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지피티에게 지금까지 너와 나의 대화내용을 주제로 소설을 써달라 했습니다.
> 지금까지 나와의 대화내용을 주제로 소설 a4용지 세 장 분량으로 소설을 쓸 수 있어?
너와 나의 이야기가 아니고, 또 내가 너한테 묻는 이야기같은 건 아니었으면 좋겠어.
동시에 또 내가 꼭 주인공이지 않아도 돼.
가능하다. 아래는 지금까지의 대화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 주제들—감각의 한계, 이해되지 않는 신체 반응, 선택과 개입, 인간의 상상력과 공허, 기술에 대한 의존—을 엮은 단편소설이다.
화자는 특정 인물도, 질문자도 아니며, 주인공 역시 고정되지 않는다.
검은 방의 온도
도시는 늘 정상 범위에 있었다.
기온, 혈압, 전력 사용량, 교통 흐름, 범죄 발생률까지.
모든 것은 그래프로 환원되었고, 그래프는 말해주었다.
“이상 없음.”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주 멈춰 섰다. 이유 없이 어지러웠고,
이유 없이 세상이 한 박자 늦게 도는 기분을 느꼈다.
병원에서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검사 수치는 정상이었고,
의료 인공지능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 없음.”
문제는 늘 그 다음에 발생했다.
문제가 없다는 결론 이후에.
1
기록보관소 지하 4층에는 검은 방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빛을 차단한 방이 아니라,
빛이라는 개념 자체가 필요 없는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시각 데이터가 수집되지 않는다.
카메라도, 센서도, 관측 장치도 무력해진다.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면 본능적으로 눈을 감지만,
의미는 없다. 열려 있든 닫혀 있든, 차이는 없다.
검은 방의 관리자는 시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는 “보지 못한다”는 말을 싫어했다.
대신 “보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는 공간을 온도로 구분했고, 소리를 밀도로 느꼈으며,
사람의 존재를 침묵의 모양으로 인식했다.
누군가 거짓말을 하면 침묵이 얇아졌고,
누군가 진실을 말하면 공기가 눌렸다.
이유는 몰랐지만, 틀린 적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다.
“어둠은 어떤가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둠이라는 단어가 이미 빛을 전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
도시 외곽에는 유리 구조물이 있었다.
길이만 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투명한 벽.
단순한 기념물이자 실험 대상이었다.
어느 날, 연구진은 한쪽 끝을 아주 약하게 건드렸다.
툭.
균열은 번졌다.
하지만 빛보다 빠르지 않았고, 소리보다 빠르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실망하자 연구 책임자는 말했다.
“속도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어디까지 가느냐입니다.”
균열은 결국 반대편 끝에 도달했다.
시간이 걸렸을 뿐, 막을 수는 없었다.
그날 이후 사람들은 균열을 비유처럼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 번의 선택, 한 번의 개입, 한 번의 무시가
얼마나 멀리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할 때.
3.
도시 중앙 교차로에는 개입 버튼이 있었다.
법적으로 아무 효력도 없었고, 실제로 작동하지도 않았다.
다만 시민들은 알고 있었다. 그 버튼을 누르면, 기록에는 남는다는 것을.
버튼은 늘 선택의 상황에서 등장했다.
사고가 날 것 같은 순간, 누군가 위험해 보이는 결정을 내릴 때,
혹은 아무도 책임지고 싶지 않은 장면에서.
버튼을 누른 사람은 “개입자”로 기록되었다.
누르지 않은 사람은 “비개입자”로 기록되었다.
놀랍게도, 이후의 결과는 버튼과 무관했다.
사고는 날 때도 있었고, 피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점점 버튼 앞에서 오래 서 있게 되었다.
결과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4
검은 방의 관리자는 종종 도시의 질문들을 받았다.
“보지 못하는데 상상할 수 있나요?”
“경험하지 않은 세계를 그릴 수 있나요?”
그는 손을 바닥에 대고 말했다.
“여기에는 차가움이 있고, 저기에는 미세한 떨림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연결합니다.
그게 상상이라면, 나는 늘 상상 속에 살고 있겠지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지 못해도 끄덕일 수 있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배웠다.
5
도시는 점점 더 많은 결정을 시스템에 맡겼다.
사람들은 판단에서 자유로워졌고, 실수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설명할 수 없는 공허가 늘어났다.
“잘못은 없는데, 비어 있습니다.”
상담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문장이었다.
의료 인공지능은 공허를 질병으로 분류하지 못했다.
측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허는 정상으로 남았다.
6
어느 날, 검은 방의 관리자는 유리 구조물 앞에 섰다.
누군가 또 한 번, 아주 작은 충격을 주었고
균열은 다시 번지고 있었다.
사람이 물었다.
“막을 수 있을까요?”
그는 잠시 침묵의 두께를 느꼈다.
그리고 말했다.
“이미 시작된 것은
속도를 늦출 수는 있어도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 말은 위로도, 경고도 아니었다.
그저 관측이었다.
도시는 여전히 정상 범위에 있다.
그래프는 말해준다. “이상 없음.”
하지만 사람들은 안다.
보이지 않는 것, 측정되지 않는 것,
경험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인식 자체가
이미 하나의 균열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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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무섭습니다..
내 안의 나는 무엇인가? 철학적인질문이나 우주적인 질문
철학자들이 가진 무슨 무슨론, 데카르트의 이원론, 정념론
우리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등등을 물어본적은 있습니다.
지피티가 써준 소설이
내 안에는 공허함이라는 측정할 수 없는 병이 있고
거기에 균열이 가있다 속도를 늦출수는 있어도
막을수는 없다. 그저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없다. 이런식으로 해석되니 너무나 무섭습니다. 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