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 존재는 어떤 무언가(모든 것들)와 맺고 있는 관계에 의해 정의됩니다. 본질 같은건 없어요.
관계에 의해 부모님 앞에서는 아들. 회사동료들 앞에선 회사동료. 친구들 앞에선 친구. 그냥 계속 변하는겁니다.
만약 글을 읽는 당신이 제 앞에 계시다면 남성대 남성. 남성대 여성. 체격 큰 사람과 작은 사람 등의 관계로 묶이겠죠. 당연히 하나로만 묶이지 않습니다. 부모님 앞에서 아들이 가장 큰 관계지분을 차지하겠지만 또 때에따라 남자일수도 다 큰 어른. 혹은 말동무. 친구등 뭐든 묶일 수 있어요.
다시 한 번 본질 같은 건 없어요. 내가 못생겼다? 누가 그렇게 정했답니까? 아 사회가요? 근데 그게 뭐. 제 와이프는 저보고 말뿐이지만 잘생겼다고 해줍니다. 어디 아프리카 어디가면 또 잘 생겼다고 해줄지도 모르고여. 키가 작다? 어디 소인족가면 저도 큰 키겠죠. ㅋㅋ
그냥 계속 변하는거에요. 지금 이곳. 이 시대의 저는 당연히 못 생겼죠. 주변 대부분이 절 그렇게 인식하니까요!! 그렇다고 그게 절대적이거나 본질은 아닌겁니다. 주변 대부분의 인식을 부정하란 말이 아닙니다. 지금 한국이란 곳에서 현시대를 살아가며 당연히 인정은 해야죠!!!!
거기 얽메이지 말라는거죠. 부모님 눈에는 세상 누구보다 잘생겼을테니까요. 부모님도 그렇게 생각 안하신다고여? 예시일 뿐 세상 누군가는 다르게 생각할거라니까요. 우주 전체가 그렇다고 한다고여? 이 시간대가 그렇다고 한다면 1800년대엔? 1700년대? 어느 시대에선가는 또 잘 생겼을 수 있어요. 그리고 잘생길 필요도 없고여. 존재와 관계를 설명하고자 나불거렸고여.
생긴거는 예일뿐이고...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나와 관계 맺는 존재에 의해 내가 결정돼요. 물론 관계는 서로 만들어가는거고여.
상대방의 존재도 어느 정도 내가 규정짓습니다.
내가 칫솔을 양치로 쓴다고 칫솔의 본질이 양치질을 하는거냐? 그건 또 아니죠.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다고 말할수는 있겠으나. 칫솔로 사람을 때릴 수도 있고 해지면 청소도구로도 쓰고. 벽에 박아넣어서 벽을 탈때도 쓸거고 던져서 사냥을 할 수도 있겠고 조각하면 조각재료도 되겠네요. 잘라서 두개 나눠가지면 우정의 증표도 되고 제 조악한 상상력으론 뭐 없지만 여튼
본질은 나와 상대(물건,개념,세계,뭐든.)가 맺는 관계에 따라 정해집니다. 관계라는게 보통 굉장히 다양하게 부를 수 있기에 또 하나로만 묶이지도 않고 계속 변하기도 하고여.
그러니 본질이 뭐다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허상입니다.
아니 내가 회사에선 이런 대우인데 친구들은 날 이렇게 대해? 가족들 사이에선 이러한데 여기선 저러해?
그걸 못 받아들이시는 분들이 가끔 있는데(그게 저였습니다만 ㅎㅎ)
그냥 그게 당연한겁니다.
관계에 따라 변하는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내가 더 또렷해집니다. 바르게 되더라고여. 아니 뭐 다 변한다고 해놓고 뭐가 바른거냐라고 물어보실지 모르겠는데...어떤 관계와 나의 모습에 대한 집착,편견등이 사라지면서 나를 있는 그대로 보고 바르게 됩니다. 표현하기 힘들지만 이보다 좋은 표현을 전 모르겠습니다.
불교의 근본은 변화에요. 변화를 다양한 관점에서 인정하면 왠만한 고는 날아갑니다. 그 변화 속에서 나를 찾는게 또 굉장히 재밌는데 그 나란게 고정된 나는 아닙니다. 본질은 없고 모든 것은 변하고 나도 변하고. 변하는데 뭘 찾냐고 하면 변하긴하는데 찾을 건 있거든요. 변화라는게 뭐 휙휙 변하는건 아니라 변화의 흐름을 찾는다고 해야하나요. 표현하기가 굉장히 어렵네요.
여튼 모든게 변한다라는 걸 다방면으로 깊이 수긍할 수록 집착과 편견이 덜어지고 바르게 되고 바르게 보입니다. 팔정도의 몇가지는 자연스레하게 되는거죠.
존재의 본질은 없어요. 굳이 말한다면 관계가 존재의 의미와 역할을 만들죠. 관계가 없다면 존재도 없습니다.
제가 부족해서 길게 썼네요.
제 개인적인 깨달음에 기반하여 썼지만 불교의 입장은 다를 수 있습니다. 다만 제 근본이 부처님 말씀인지라.
나라는 존재가 관계에 의해서 고정되지 않고 변한다는 글이 요지인데, 뜬금 존재 그 자체를 들고 나오면 논점이 맞지 않는 것 아닌가요? 존재 자체의 유무를 논하는 글이 아닌 것 같은데요. 맨 마지막의 관계가 없다면 존재가 없다는 말도, 글의 주제와 맥락상 실제 존재 그 자체의 유무를 가르는 말은 아닌 것 같구요.
평온해지는걸지도?
내가 관계에서 해방될수록
놀랍도록 자유로운게 그때문일지도?
저라면 변하지 않는 열반을 변하는 무상과 함께 주장하겠습니다.
불생불멸은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된다고 봅니다. 변화속에서의 불생불멸이죠. 모든 것은 변하지만 뭔가 변하지 않는 것이 있긴한데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어요. 도가도 비상도 같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또 그걸 표현하는 순간 집착이 되고 고가 됩니다.
그리고 제가 말하려고 하는 불생불멸은 한백년님이 생각하는 불생불멸이 아닐겁니다. 전 어떤 흐름이나 방향성. 각자 다름. 아무리 변하더라도 내가 나일 수 있는 어떤 그것들을 불생불멸이라고 하고 싶지만 그걸 변하지 않는다 표현하면 안돼요. 뭐든 변화속에서의 불생불멸이어야 해요. 그래야 맞습니다.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본질은 존재(불생불멸)와 관계(인과보응)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입니다.
비중차이야 뭐 각자 고민하고 받아들이는게 다를겁니다.
제가 불교를 관찰해 보니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1.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만이 변하지 않는다.
2.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은 공존한다.
통합된 것을 해체를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지요. 그러나 해체와 변화를 강조하니 존재를 부정하더군요. 존재조차 변화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납득되지 않아요. 해체를 통해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 돈오이고 다시 그 존재를 바탕으로 관계의 세상에서 활용하고 사는 것이 점수의 길이라고 봅니다.
제가 1번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악업과 선업의 실행 판단입니다. 변하는 것만 있다면 악도 선도 변하는 것인데 왜 악은 지양하고 선은 지향해야 할까요. 오히려 악도 선도 같은 것이 되버리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