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인간은 빨강 버튼과 파랑 버튼 중 하나를 눌러야 한다. (어떤 버튼을 눌렀는지는 서로 알 수 없다)
- 파랑 버튼을 누른 사람이 50%을 넘기면 인류 전원이 생존한다.
- 빨강 버튼을 누른 사람이 50%을 넘기면 빨강 버튼을 누른 사람은 생존하고 파랑 버튼을 누른 사람은 사망한다. 당신은 어떤 버튼을 누르시겠습니까.
두 개의 버튼 앞에서
상상해보자. 눈앞에 빨강 버튼과 파랑 버튼이 놓여 있다. 규칙은 단순하다. 파랑을 누른 사람이 절반을 넘기면 모두가 산다. 빨강이 절반을 넘기면 빨강을 누른 사람만 살고, 파랑을 누른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당신이 어떤 버튼을 눌렀는지 알 수 없다.
처음 이 문제를 마주하면 머리가 잠시 멈춘다. 빨강을 누르는 것이 합리적인가, 파랑을 누르는 것이 옳은가. 그 짧은 망설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마주하게 된다.
계산하는 사람의 답
차갑게 셈을 해보자. 빨강을 누르면 어떻게 되는가. 빨강이 다수면 산다. 파랑이 다수여도 어차피 모두 사니까 또 산다. 두 경우 다 생존한다. 그러면 파랑을 누르면? 파랑이 다수일 때만 산다. 빨강이 다수면 죽는다.
순수한 생존 확률로만 보면 빨강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게임이론에서 말하는 우월전략(dominant strategy)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손해 보지 않는 선택.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빨강을 누른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모두가 그렇게 합리적이라면 결국 모두가 빨강을 누른다. 그리고 그 순간, 인류가 가질 수 있었던 가장 좋은 결말—전원 생존—은 사라진다. 개인의 합리성이 우리를 살리기는 하지만, 우리를 가난하게 만든다.
파랑을 누르는 사람
파랑을 누르는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본 적 없는 타인을 믿는다. 그의 한 표가 결과를 바꾸는 것도 아니다. 수십억 중 한 표가 다수를 결정짓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그는 파랑을 누른다.
왜 그런가. 그가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파랑을 눌러야 한다는 것을. 모두가 "내가 굳이 왜?"라고 말하는 순간 모두가 죽는 결말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칸트의 명령이 떠오른다. "네 의지의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 내가 빨강을 누르는 것이 모든 사람의 행동 원칙이 된다면, 절반의 인류는 죽음으로 향한다.
파랑은 일종의 신앙이다. 내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신앙. 그들도 지금 같은 마음으로 파랑을 누르고 있을 것이라는 신앙. 그리고 그 신앙이 충분히 모일 때, 신앙 자체가 우리 모두를 구원한다.
빨강의 도덕적 무게
빨강을 누르는 일이 단순한 이기심은 아니다. 그 사람도 자신만의 이유를 가진다. "내가 파랑을 눌러도 다수가 빨강을 누르면 나는 죽는다. 나의 한 표는 결과를 바꾸지 않는다. 그렇다면 최소한 내 목숨은 지켜야 한다." 이것은 자기보존의 원칙이고, 어쩌면 가장 오래된 윤리다.
그러나 이 선택에는 숨은 무게가 있다. 빨강이 다수가 되어 살아남았을 때, 누군가는 죽었다는 사실. 나를 믿고 파랑을 누른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 빨강을 누른 사람의 생존은 언제나 누군가의 무덤 위에 서 있다. 이것을 알면서도 누를 수 있는가, 아니면 모르는 척 누를 것인가. 어느 쪽이든 그 무게는 사라지지 않는다.
진짜 질문
이 사고실험의 핵심은 "어떤 선택이 옳은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어떤 인류의 일부이고 싶은가.
모두가 빨강을 누르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남을 수는 있어도 함께 살 수는 없다. 매 순간 서로를 잠재적 배신자로 보고, 타인을 믿는 일은 어리석음의 다른 이름이 된다. 살아 있되, 누구도 곁에 두지 못한 채로.
충분히 많은 사람이 파랑을 누르는 세상은 다르다. 그곳에서는 보지 못한 타인을 믿는 일이 가능하고, 그 믿음이 실제로 보답받는다. 우리가 누르는 것은 단지 버튼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의 모양이다.
그래서, 당신은
이 문제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는 단순하다. 평소에는 가려져 있던 사실 하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매일 이 버튼을 누르고 있다. 세금을 낼지 말지, 줄을 설지 새치기를 할지, 약속을 지킬지 어길지, 누군가를 도울지 모른 척 지나갈지. 작은 빨강과 작은 파랑이 매 순간 우리 손가락 아래 놓인다.
정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당신이 어떤 버튼을 누르는지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고, 모두의 손가락이 모여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든다는 것. 그러니 다시 묻는다. 당신은 어떤 버튼을 누르겠는가.
잘.. 적었는것 같은데요..?
게임이론 죄수딜레마 교과서에 나오는 이런건 아주 세상을 간단화한 예입니다. 세상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단순 높앞에 보이는 이득만 이득이 아닌 간접적인 이득들이 있고 그걸 모두가 이해할 능력이 안되니 bounded rationality 사회가 법과 도덕으로 만들어 놓은거죠. Mechanism design theory 라고 합니다.
저 밑에 예를 단순 죄수 딜레마라고 간단하게 생각해 빨강을 선택한다는건 아쉽게도 게임이론 겉할기만 한겁니다.
빨강을 선택하명서 생기는 사회적 손해. 자기 주변 소중한 사람이 죽을수도 있고 설사 빨강만 살아남는 세상에서 살아남았다고 해도 과연 본인에게 이득인가? 이런것까지 생각하지 못하면 빨강이 논리적이다라고 생각하겠죠
만약 모두가 빨강을 선택했다면 되지 않냐라고 반문할텐데 모두가 빨강을 선택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냐라고 반문해주고 싶져
숫자, 효율, 생존, 경쟁, 최적화 같은 언어를 쓰면 굉장히 이성적으로 보이는데 그 안에 숨어 있는 전제는 보통 "인간은 결국 자기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남을 믿는 쪽이 순진한 것이다." 입니다. 이 전제를 받아들이면 빨강 버튼은 “현명한 선택” 이 되고, 파랑 버튼은 “도덕적 허세” 처럼 보이죠.
그런데 사회는 실제로 그렇게만 굴러가지 않습니다. 세금, 보험, 의료, 교통질서, 회사 협업, 오픈소스, 재난 대응, 이민 시스템, 심지어 가족 관계까지 전부 어느 정도는 파랑 버튼을 누를 거라는 상호 기대 위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빨강이 합리적이다” 라는 말보다 더 위험한 건, 빨강을 성숙함, 냉정함, 현실감각의 상징처럼 만드는 태도 라고 봐요.
아니라 살만한 세상을 선택할수 있다라는게 가장 중요한데 그걸망각하는 사람들이 많죠.
단순히 살아남는게 뭐가 중요합니까 살만한 세상에서 살아야 의미가 있는거죠.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낫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