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일관된 주장 중 개인적으로 가장 웃기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경고성 계엄"이라는 말입니다.
이 표현은 겉으로는 있어 보이지만, 법치주의 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형용모순에 가깝습니다.
계엄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알다시피 원래 그런 용도가 아닙니다.
대륙법이든 영미법이든, 계엄은 공통적으로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최악의 상황에서만 허용되는 물리적 강제력입니다.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던지거나
정치적 긴장을 조절하거나 심리적 압박을 주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 법 체계의 뿌리인 대륙법적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더 분명해집니다.
대륙법에서 국가 권력 행사에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바로 "비례의 원칙"입니다.
위협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대응 수단도 그에 맞아야 한다는 겁니다.
단순한 정치적 갈등이나 국정 혼란을 이유로 군 병력을 동원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정지시키는 계엄을 선포한다면 이건 비유하자면
파리 잡겠다고 대포를 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계엄은 애초에 필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위헌적인 과잉 조치가 됩니다.
더 아이러니한 건, 대륙법 논리에서 계엄은 원래 행정과 사법 기능이 사실상 마비된 상태를
전제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경고 차원에서 계엄을 선포했다”는 말은, 뒤집어 말하면
“군대를 투입할 만큼 상황이 절박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계엄의 법적 정당성은 시작부터 무너집니다.
영미법 체계로 가도 결론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영미법의 핵심 원칙 중 하나인
‘필요성의 원칙’에 따르면 계엄은 오직 실질적인 필요가 있을 때만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역사적 사례들을 봐도, 민간 법원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려진
계엄 선포는 대부분 법치주의를 훼손한 행위로 평가되어 왔습니다.
영미법적 사고에서 군대는 외부의 적과 맞서 싸우는 조직이지, 내부의 정치적 반대 세력을
겁주거나 길들이는 정치적 도구가 아닙니다.
그래서 국제적인 법리 기준으로 보면, ‘경고성 계엄’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런 시도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흔히 ‘친위 쿠데타’, 즉 권력이 헌법 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로 분류됩니다.
결론적으로 2026년 현재를 기준으로 봐도, 전 세계 어느 민주 법치국가에서도
국가 비상사태라는 극단적인 권한을 ‘경고’나 ‘메시지 전달’, ‘정치적 압박’ 같은
목적에 쓰는 걸 허용하지 않습니다.
계엄은 나라가 정말로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섰을 때 꺼내는 최후의 수단이어야 합니다.
누군가의 정치적 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확성기처럼 사용되는 순간
그건 더 이상 질서를 지키는 장치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신호탄이 됩니다.
이건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법이 공유해 온
아주 기본적인 원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윤석열이 왜 9수를 해야만 했는지를
반증하는 주장을 지금까지도 하는 것을 보며, 그 외통수였던 삶의 행패로 인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어이없이 망가질 수 있는지 교훈 삼아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길 바랍니다.
한 글자 한 문장도 반박못할것 같은데
서당개도 3년이면 된다던데... 사람인데도 평생 못알아먹어요
법을 안다는 사람들이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릴 하고 있으니 말이죠.
정말 저열하고 추잡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법리가 그냥 말장난 수준으로 떨어졌어요
기득권을 위한 말장난을 엄근진하게 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