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이든 정책이든, 진보를 자처해 온 사람들이 보수적인 선택을 할 때 자주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이건 배신이 아니라 현실적인 선택이다”, “정치는 실리다”라는 말이죠.
겉으로 보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현실은 이상처럼 굴러가지 않고, 타협 없는 정치는 불가능하니까요.
그런데 이 말에는 항상 빠져 있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 실리는 누구의 실리인가?
실리 혹은 실리주의라는 말은 중립적으로 들리지만, 사실 기준을 숨긴 표현입니다.
무엇을 지킬 것인지,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 그리고 그 비용을 누가 감당하는지는 잘 말하지 않습니다.
특히 부동산 문제에서 말하는 실리는 대부분 기존 자산 보유자, 이미 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는 쪽의
실리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걸 실리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보편적인 실리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진짜 문제는 실리 그 자체가 아니라, 자기 예외화입니다.
“원칙은 맞지만, 지금은 예외다”라는 말이 반복되면, 그 원칙은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 원칙이 됩니다.
항상 예외가 되는 원칙은 이미 폐기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진보는 구조 개혁을 말하다가
개인 사정으로 이동하고, 불평등 해소를 말하다가 시장 현실을 이유로 물러서게 됩니다.
모든 타협이 배신은 아닙니다. 하지만 방향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같은 이름을 쓰는 건 문제입니다.
진보적 목표를 잠시 늦추는 건 타협일 수 있지만, 진보적 목표를 포기하면서도 계속 진보를 자처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때 “실리주의”라는 말은 설명이 아니라 면죄부로 작동합니다.
실리주의를 말하려면, 최소한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합니다.
이 선택으로 누가 더 불리해졌는지, 그 불리함은 일시적인지 구조적인지, 나중에 다시 고치겠다는 약속은
실제로 지켜졌는지에 대해 답해야 합니다. 이런 질문을 피한 채 “현실이 원래 그렇다”라고 말하면,
그건 실리주의가 아니라 현상 유지에 대한 합리화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야박하게 들리겠지만 “배신”이라는 말을 쓰는 겁니다.
정책 하나가, 행동 하나가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라, 진보라는 이름으로 쌓아온 신뢰와 도덕적 우위를
보수적인 선택을 정당화하는 데 써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게 반복되면, 다음번에 누군가 진보를 말할 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어차피 필요해지면 또 실리 타령하겠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실리주의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실리가 항상 같은 방향으로만 작동한다면
그건 우연이 아닙니다. 진보를 자처해 온 사람이 그 실리의 수혜자가 되었다면, 비판을 받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배신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면, 먼저 무엇을 포기했고, 그 대가를 누가 치렀는지부터 말해야 합니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이겁니다. 누가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라, 이미 제도화된 진보 속에서
해방의 가능성을 어떻게 다시 열어둘 것인가입니다.
이 질문을 회피한 실리는, 진보를 말하면서도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선택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글 잘쓰시네요 부럽습니다.
전 그냥 서 있는 장소가 변하면 보이는 풍경이 달라진다고 봅니다.
단지...보이는 풍경이 불길로 변하고 도망치지 못하는 것도 감당해야죠...
그 또한 본인이 이룬거니까
가짜 실리주의를 내세우지 말라는건지..
진보의 가식적인 면을 비판하고 싶으시니 건지요?
일단 여기서 진보진보 거리는 사람은 없는데 말이죠.
꽤 긴 기간동안 클리앙에서 20대 혐오가 심각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혐오를 내거는 분들의 핵심 논리는 이러했습니다.
'2찍해서 돈 벌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이익도 없는데 2찍하는 것은 혐오스럽다.'
이 궤변..부동산 문제랑 겹쳐보면 정말 현타 오더군요. 결국 2찍을 옹호하는 논리랑 크게 다르지가 않거든요
군자가 아니면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고금을 통틀어 군자는 거의 없다는 것을 우리 조상들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존재할지 모르는 군자만이 가능한 가치를 주장하면 결국 '우리편' 은 적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