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기존 작성글 업로드이며, 운영진 문의후 "경어체 비사용"인 점 양해를 바라겠습니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정복하지 못하였다. 이는 특별히 언급되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세계의 식민지들이 대부분 원주민에 대한 정복을 통해 이뤄졌던 것과는 명백히 다른 점이다.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벌어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피를 충분히 흘렸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것으로는 현상의 일부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일본은 두 전쟁을 통해 조선에 발언권을 행사하려는 외부세력의 배제라는 필요조건을 달성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 조선 백성 전체의 항복이라는 충분조건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의병이라는 방식으로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조선의 부분적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서 일본은 매우 교묘한 방식을 활용하였다. 당시까지도 존재하고 있던 대한제국의 군대와 협조하여 의병에 대한 조직적인 진압 작전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일본은 관군이 가질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이점을(조선 군주의 해산명령, 원활한 보급지원, 정확한 지리적 정보, 일반백성과 의병과의 분리 작업 등) 활용할 수 있었으며 기민하게 이이제이의 수법을 발휘하였다. 이후 의병활동이 살육 수준의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지만 일본이 결코 조선 백성 전체와의 전면전을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강화도조약 이후 30년이 넘는 장기간에 걸쳐 조선의 지배 계급들에 대한 설득, 회유, 매수, 협박을 진행하였으며 서양세력의 침탈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을 교묘히 활용하여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의 비폭력적인 합방을 조작해낸 것이다. 조약서에 고종 황제의 정상적인 옥새와 서명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제기되는 한일합방조약 무효 및 불법론은 또다른 별개의 문제이다.
말하자면 일부 대신들을 겁박하여 조약이라는 한 장짜리의 문서 행위를 만들어 내었고, 이 또한 최종 서명이 빠져 있는 불완전한 것이었으며, 군주의 승인이라는 이름을 팔아, 충과 효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던 조선 백성들의 저항의지를 봉쇄해버린 비겁한 방식이었다.
일본은 조선과의 전면전이 가져올 엄청난 후과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함부로 이를 선택하기도 어려웠다. 이미 300년전에 모든 국력을 쏟아부어 치루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던 임진왜란으로부터 일본은 교훈을 받고 있었다. 조선은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일본은 정정당당한 정면승부보다는 교활한 우회적 방식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조선의 지배 계급들을 매수하고 주요 결정을 조작하여 조선 정복이라는 전면전의 부담을 회피하였다.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내부의 무력저항에 대해서는 관군과 의병이라는 방식으로 내부를 파편화하여 대처하고, 한일합방의 최종결정이 이뤄지기 이전에 미리 그 싹을 정리하였던 것이다.
이는 일본의 관점에서 볼 때, 피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식이었다. 일본이 전면전을 수행하였을 경우 조선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지, 혹은 장기적인 게릴라전의 진흙탕에 발이 묶여 버리게 되었을지, 그래서 이후 만주와 중국본토와 남양으로의 확전을 아예 시도해보지 못했을지는 누구도 확신하기 어렵다.
지금의 북해도 지역에서 아이누 족을 몰아내고 농지 확보를 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1895년)하고 대만을 식민지로 확보했고
러일전쟁에서 승리(1904년)하고 지금의 북방 4도 와 사할린을 영토로 확보합니다.
그리고 조선합병을 1910년에 하고 1932년에 만주국 설립, 1937년 중일전쟁을 개시하지요.
역사에 가정이란건 없지만 일본의 제국주의 전개 과정에선
전쟁 과 외교를 통한 합병 2가지를 동시 진행하다가 유리한 쪽을 선택하는 방식이지요.
외교를 통한 합병도 군사적 협박이 없으면 진행이 안되니까요.
타국과의 관계에서는 전쟁, 외교, 협박 뿐만아니라 공작, 교란, 여론전(언론계상층부포섭/협박/미인계/매수, 세계유력언론사주협력, 댓글공작 등), 이미지조작/훼손/저하(세계유력수상방해, 세계유력체육인활동교란 등), 원인불상의 방화, 선박침몰 등 온갖 방식의 작업이 이뤄질 것입니다.
참고로, 오키나와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600대초반에 이미 사쓰마번에 의해 복속된 상태였습니다
https://lrl.kr/W63p
침공: 1609년, 사쓰마 번의 군대가 류큐국을 침공하여 수도 슈리성을 점령하고 국왕과 고위 관리들을 사쓰마로 끌고 갔습니다.
복속: 류큐국은 사쓰마 번의 속국이 될 것을 선언하고 왕과 관료들이 돌아왔지만, 이후 사쓰마 번의 간섭을 받게 되었습니다.
경제적 착취: 사쓰마는 류큐를 통해 설탕을 싼값에 사들여 비싸게 팔아 이득을 남겼고, 류큐의 자원을 착취했습니다.
영토 침해: 사쓰마는 류큐 북부의 아마미오시마 등 섬들을 직할지로 삼았으며, 이로 인해 류큐의 영토는 크게 축소되었습니다.
류큐 번으로 편입: 1872년, 일본은 류큐 왕국을 류큐 번(藩)으로 편입하고 류큐 왕족의 지위를 일본 귀족 수준으로 격하했습니다.
오키나와 현 설치: 1879년, 일본은 류큐 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 현을 설치함으로써 류큐 왕국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일본에 완전히 통합했습니다.
추가로, 일본의 공작은 러시아의 레닌에게 까지 미쳤습니다
https://lrl.kr/cYZqq
러일전쟁 (1904~1905): 일본은 거대한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군사적 노력 외에 첩보전을 활용했습니다. 러시아 내부의 불안정을 이용해 후방을 교란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아카시 모토지로의 활약: 당시 스위스 제네바 주재 일본 공사관 무관이었던 아카시 모토지로 대좌는 유럽 내 러시아 반정부 세력과 접촉했습니다.
공작금 지원: 아카시는 일본 정부로부터 당시 일본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거액인 100만 엔 (현재 가치로 약 400억 엔 이상 추정)의 공작금을 받아 핀란드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 혁명가 등을 지원했습니다.
레닌과의 접촉: 아카시는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블라디미르 레닌과도 접촉하여 자금 지원을 제의했습니다. 처음에는 레닌이 "조국을 배신하는 행위"라며 거절했으나, 결국 일부 지원을 받아들여 혁명 활동에 사용했습니다.
목적: 일본의 주된 목적은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 자체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 내부의 혼란을 가중시켜 러시아군이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결과: 이러한 일본의 공작 활동은 '피의 일요일' 사건 등 러시아 내 파업과 무장봉기를 부추겨 러시아 제국의 염전(厭戰)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이는 러일전쟁 종결과 러시아 혁명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본인의 의견은 무엇이고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후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시고 싶으신가요?
회원분들 별로는 메시지를 캐치하는 분도 있겠고, 캐치하지 않는 분도 있겠습니다. 다만, 자유로운 게시글에 반드시 어떤 메시지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이 텍스트 역시 일제의 한국 강점을 변호하고 미화하는 심각한 역사 왜곡입니다.
핵심 논리의 문제:
"무력 정복이 아니었으니 식민지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완전히 잘못되었습니다:
을사늑약(1905): 일본군이 궁궐을 포위한 상태에서 강제 체결
한일병합조약(1910): 헌병과 경찰을 동원한 무력 위협 하에 강제
의병 진압: 1907-1911년 사이 수만 명의 의병과 민간인 학살
"교묘한 방식"이라는 미화:
이는 침략을 "영리한 전략"으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매수, 협박, 무력 위협 모두 명백한 침략 행위입니다
고종의 서명이 없다는 것 자체가 불법성의 증거입니다
역사적 사실:
1907년 고종 강제 퇴위
1907년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 → 의병 봉기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1919년 3·1운동: 전국적 독립만세운동
이 논리의 위험성:
침략자의 "효율성"을 칭찬하고, 피해자의 저항을 "관리된 것"으로 축소하며, 불법 강점을 "비폭력적 합방"으로 미화합니다.
이런 서술은 일제 강점기를 "식민지 근대화"로 포장하려는 역사 수정주의와 같은 맥락입니다.
이제는 아시겠죠
운영자가 규정이나 권한으로 징계 한 건
수긍하시나요
처리 했는데 왜 마음데로 풀어 달라고 하세요
무슨 규정과 권한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