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강 교수님의 어머님은 수십년 전 부터 이미 한강 작가의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린다"를 인생으로 살아 오셨고, 자식에게도 살게 하셨군요.
계혜자 선생님과 하종강 교수님이 잔가시가 많은 작은 생선이었어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故 계혜자님이 현시대의 우리들을 살게 하셨습니다.
12.3의 밤에 우리를 구하셨고요.
감사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
펌글입니다: 원글보기
올해 100세인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셔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이 글을 쓴다.
법률방송과 3차례의 인터뷰를 했을 때, 아나운서가 “학생운동을 결심하게 되는 과정에서 어머니 영향이 컸다면서요?”라는 질문을 했다. 그 얘기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대학 1학년이었던 74년, 결정적 결단을 앞두고 나는 작고 어두운 내 방에 들어가 하루 종일 뒤척이며 나오지 않았다. 잡혀가거나 고문을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20년 동안 가꿔왔던 ‘가문의 꿈’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나를 더 망설이게 했다. 씻지도 않은 채 이불을 뒤집어 쓰고 뭉갰다. 어머니가 이따금 내 방문을 열어보시고는 아무 말 없이 닫으셨다.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아침 밥상머리에서, 중학생이었던 여동생에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오빠가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의 내용을 이 엄마는 잘 모른다. 너도 역시 잘 모르겠지. 그렇지만, 우리는 오빠가 지금 세상을 바르게 살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자. 바르게 산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세상이구나… 오빠의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가족으로서 최소한 그렇게라도 이해하자.”
그리고 잠시 뒤 이어서 말씀하셨다. 밥솥에서 밥을 푸시던 어머니의 모습까지 기억에 생생하다.
“그런데 그동안 엄마가 세상을 바르게 살라고 가르쳤잖아. 그렇게 가르쳐 온 에미로서… 이번에 오빠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했다.”
그 말을 내 얼굴을 보지 못하신 채 동생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한 격려를 받고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비겁한가? 며칠 뒤 나는 선배들과 함께 여관방을 빌려 이틀 동안 꼬박 등사기로 밀어낸(‘등사기를 민다’는 표현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그때는 참으로 ‘원시시대’였다) 유인물 뭉치를 라면박스에 싸 들고 학교로 들어가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학보사 기자가 찍어 준 그 날의 사진이 기록으로 남았다.
그날 저녁, 나를 연행해 가던 형사는 차 안에서 “야 인마, 손에 묻은 등사잉크라도 좀 지우고 잡히든지…”라고 혀를 찼다. 연행된 7명의 학생들 중에서 유일한 1학년이었던 나는 “1학년밖에 안 된 놈이 뭘 안다고 까부냐?”는 이유로 ‘간첩 잡는’ 형사들에게 숱한 손찌검을 당하며 대공분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새로운 인생의 분기점에 섰다는 감격으로 눈물지었다.
평범한 가정주부인 어머니가 어떻게 아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것이 궁금했다. 돌이켜 보면 어머니에게는 그런 신기한 기억들이 몇 가지 있다. 밴댕이처럼 잔가시가 많은 생선이 밥상에 올라올 때마다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이 작은 생선에 가시가 왜 이렇게 많은 줄 아니? 더 큰 물고기가 잡아 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야. 가시가 많으면 먹다가 목에 걸릴 테니까…”
한번은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어머니께 물어보았다. “그렇지만 가시가 많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이미 먹힌 다음이잖아요?”
어머니가 이어서 말씀하셨다. “그 다음부터 동료들을 먹지 않잖아. 자기는 죽지만 동료들을 살릴 수 있잖아. 그게 바로 ‘희생’이다. 작은 물고기도 그렇게 산다.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사는 것처럼 천박한 삶은 없다.” 그 똑같은 얘기를 수십번도 더 들으며 자랐다.
적산가옥의 커다란 창 옆 흐린 전등불 밑에 앉아 구멍난 양말 속에 알전구를 넣어 짜깁기를 하시면서 “사람은 주변에 좋은 영향을 미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어릴 적 어머니의 모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고, 그날 각인된 어머니의 양말 깁던 모습은 흐릿한 조명과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로부터 13년 뒤인 87년 7, 8월 노동자 대투쟁이 터졌다. 그와 같은 사건은 인류 역사에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 87년 7, 8월 두 달 동안 우리나라에서 3,241 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전국에서 수천 개의 전투가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머리띠를 묶어 맨 수만 명 노동자들이 집회를 벌이거나 거리를 행진하는 모습과 휘날리는 수백수천의 깃발과 현수막의 물결이 두 달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아, 이런 날이 오는구나...
그 무렵 각종 국제회의나 학회에서는 온통 한국의 노동운동이 중심 주제가 됐다. 휴식 시간에는 한국 대표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어떻게 그렇게 놀라운 역사가 가능했는지 설명해달라”는 질문이 쏟아지곤 했다.
그 87년 여름 어느 날, TV 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씀하셨다.
“그동안 말은 안 하고 살았지만, 사실은 내가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합원이었다. 40년이 넘도록 남편에게도 말을 못하고 살았지만, 사실은 내가 전평 조합원이었어. 화신백화점 강당을 빌려 대의원대회를 하던 날...”
아, 40년 전의 얘기를 마치 어제 일처럼 자세히 기억하고 계셨다.
“그때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은 어느 날 아침 한강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간밤에 죽창에 찔려 죽고… 그래도 다들 열심히 했지. ‘6·25사변’ 때 피난 갔다가 돌아와 보니 노동조합 간부들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모두 다 죽었는데… 다들 똑똑하고, 말 잘하고, 글 잘 쓰고, 잘생기고… 정말 아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날 나는 비로소 해묵은 숙제를 풀었다. 어머니가 나에게 수십 번 도 더 해 주신 ‘생선 가시 이야기’ 등은 전평 시절 공부 모임에서 배웠거나 수련회에서 어느 강사가 해 준 강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처녀 시절 은행원으로 일하시며 2~3년 남짓 겪었던 전평 활동의 경험이 어머니의 남은 평생을 규정한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노동운동을 한다는 것은 그토록 엄중한 일이었다. 감히 말하거니와 어머니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다.
그 어머니가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하고 계시다. 고통의 시간이 짧기를 바랄 뿐이다.
그 결과로 사회가 유지가 되는 겁니다.
군대를 가는 것은 국가를 지키러 가는 것보단 소중한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 많고
월급을 버는 것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함이 아닌 나와 가족의 생존을 위함이 많습니다.
거룩한 프로퍼겐다만 외친다고 천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천박하다고 하면 대개의 가장과 일반인은 모두 천박한 삶이 되고
이타적인 삶을 사는 이들만이 일반적이거나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겠죠.
타인은 아랑곳 않으며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사는 삶은 천박하다.로 표현했으면
수긍했을 겁니다. 사회가 발전한 것은 이타적 삶의 모범을 보이는 이들 덕분이라고 늘 생각합니다.
김광규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19가 나던 해 세밑 /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