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화제인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며, 13년 전 영월에서 진행했던 제 사진 작업 <소년 단종>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당시 단종에 관한 작업을 구상하던 중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소년에게 묘한 끌림을 느껴 모델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친구는 과거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던 충신 엄흥도의 직계 후손, 엄제룡 군이었죠.
더욱 영화 같은 사실은, 제 사진 속에서 붉은 곤룡포를 입고 단종이 되었던 그 소년이 바로 다음 해 영월 '단종문화제'에서 실제 단종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570년 전의 얽히고설킨 역사가 21세기의 영월에서 다시 이어지는 듯한 인연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스크린 속 단종과 엄흥도의 서사를 마주한 뒤, 영화를 핑계 삼아 정말 오랜만에 제룡이와 연락이 닿아 반가운 안부를 나누었습니다. 13년 전 카메라 앞에서 거대한 역사의 무게를 함께 나누었던 여린 '소년 단종'과의 인연이, 시간을 건너 오늘 다시 한번 깊은 여운으로 다가옵니다.
작업 노트
소년 단종 (Boy, Danjong), 2013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 영월의 소년이 어린 왕을 마주하다.”
영월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 ‘단종’은 단순한 역사 속 옛 임금이 아니다. 이 지역의 소년들은 단종이 승하했던 17세 무렵의 나이가 되면, 겹겹이 둘러싸인 산세 속 유배지에서 홀로 두려움에 떨었을 어린 왕의 고독을 자신과 은연중에 동일시해보는 묘한 감정을 공유하곤 한다. 나의 이번 작업 <소년 단종>은 바로 이 지점, 거대한 역사의 무게에 짓눌려 우리가 미처 온전히 들여다보지 못했던 단종의 여린 ‘소년’ 시절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작업의 시작은 마치 예정된 운명처럼 다가왔다. 단종에 관한 작업을 구상하던 어느 날, 멀리서 걸어오는 한 소년을 우연히 마주쳤고, 순간 이상하리만치 그에게서 단종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놀랍게도 그 소년은 과거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던 충신 엄흥도(嚴興道)의 후손(엄재룡 당시 16세)이었다. 더불어 작업을 진행하며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 역시 단종의 역사와 깊이 얽혀 있는 순흥 안씨 가문의 후손이다. 수백 년 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인물들의 후손이 21세기 영월에서 ‘단종’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이어지게 된 것은, 이 작업이 과거와 현재의 끊어질 수 없는 인연을 잇는 필연적인 매개체임을 말해준다.
작품은 단종의 실제 유배지와 영월 곳곳을 배경으로 617 파노라마 및 4×5 대형 필름 카메라를 통해 촬영되었다. 화면은 다양한 시각적 장치로 단종의 넋을 소환한다. 텅 빈 숲과 건물 앞에 부유하는 ‘하얀 풍선’으로 어린 왕의 보이지 않는 영혼을 암시하고, 6x17cm의 장대한 파노라마 프레임은 수면을 경계로 삼아 시공간을 위아래로 분할하기도 한다. 나아가 4×5 대형 카메라로 포착한 장면들에서는, 무심하게 지나가는 지역 관광객들과 함께 한가운데 붉은 곤룡포를 입고 우뚝 선 소년의 모습을 통해 시공간이 충돌하는 이질감과 철저한 고독을 포착한다. 파노라마 화면 상단에는 박제된 역사처럼 정면을 응시하는 ‘과거의 단종’을, 하단에는 일상복을 입고 거꾸로 선 ‘현재의 소년’을 데칼코마니처럼 배치했다.
이는 570년 전 소년 왕의 시간이 21세기 또래 소년의 모습을 빌려 현재로 소환되는 과정을 은유한다. 역사적 비극성을 넘어, 외로움과 두려움을 안고 있던 한 명의 온전한 ‘소년’을 시공간을 초월한 공감으로 담담하게 재해석하고자 한다.
King Danjong of Boy – an jonghy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