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공대 출신 개발자였습니다. 20년을 넘게 개발에만 매진했습니다.
뭐, 으레 이 업종에선 누구나(?) 갖게 되는 허리디스크를 훈장으로 달고 프리랜서로 넘어왔습니다.
프리는 정말 프리하더군요.
시간이 남으니, 뭘 할까 하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시간 죽일 때 보던 판타지 소설이 좋아서 그쪽으로 시작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어렵더라고요.
하고 싶은 말이 머릿속에는 있는데 손으로 안 나오는 그 기분은... ㅎㅎ
코딩이 만 배는 쉽다고 몇 번을 생각했는지 모릅니다.(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투고에 성공하고 출판까지 가기는 했습니다.
사람이 그러다 보니까 욕심이 생겨서, 공모전들도 도전해 볼까 하고.
그 후부터, 동화, 수필, 칼럼, 순문학 등등 모두 도전해 봤지만 전부 주르르.
뭐, 글 쓰는데 재미를 붙여서 알차게 보냈습니다.(본업이 프리해서 그런 건 안 비밀입니다. 쿨럭쿨럭)
동시에 글을 독자의 경험칙에만 의존해서 썼다는 반성을 하고 다양한 작법서와 Udemy의 동영상 강의들도 제법 독파했습니다.
확실히 글발이 올라가더라고요.
(작법서들은 솔직히 좀 추상적이라고 느꼈고, Udemy가 큰 도움이 됐습니다. 다만 영어 글쓰기라는 게 후에 제 글에 문제가 됐습니다)
그때부터 이제 글을 쓰는데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예전에 개발할 때처럼 글을 설계하게 되네요.
10월, 11월 두 달간 신춘문예용 순문학 단편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옛날 사람이라서 그런가, 꼭 인쇄 후에 빨간펜을 들고 입으로 읽어가면서 봐야 잘 보입니다.
그렇게 완성 후에도 어제까지 10번이 넘는 개고를 했습니다.
단어 하나, 쉼표 하나 가지고서 문장을 도대체 몇 번이나 고쳤는지 모릅니다.
집사람과 딸도 처음엔 좀 봐주다가 나중엔 알아서 도망(?)가더군요. ^^
이때 GPT가 꽤 도움이 됩니다.
보여주면 칭찬 일색입니다. 설계가 잘 됐다는 둥, 메타포 연결이 잘 됐다는 둥 그러죠.
하지만 얘는 못 믿는 게 꼭 빨간펜으로 체크한 걸 반영하고 나서 다시 보여주면, "아! 그러네요. 그쪽이 좋네요." 이럽니다.
한번은 너무 칭찬 일색에 이대로 원고를 내라고 해서. "야, 이거 번역투하고 부사가 많은데 이대로 내라고?" 했더니 그제야 그렇다고 합니다.
뭐, 이 친구는 제 기분을 계속 유지해 주는 면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자면서 생각난 대사, 조사, 표현 등을 반영했습니다.
그리고 K-바른한글에 넣고 맞춤법을 검사합니다.
(전 맞춤법, 띄어쓰기 문제가 많습니다. 특히나 외국 SF소설을 많이 읽고 커서 그런가 글에 번역투가 묻어 나와요.)
이제 끝이다! 이런 마음으로 다 마치고 훑어보니 설계한 대로 소설이 잘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이러고 나니 갑자기 현타가 오네요.
전문적으로 배운 프로 작가들도 이런 식으로 글을 설계하나?
처음에 판타지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을 때는 정말 독자의 마음으로 '안되면 내가 쓴다'라고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다 맞춰져 있고 빼놓은 게 없는지, 단어 선택은 적절한지, 마침표 쉼표 줄바꿈 하나까지 의도에 맞아떨어지는지 보고 있네요.
이게 맞는 건지 걱정돼서 GPT한테 물어보니까, 얘는 뭐 뻔하죠.
다른 작가들도 다 그렇게 한다면서, 그게 올바른 방향이라고 하네요.
솔직히 완성하는 재미, 높아진 글의 수준은 좋지만 뭔가 쓰는 과정에서 탈모가 올 거 같거든요.(실제로 왔어요.)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다 보니, 왜 이런 글을 쓰는지 모르겠네요. 지금 약간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
퇴고를 심혈을 들여서 하느냐는 거라면.. 순수문학쪽일수록 많이들 하실거구요
목차를 치밀하게 만드시는 분들도 있지만
(그런 작업을 무의식의 세계에 맡기고) 대략적 흐름만 잡아두고 즉흥적으로 스토리를 이어나가는 분들도 있더군요 (아마 순수문학쪽일수록 & 분량이 짧을수록 이런경향이 많은듯요?)
어떤 작가는 자신이 등장인물 설정만 해두고, 이후 사건 전개는 인물들끼리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둔다...(머리속에서 시뮬레이션 돌린다는 얘기겠죠?;;) 더군요 ㄷㄷ
ㅋㅋ
/Vollago
저도 논문 쓰면서 지피티랑 열심히 치고받으면서 썼어요 ㅎㅎ
작가들의 인터뷰를 보니 개발과 동일하더군요.
영화이야기로 잠깐 가면 봉준호 감독이랑 연상호 감독의 준비 과정을 들여다 보니 정말 설계가 엄청 납니다.
비유와 은유는 기본이고 어떻게 흘러가야 할지를 연구해서 머리속에 죄다 집어 넣어두고 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