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모래가 섞인 바람은 쇠붙이를 갉아먹는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에르난드의 밤은 언제나 비릿한 마력의 재와 눅눅한 땀 냄새로 시작된다. 나는 삐걱거리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을 무심하게 응시했다. 잔 바닥에 가라앉은 붉은 가루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먼지가 아니었다. 저 먼 사막의 심장, '어비스'가 뱉어낸 죽음의 잔해였다.
“어이, 클리프. 오늘따라 표정이 더 썩어있군. 죽을 날이라도 받아놓은 건가?”
탁자 건너편에서 비릿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에르난드의 하급 용병들 사이에서 '쥐새끼'라고 불리는 라토였다. 놈은 기름기 번들거리는 손으로 카드를 섞으며 내 기색을 살살 살폈다. 주변에는 녀석의 패거리인 어중이떠중이 용병 서넛이 둘러앉아 키득거리고 있었다.
“죽을 날이야 이미 오래전에 받아놨지. 에르난드에 발을 들인 놈들 중에 안 그런 놈도 있나?”
나는 대답 대신 잔을 들어 마른 목구멍을 축였다. 탁한 독주가 타들어 가는 고통을 안기며 넘어갔다. 입안에서 서걱거리는 모래의 질감은 이제 익숙하다 못해 내 신체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술이 갈가리 찢어진 내 마력 회로를 자극했다. 왼쪽 팔이 욱신거렸다. 소매 속에 감춰진 검은 반점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박동하고 있었다. 그림자 잠식 3단계. 이제 남은 시간은 길어야 일 년일 것이다.
“말 한 번 잘하는군! 그래, 어차피 죽을 인생이라면 한 판 크게 벌여보자고. 오늘 내가 아주 기가 막힌 물건을 건졌거든.”
라토는 품 안에서 가느다란 주머니를 꺼내더니, 내용물을 탁자 위에 쏟아부었다.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푸르스름한 보석 조각이 굴러 나왔다.
“심연석…….”
주변 용병들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비록 최하급이었지만,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마력은 이곳 에르난드에서 서너 달은 호의호식할 수 있는 가치였다.
“이거면 되겠나? 자네가 가진 그 녹슨 칼보다는 백배는 가치 있을 텐데. 설마 무서워서 피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아주 천천히 라토를 보았다. 녀석은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지만, 카드를 섞는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속임수. 놈은 손목 안쪽에 스페어 카드를 숨기고 있었다. 나는 놈의 뻔한 수작을 지켜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라토, 내가 여기서 너 같은 놈들 상대하며 보낸 세월이 몇 년인 줄 아나?”
“뭐, 뭐야? 갑자기 웬 훈계질이야?”
“네 손목 안쪽에 있는 그 카드. 그걸 꺼내는 순간, 그 손은 더 이상 네 몸에 붙어있지 않을 거다.”
순간 술집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라토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이내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주변 패거리들이 의자를 밀치며 일어섰다.
“이 미친놈이! 퇴물 용병 주제에 누굴 협박해? 얘들아, 이 새끼 버릇 좀 고쳐줘라!”
라토가 탁자 아래 숨겨둔 단검을 뽑으려던 찰나였다. 나는 술잔을 쥐고 있던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묵직한 술잔이 놈의 손목을 정확히 타격했고, 단검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쇳소리가 나기도 전, 내 검자루 끝이 라토의 턱 밑을 서늘하게 파고들었다.
“커헉……!”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놈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주변 용병들이 달려들려 했지만, 내 목소리 한마디에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한 걸음만 더 움직이면 이놈의 척추를 뽑아서 천장에 매달아 주지.”
내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용병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나는 라토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심연석 조각을 낚아채 주머니에 넣었다.
“이건 속임수에 대한 벌금이다.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라.”
나는 놈을 쓰레기 더미처럼 바닥에 내팽개쳤다. 라토와 녀석의 패거리들이 투덜거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서둘러 술집을 빠져나갔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술잔을 채웠다. 하지만 평화는 길지 않았다. 에르난드의 문을 두드리는 예사롭지 않은 진동이 술잔의 표면을 흔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끼이익-.
술집의 육중한 나무 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리자, 안으로 차가운 공기와 함께 붉은 폭풍이 몰아쳤다. 사람들의 욕설과 갈채가 뒤섞인 소음이 일순간 잦아들었다.
검은 망토를 두른 작은 그림자 하나가 문턱을 넘었다. 흙먼지로 뒤덮인 신발, 어깨에 걸린 남루한 천. 하지만 망토 사이로 언뜻 보이는 비단 옷자락은 이 거친 무법지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감을 내뿜고 있었다.
“어이, 꼬맹아. 길을 잘못 든 모양인데?”
입구 근처에 앉아있던 덩치 큰 용병 하나가 소년의 앞을 가로막았다. 놈은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가 소년의 어깨를 툭 쳤다.
“에르난드는 애새끼들이 올 곳이 아니야. 가지고 있는 돈 다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주변 용병들이 낄낄거리며 구경거리를 찾듯 모여들었다. 소년은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지만,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저쪽 탁자에 앉은 분을 만나러 왔습니다. 비켜주십시오.”
소년의 목소리는 맑고 고왔다. 이곳의 탁한 공기를 단번에 정화하는 듯한 청량함. 하지만 그 목소리는 용병들의 욕정을 자극할 뿐이었다.
“오호, 이놈 봐라? 목소리가 계집애처럼 곱네? 얼굴 좀 보자고!”
용병이 소년의 화드를 강제로 벗기려 했다. 나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지겨운 소음이었다.
슈악-!
나는 탁자 위에 놓여있던 포크를 가볍게 던졌다. 포크는 용병의 손등을 스치며 성급하게 뻗은 손을 멈춰 세웠다. 벽에 깊숙이 박힌 포크를 보며 용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구야! 어떤 새끼가……!”
“내 손님이다. 손 치워.”
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술집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조금 전 라토를 박살 내는 것을 본 용병들은 궁시렁거리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소년은 비틀거리며 내 탁자 앞으로 다가왔다.
“……클리프 경을 찾고 있습니다.”
소년은 내 앞에 서서 천천히 후드를 벗었다. 찰랑거리는 금발, 그리고 햇살을 머금은 듯한 황금빛 눈동자.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잠잠했던 기억의 파편들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
[“클리프, 자네는 페일룬의 마지막 방패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를 지키게.”]
불타오르는 성벽 위에서 나를 보며 미소 짓던 선대 국왕의 얼굴. 비릿한 피 냄새와 무너져 내리는 돌기둥 소리. 나는 그 기억을 애써 누르며 소년을 차갑게 응시했다.
*
“잘못 찾아왔군. 여기 경(Sir) 같은 건 없어. 시안 왕자라고 불렸던 녀석의 시체라면 모를까.”
소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녀석은 떨리는 손을 내밀어 내 탁자 위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그것은 푸른 빛을 내뿜는, 미세한 균열이 간 펜던트였다.
순간 내 왼쪽 팔의 검은 반점이 미친 듯이 박동했다. 소름 끼치는 고통과 함께 찾아온 익숙한 주파수. '어비스'의 심장 박동이었다. 나는 펜던트를 낚아채듯 쥐고 소년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걸 어디서 났지? 말해! 네놈 정체가 뭐야!”
“살려…… 주십시오. 대가는 무엇이든 치르겠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그 어떤 것도…….”
시안의 목소리엔 나조차 잊어버린 맹목적인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녀석의 펜던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가 내 왼쪽 팔의 고통을 아주 잠시, 아주 미세하게 가라앉혔다.
술집 밖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려왔다. 단순한 칼싸움 소리가 아니었다. 마력 탐지기가 적의 접근을 알리는 비명이었다. '까마귀 눈'. 발락의 사냥개들이 이미 마을을 에워싸고 있었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나? 발락은 에르난드 전체를 태워서라도 널 찾을 거다.”
“상관없습니다. 경께서…… 경께서 도와주신다면 저는 죽지 않습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펜던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루했던 은둔은 끝났다. 이제 다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갈 시간이었다.
“따라와. 놓치면 바로 죽음이다.”
나는 거친 손길로 검을 챙겨 술집 뒷문으로 몸을 던졌다. 붉은 모래바람이 우리를 삼키기 위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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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과 일부 설정만 따온 작품으로,
오리지널 스토리였다고 알려진 어린 왕자가 용병단을 찾아온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한 팬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