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동안 몸담았던 직장을 떠나며 동료들로부터 받은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 느긋하게 마시던 중, 텀블러에 쓰인 HAPPY RETIREMENT 문구 아래의 영양 성분(Nutritional Facts)를 보고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행복한 은퇴"를 구성하는 요소들과 그 수치들을 하나하나 다시 읽으며, 자연스럽게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수치로는 결코 환산될 수 없었던 수많은 회의와 마감, 책임의 무게,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있었던 보람과 아쉬움이 떠올랐습니다. 그중에서도 *Endless Meeting 0%*라는 문구가 유독 눈에 들어왔습니다. 웃음이 났고, 그 웃음에는 농담을 넘어선 묘한 홀가분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텀블러는 은퇴를 축하하는 선물이면서, 동시에 제가 어떤 시간의 질서에서 벗어났는지를 조용히 알려주는 물건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제 하루의 리듬은 회의 일정이나 알람 소리가 아니라, 아침 햇살과 커피 향, 그리고 제 호흡에 따라 정해집니다. TV Remote Mastery 300%라는 장난스러운 문구조차도, 사소하지만 분명한 선택권을 되찾았다는 뜻으로 읽혔습니다.
물론 은퇴가 곧 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Adventure 400%라는 항목을 보며, 이 시간이 멈춤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더 느리게 걷고, 주변을 더 자세히 바라보고, 그동안 목적과 일정에 밀려 미뤄두었던 질문들을 다시 꺼내볼 수 있는 여유. 어쩌면 그것이 이 텀블러에 적힌 진짜 ‘영양 성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며 조용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25년의 시간은 마무리되었지만, 삶의 다음 단계가 이미 정해져 있을 필요는 없다는 점을요. 이제는 정답이 없는 문장들로 하루를 채워도 괜찮은 시기라고 느껴집니다. 숫자로는 적히지 않은 자유를 손에 쥔 채, 텀블러를 내려놓으며 다음 장이 어디로 이어질지 굳이 서두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장이 어디로 튈지는 명확한 거라 더 더욱 서두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은퇴해서 옮겨간 2평 남짓의 캠퍼 밴(Camper Van)을 사랑하는 아내와 냥이와 공유하면서 앞으로 펼쳐질 1년간의 Adventure가 어떻게 다가올 건지 기대가 됩니다. 이건 마치 사랑했던 전 애인의 집을 떠나면서 수년 간 가지고 있었던 택배 물건을 본 주인에게 전해주고 나오면서 텍사스 어느 시골의 교차로에 마주 서서 어느 방향으로 자신의 인생이 튈 건가 하는 그런 기대감이자 긴장감이랄까요.
물론 캠퍼 밴엔 Starlink Mini와 스마트폰이 장착되어 있으니 어디를 가든 매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확인하는 일은 여전히 일어나겠지만 치열한 삶을 사는 동료들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는 세상에 대한 피드백은 줄어들테니 오롯이 나만이 해석하고 분석하여 아내와 조곤조곤 먼나라에서 일어난 얘기처럼 말하겠지요. 마치 세상에서 큰일이 난 것처럼 두 극단이 만나 어느 한 극단을 처단하지 않으면 안될 것처럼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도 곱씹어보면서 조곤조곤 옛날 이야기하듯 말하게 되겠지요. 어쩌면 이게 은퇴 후 삶의 장점이겠지요.
40년 가까운 시간을 한국 사회의 중심과는 다소 떨어진 미국의 한적한 동네에서 살아왔고, 그 사이 이따금 조국을 방문해 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뿐 아니라 비슷한 시간을 해외에서 보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늘 바쁘고, 늘 급하며, 무엇인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쉼 없이 앞으로 밀려간다는 인상입니다.
짧은 체류 기간에도 사람들의 말은 빠르고, 판단은 즉각적이며, 사안은 금세 옳고 그름으로 나뉘어 정리됩니다. 중간의 망설임이나 유보의 공간은 그리 넉넉해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 최선이 언제부터인가 서로를 향한 여유보다는 자기 확증과 방어에 더 가까워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은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그 속도를 몸으로 견디며 살아가는 이들의 현실을 가볍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보이는 것은, 사회 전체가 끊임없이 긴장 상태를 유지한 채 달리고 있다는 모습입니다. 쉬는 법을 잊었다기보다는, 쉬어도 되는 순간을 허락받지 못한 채 달리고 있는 듯한 인상입니다.
어쩌면 은퇴 이후 제가 얻게 된 가장 큰 변화는, 이런 장면들을 즉각적인 판단이나 분노로 소비하지 않고, 잠시 멈추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거리가 있어야만, 다시 이해하려는 마음도 생긴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은 새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Happy New Year)
진짜 멋진 여행하시겠네요
얼마전 회사 상사에게 전달한 롤링페이퍼에 적은 문구입니다...
화이팅입니다.
은퇴를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열심히 노력해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가 옷을 벗은 친구들을 보면서
그래도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자..라는 생각으로 살고 있습니다.
좋은 글을 잠이 덜 깬 머리로 곰곰이 정독하며 많은 걸 공감했습니다.
아울러, 저 역시 은퇴 후 그런 여유를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행쇼~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하루 보내세요.
덧) 텀블러 보니 멋진 동료들과 지내셔서 시원 섭섭할 수 있겠네요.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행복하세요. 행복합시다.
행복한 은퇴생활 되세요.. 수고 많으셨고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