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된 성향인가, 환경에 따른 반응인가: 정치적 양극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이 글은 특정 정치적 주장을 펼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 자신의 급격한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는 개인적인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저는 지난 27년 간 소위 몰몬교로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의 헌신적인 회원으로 살았습니다. 저에게 교회는 단순한 종교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저의 일상과 가치관, 도덕적 판단, 그리고 세계관 전반을 규정하는 완벽한 환경이었습니다.
20대 후반 미국으로 건너간 저는 대다수의 미국 몰몬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보수 성향을 보였습니다. 질서와 권위, 도덕적 명확성, 전통적 가족관을 옹호했고, 급격한 변화나 제도 개혁에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당시 저는 이를 ‘정치적 성향’이라기보다 신앙심의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교회의 본질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결국 탈퇴를 결심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 이후의 변화였습니다. 종교라는 강력한 환경을 벗어나자, 정치와 사회 이슈를 바라보는 제 관점은 짧은 시간 안에 거의 180도 바뀌었습니다. 과거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권위적 판단들이 설득력을 잃었고, 대신 맥락과 구조, 권력 관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소수자와 외집단, 제도적 불평등 문제에 대해서도 훨씬 민감해졌습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이건 내 안에 숨겨져 있던 진보 성향이 발현된 것일까? 아니면 특정 환경이 나의 사고방식을 일정한 방향으로 작동시켰던 것일까?"
보수와 진보, 뇌 구조의 차이?
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먼저 보수(우익)와 진보(좌익)의 일반적 특징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뉴욕대학교(NYU)의 관련 연구와 전 세계 수십 개국을 대상으로 한 ‘세계 가치관 조사(World Values Survey)’ 등은 두 성향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이 반복적으로 관찰된다고 보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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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우익) 성향: 질서·안정·전통·권위 중시, 명확한 규칙 선호, 외집단에 대한 경계, 강력한 리더십 선호, 급격한 변화에 대한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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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좌익) 성향: 변화와 제도 개선에 대한 개방성, 다양성 수용, 구조적 원인에 대한 관심, 협상과 타협 중시, 복합적 문제 해결 지향.
이러한 차이는 단순한 이념적 취향이라기보다, ‘위험과 불확실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다루는가’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때 학계에서는 이를 뇌 구조나 생리적 반응의 차이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존 히빙(John Hibbing) 등의 연구에 따르면, 보수 성향 응답자들은 위협·혐오 자극에 더 민감한 생리적 반응을 보이고, 진보 성향 응답자들은 인지적 갈등 상황을 처리하는 데 더 능숙한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생물학적 결정론’은 다음과 같은 현실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 한계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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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과 같이, 생애 국면이나 환경 변화에 따라 한 개인의 정치 성향이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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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나 안보 위기 직후 사회 전체(혹은 특정 세대)가 동시에 보수화되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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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처럼 종교나 특정 조직 환경을 떠난 뒤 가치관이 이동하는 수많은 사례.
고정된 ‘성향’이 아니라 가변적 ‘작동 모드’?
이 한계를 넘어서는 설득력 있는 설명은 최근의 사회심리학 연구들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ScienceDirect>에 실린 연구(“Threat causes liberals to think like conservatives”)나 <Wired>의 보도 등은 위협적인 환경이 인간의 인지 및 정치적 판단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볼 때,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고정된 성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 조건에 따라 활성화되는 두 가지 사고 모드가 잠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1) 방어·보존 모드 (Defense & Preservation M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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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동 조건: 위협, 불안, 상실 가능성, 통제 불능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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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질서와 권위 선호, 복잡한 맥락보다 단순한 해법 추구, 경계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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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표현: 보수화, 강한 지도자 선호, 기존 질서 수호.
(2) 탐색·확장 모드 (Exploration & Expansion M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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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동 조건: 심리적 안정, 예측 가능성, 실패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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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관용, 맥락적 판단, 제도 개선과 변화에 대한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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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표현: 진보화, 개혁 지지, 다양성 수용.
이 두 모드는 서로 배타적인 정체성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전환되는 상태(State)입니다. 종교라는 강력한 통제 환경을 떠난 뒤 제 사고방식이 급변한 경험이나, 경상도 출신 소년공이었던 이재명 대표가 훗날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마주하며 정치적 지향이 바뀐 사례 등은 모두 이 ‘모드 전환’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정치 현상에 이 프레임 적용해보기
이 프레임을 적용하면,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정치 현상들을 더 명료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1. 미국의 MAGA (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 중산층의 지위 하락, 일자리 불안, 기존 시스템에 대한 불신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극에 달했습니다.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 조사에 따르면, 미래를 비관적으로 인식하는 집단일수록 이민 제한과 강한 리더십을 지지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오바마 행정부 시기 월가 구제 금융이 초래한 좌절감은 점진적 개혁보다 기존 질서를 강력하게 재정렬해 줄 인물을 원하게 만들었습니다. 즉, 트럼프 현상은 그가 원인을 제공했다기보다, 미국 사회 내에 ‘방어·보존 모드’가 활성화된 환경을 그가 가장 효과적으로 파고든 결과로 보아야 합니다.
2. 한국의 보수 회귀 심리 한국 사회 역시 공정성 붕괴, 계층 이동 사다리의 실종, 안보 불안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소위 ‘묻지마 지지’나 강력한 검찰 권력에 대한 선호 현상은 특정 인물에 대한 팬덤을 넘어, 불안한 사회 속에서 통제와 질서, 그리고 과거로의 회귀를 원하는 대중의 방어 기제가 정치적으로 표출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3. 유럽 극우 정당의 약진 에너지 위기,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 문제,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닥친 유럽에서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나 프랑스의 '국민연합(RN)' 등 극우 정당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럽 유권자들이 갑자기 극우적으로 변해서가 아닙니다. 위협적인 환경이 구조화되면서 대다수 시민들에게 방어·보존 모드가 가장 합리적인 생존 전략으로 선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의 변화에 대한 의문점을 시작으로 해서 얻어진 정보를 분석해보면 결론은 하나로 다다르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보수화 혹은 극우화 현상은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악하거나 변해서가 아니라, 방어 모드가 작동할 수밖에 없는 위협적 환경에 우리가 더 오래, 더 깊이 노출되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가능성이 절대적이라는 말이 아니므로 오해없기 바랍니다.)
따라서 정치적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한 논의의 초점은 “누가 옳고 그른가”라는 도덕적 심판에서, “어떤 환경이 우리 뇌의 방어 모드를 상시적으로 켜두게 만드는가”라는 구조적 질문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봅니다.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우리는 MAGA든 한국의 정치 갈등이든, 혹은 유럽의 극우 돌풍이든, 같은 현상을 이름만 바꾼 채 앞으로도 계속해서 목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