벌 금융시스템을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금융의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개별적인 삶의 모습과 위험은 흐르는 강물처럼 연속적인데, 금융은 그걸 구간으로 나누어 다룬다. 그 사이에 생긴 틈, 그 깊은 골짜기에 수많은 사람이 빠져 있다. 복지와 공적 서민금융이 그 틈을 메우려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멈춰버린 금융의 엔진을 다시 돌리게 만드는 건 제도를 다시 설계하는 문제다.
다시 읽어보시죠
말장난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10 9 8 7 6 ~ 1까지 준 연속화하게 만든 세부 구간이 있는데,
10과 1간의 신용 점수에 따른 금리를 역전시키자는 발상이 공감되진 않습니다.
https://news.einfomax.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13238
금산분리 원칙까지 깨면서 박근혜 정부 시절 인터넷뱅킹 만들어준 이유가 중금리 대출 해주라는 거였는데 별로 안해줬었죠..
아마 이쪽 관련해서 대안 신용평가모델을 더 잘 만들라는 이야기일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