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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공원

[단편스토리] 한 사람의 이민, 세 가족의 미래 1/2 13

6
2026-03-13 03:40:37 142.♡.82.114
arielkim

1984년 부모님을 따라 남미로 이민을 나온 우리 가족은 1990년대 초반 미국으로 재이민을 결정했다. 

나와 동생이 아르헨티나에서 계속 살게 되어도 대다수 교포들과 비슷하게 의류업에 종사하게 될것이 뻔했기 때문에 더 많은 기회를 가지기 위해서 미국으로의 재이민은 현명한 결정이었다. 


아버지는 전파상에서 텔레비전과 전자제품을 고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고, 어머니는 도시 외곽의 작은 동네에서 옷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낯선 나라에서 시작한 삶이었지만, 부모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무렵 한인 사회에서 미국 이민을 준비하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길이 있었다. 병아리 감별 공장이나 봉제공장 취업을 통한 이민이었다. 부모는 결국 한 이민 브로커를 통해 봉제공장 취업 이민을 신청하기로 결심했다. 브로커 비용은 약 만 달러. 당시로서는 결코 가벼운 금액이 아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미 장성한 우리 형제는 모두 만 스물한 살을 넘긴 상태였다. 미국 이민 규정상 부모의 케이스에 동반 가족으로 포함될 수 없었다. 만약 정식으로 진행한다면 부모 한 건, 첫째 아들 한 건, 둘째 아들 한 건, 총 세 건의 이민 수속이 필요했다. 단순히 계산해도 삼만 달러였다. 가족에게는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결국 가족은 하나의 결정을 내렸다. 부모는 취업이민 수속을 진행하고, 우리 형제는 관광비자를 받아 먼저 미국으로 들어가는 방법이었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모의 취업비자 수속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 형제는 새벽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미국 영사관 앞에 서 있었다. 이미 긴 줄이 만들어져 있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사연과 희망을 품은 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 기다림 끝에 인터뷰 차례가 찾아왔다. 짧은 질문과 답변, 그리고 긴장된 침묵.


결과는 뜻밖의 행운이었다. 우리 형제 모두 관광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1996년. 가족의 인생에서 또 하나의 장이 시작되는 해였다. 부모는 취업비자를 받아 미국으로 이주할 준비를 시작했고, 우리 형제는 관광비자를 손에 쥔 채 새로운 대륙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가 북쪽으로 길게 날아오른 뒤 도착한 곳은 뉴욕이었다.  


낯선 공기, 거대한 도시, 그리고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미래.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분명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시작된 한 가족의 긴 여정이 이제 새로운 땅에서 이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1996년, 가족은 마침내 뉴욕에 도착했다.

낯선 도시였지만, 플러싱은 그들에게 비교적 익숙한 공기를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다. 거리에는 한국어 간판이 보였고, 아시아 식료품점과 작은 식당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곳에서 가족은 작은 집을 구했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뉴욕에서의 생활이 곧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부모님은 취업비자를 통해 합법적으로 미국에 머물 수 있었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두 아들, 즉 나와 동생의 합법적인 체류 신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이민 가정의 일상이 시작된 것처럼 보였다. 아침이 되면 아버지는 일을 나가고, 우리는 학교에 다니며 영어와 새로운 문화에 적응해 갔다. 하지만 그 평범한 일상 뒤에는 늘 한 가지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의 체류 신분이 아직 확실하게 정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부모님은 방법을 찾기 위해 변호사를 만나고, 서류를 준비하고, 가능성을 하나하나 검토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단순히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법적으로 이 땅에 머물 수 있는 자격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가족의 뉴욕 생활에는 두 가지 시간이 동시에 흐르고 있었다.

하나는 학교와 일, 친구와 이웃이 만들어 가는 평범한 일상의 시간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류와 비자, 그리고 미래의 신분을 기다리는 보이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부모님은 알고 있었다.

이 두 번째 시간이 언젠가 반드시 우리 가족의 미래를 결정짓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합법적인 체류 신분을 얻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스무 살 중반이었던 우리 형제에게 현실적으로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으로 여겨졌던 것은 결국 시민권자와의 결혼이었다.


많은 이민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신분 문제를 해결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주변에서도 “좋은 사람 소개해 줄까?” 같은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가 오가곤 했다. 하지만 막상 우리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우리는 막 뉴욕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상태였다. 영어도 완벽하지 않았고, 친구도 많지 않았고, 사회적인 관계도 거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민권자 배우자를 만난다는 것은 물론이고, 솔직히 말하면 그냥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방문비자를 학생비자로 변경하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변호사를 통해 여러 가지 방법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학생비자로 신분을 바꾸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절차만 제대로 밟으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변호사에게 지불해야 하는 수수료, 그리고 학생비자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등록해야 하는 학교 등록금과 각종 비용이 따로 필요했던 것이다. 단순히 서류 몇 장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계속해서 비용이 들어가는 구조였다.


결국 선택은 단순해 보이면서도 쉽지 않았다.

합법적인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돈이 필요했다.


뉴욕에서 이제 막 삶의 기반을 만들기 시작한 우리 가족에게 그것은 결코 가벼운 부담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적인 길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 형제에게 선택지가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합법적인 신분을 가진 부모님이 있었다. 부모님은 이미 영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영주권자의 자녀초청으로 이민 수속을 진행하면 언젠가는 우리도 합법적인 신분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단 하나였다. 시간.


우리 형제는 당시 스무 살이 넘은 영주권자의 21세 이상 미혼 자녀에 해당했기 때문에, 그 카테고리로 영주권을 받으려면 보통 10년 정도의 대기 기간이 필요하다고 들었다. 지금 당장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아주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길이었다.


그 10여 년 동안 합법적인 체류 신분을 유지하려면 결국 학생비자를 계속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학교 등록금과 각종 비용, 그리고 변호사 비용까지 계속 들어가야 했다.


결국 우리 가족은 현실적인 계산을 할 수밖에 없었다.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학생비자를 유지하는 비용은 너무 크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학생비자로 신분을 바꾸는 계획을 과감하게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뉴욕에서 잠깐 살아본 경험으로 보았을 때, 신분이 없으면 분명히 불편한 점은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뉴욕 한인 사회에는 불법체류 신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우리 역시 부모님을 통해 언젠가는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불체자로 살아가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다소 놀라운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관광비자로 입국했더라도 운전면허증을 만들 수 있었고, 은행 계좌도 개설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소셜 시큐리티 번호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그 시기가 마침 규정이 점점 엄격해지기 시작하던 때였는지, 뉴욕에서는 발급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직접 차를 타고 **메릴랜드**까지 내려가서 소셜 시큐리티 번호를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물론 불체자로 살아가면서 가장 큰 제약은 분명했다.


미국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


미국에서 출국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일단 불법체류 신분이 된 뒤에 미국을 떠나면 다시 입국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미국에서의 삶은 끝나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자연스럽게 미국 안에 묶인 삶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형제의 상황은 주변의 많은 한인 불체자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상당히 유리한 편이었다. 우리는 부모님을 통해 언젠가는 합법적인 신분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의 많은 한인들은 그런 작은 가능성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다. 영주권을 받을 방법도, 시민권자를 만날 기회도 없이 그저 막막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리는 분명히 불법체류 신분이었지만, 동시에 다른 불체자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신분은 없었지만,

언젠가는 신분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arielkim 님의 게시글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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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고 길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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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
SoSo_soberman
IP 63.♡.73.194
03-13 2026-03-13 03:54:42
·
책에서 가져온 이야기인가요
arielkim
IP 142.♡.82.114
03-13 2026-03-13 03:58:29
·
@SoSo_soberman님 제 개인 스토리입니다. 오래전 이야기라 잊혀지게 될 것 같아서 글로 남겨보면 어떨까 싶어 작성 해봤습니다.
Cosmonaut
IP 175.♡.246.7
03-13 2026-03-13 04:12:54
·
글을 잘 쓰시네요.
원래 이민 가시는 분들이 한국에서도 약간 상위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개인적으로는 조심스럽게 말씀드러 봅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arielkim
IP 142.♡.82.114
03-13 2026-03-13 04:19:34
·
@Cosmonaut님 감사합니다. 80년대에 이민을 고려했을 정도면 상위까지는 몰라도 중위권 이상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민둔
IP 24.♡.30.159
03-13 2026-03-13 05:07:07
·
미국에 사는 외노자인데 재밌게 읽었습니다. 다음편이 기대되네요~!
arielkim
IP 142.♡.82.114
03-13 2026-03-13 05:20:50
·
@민둔님 감사합니다.
삭제 되었습니다.
삭제 되었습니다.
SoSo_soberman
IP 63.♡.73.194
03-13 2026-03-13 05:25:30
·
감사합니다!
4fifty5
IP 12.♡.24.194
03-13 2026-03-13 06:00:16 / 수정일: 2026-03-13 06:02:25
·
제 미국 회사에서도 한국에서 가족 이민을 왔는데 부모님이 위와 비슷한 방법으로 영주권을 받을 때 동생 나이까지는 동반 자녀로 인정되어 영주권을 받았지만 언니인 본인은 가족 수속에 포함되지 못하는 높은 나이라서 받지 못했던 한국 사람이 입사 지원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학생 비자가 만기되기 전 취업하지 못하면 나머지 가족은 미국에 있고, 자신은 연고 없는 한국으로 돌아갈 상황이었죠. 다행히 취업이 되었고, H1 비자를 거쳐 사내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영주권까지 자력으로 얻었습니다.
이민 자체를 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기에는 한국에서의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미국으로 기회를 찾아 올 때 자금과 후원을 두둑히 지니지 못하고, 어려운 길이지만 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저는 위 본문이 그냥 넘어가지지 않네요.
arielkim
IP 142.♡.82.114
03-13 2026-03-13 06:06:01
·
@4fifty5님 관심가지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왕곰돌
IP 108.♡.95.53
03-13 2026-03-13 06:02:55
·
지금도 미국에서 신분 만들기가 쉽지 않죠
당시 얼마나 고생과 사연이 많을지 안 보아도 선하네요
arielkim
IP 142.♡.82.114
03-13 2026-03-13 06:06:44
·
@대왕곰돌님 감사합니다.
block51
IP 114.♡.200.108
03-13 2026-03-13 06:18:19
·
결말 궁금하네요. 해피엔딩이겠죠
arielkim
IP 142.♡.82.114
03-13 2026-03-13 06:38:10
·
@block51님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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