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 상대적 문화 감수성에 민감한 20대였던 저는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때만 해도 유학생 수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고, 미국에 사는 한국인도 드물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주목받는 일이 잦았고, 작은 행동 하나에도 ‘한국 사람은 이렇다더라’는 시선이 따라붙곤 했습니다.
그러다 1989년, 정부가 해외여행을 전면 자유화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때부터 수많은 한국인이 단체로 미국과 일본, 동남아를 여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변화는 마치 홍수 같았습니다.
짧은 시간에 해외여행이 ‘특별한 경험’에서 ‘대중적 현상’으로 바뀐 것이죠. 그 시기 세계는 처음으로 한국인을 대규모로 마주하게 되었고, 한국인들 또한 처음으로 “세계의 시선”을 실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외신이나 여행지의 반응은 지금 우리가 중국 관광객을 바라보는 시선과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시끄럽다.”
“질서를 안 지킨다.”
"백화점 물건을 싹쓸이 한다."
“떼로 몰려다닌다.”
한국이 고도성장을 거치며 생긴 신흥 중산층의 소비문화가 세계의 기준과 충돌했던 시기였습니다. 지금 중국이 겪는 문화적 마찰도 사실 같은 궤도 위에 있습니다.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고, 해외여행이 ‘소수의 특권’에서 ‘대중의 경험’으로 바뀌는 순간 언제나 이런 마찰이 일어납니다.
그건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발전의 속도와 문화 전환의 간극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사실 그때는 사람뿐 아니라 한국 제품에 대한 인식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한국의 자동차와 가전제품, 반도체가 세계 시장을 선도하지만, 당시에는 “싸구려”라는 말이 따라붙었습니다.
1990년대 초, LA 폭동의 원인이 된 미국의 로드니 킹 사건을 기억하실지요. 로드니 킹이 술에 취해 과속으로 시내를 달렸다는 검찰의 주장에 로드니 킹을 변호하던 변호사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차로는 그렇게 빠르게 달릴 수 없다.”
그만큼 한국 제품의 품질과 기술력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현대차가 일본차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제품이 바뀐 것만이 아니라, 세상이 한국을 보는 눈이 바뀐 것입니다.
최근 ‘중국인 사절’이라는 문구를 내건 카페가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 기사를 보며 저는 30년 전의 우리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당시 우리를 향했던 편견과 비난의 언어가 이제 우리가 다른 이들을 향해 되풀이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물론 예의 없는 행동은 비판받아야 마땅하지만, 그 행동을 모든 사람의 본성으로 일반화하는 순간 우리는 과거의 차별을 되살리는 셈이 됩니다.
혐오는 언제나 이유 있는 척하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중국이라는 국가와 ‘중국인’이라는 사람은 다릅니다. 중국의 정치 체제, 정책, 외교적 행보는 비판받을 수 있고 또 비판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또 문제를 일으키는 개인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체제를 이유로, 또 개인이 비판 받은 짓을 했다하여 그 개인이 마치 한 나라를 대표하는 것처럼 전체를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국가와 개인의 행동은 평가의 대상이지만, 사람의 존재는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건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럼프 정권이 들어선 이후, 유색인종과 이민자에 대한 차별이 점점 더 노골화되었습니다. 거리에서, 직장에서, 공항의 입국 심사대 앞에서조차 이민자들은 다시 “외국인”으로 불리며 불안해졌습니다. 시민권자도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ICE가 다짜고짜로 붙잡아 끌고 가는 사례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다르다’는 이유로 구분하기 시작할 때, 혐오는 금세 일상으로 스며듭니다.
혐오는 특정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약점입니다.
한국이 한때 그랬듯, 중국도 언젠가 이런 시기를 지나 더 세련된 세계 시민으로 자리 잡게 될 겁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이웃으로 남아 있을까요? 비판은 할 수 있지만, 혐오의 문은 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30년 전 받았던 그 시선을 떠올린다면, 지금 필요한 건 분노가 아니라 성찰의 거울입니다.
늘 살펴봐야 할 것은 자신인데 잘 안될 때가 많습니다.
중국인을 혐오하면서 해외에서 인종차별 당했다고 광분할 이유도 없는 거죠.
뭐든 상호주의입니다.
근데 한국이 이렇게 혐오하는 것과 별개로
중국 내 중국인들은 그렇게 한국에 별 관심 없다고 하네요.
대만인들이 한국을 싫어하든 말든 한국인들이 별 관심 없는 것 처럼요.
이미 중국 내에선 한국을 경쟁상대로 보지도 않습니다.
다만 오늘의 이러한 혐오 흐름이 결코 한국에 좋지 않다는 것이죠.
중국인들은 별 관심 없어도 중국 정부는 예의주시하고 있으니까요.
우린 중국과 교역을 그만큼 해서 먹고 사는 나라이고
중국에 사는 한국 교민들도 미국 다음으로 많이 사는 나라가 중국입니다.
그만큼 중국에서 사업체하며 지내는 한국인들이 많다는 거죠.
이번 한중 정상회담도 경주에서 하는 이유가 저 혐중 집회 영향이 매우 크거든요.
이게 도대체 한국의 이권에 무슨 도움이 될까요?
정말 중국과 단절이라도 하는 날엔 한국 경제가 감당이 가능할까요?
미국이 그걸 그냥 지나칠 것 같아요? 더한 조건으로 관세 협상 하자면서 한국을 더 압박할 겁니다.
제발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어요. 아직 한국은 중국과 무역 규모가 상당한 나라입니다.
정서적으로 가장 닯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손흥민이나 신진서에 대한 댓글에서 보면
일본과 중국의 차이가 느껴집니다.
일본과 일본인,
중국과 중국인,
인도와 인도인.. 한국과 한국인도 다릅니다.
이렇게 초세계적 지구촌시대이지만..
실지로는... 중국이 중국인을 만들어내는가? 중국인이 중국을 만드는가?
닭이냐? 달걀인가 같은 물음에 총체적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가 다시금 국가주의에 빠지고 있어서 참 안타깝습니다.
전 세계가 극우로 치닷고 있는거 같아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누가 누구를 욕하는지? 누구를 욕하고 폄하할 정도로 자기 자신은 도덕적 흠결이 없는지...
요즘 생각이 많습니다.
2000년대초반만해도 용산에서 VCD, DVD로 일본애니메이션 보던사람들이
넷플릭스 훔쳐보는 중국인들을 미개하다 욕하고
해외여행이 자율화되며 해외나간다고 공항 및 해외 여행지에서 낙서하고(낙서는 현재도) 난리치던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젠 대동단결해서 남 욕하기 바쁘니...
우리는 이제 과거를 모두 잊고 1등 시민이었나? 라고 다시 생각해봅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유럽인들은 유럽에 여행을 오는 미국인들을 보며 '무식한 졸부놈들이 유럽의 박물관에 구경와서는 그림값이 얼마인지나 따진다'는 식으로 비웃기도 했었죠.
이런 식의 조롱은 이후엔 '목마다 카메라를 걸고 유럽에 단체관광다니는 일본의 이코노믹 애니멀들'으로, 그리고 이제는 '매너없는 중국인 관광객'으로 이어져오고 있고...
- 90년대생이나 남자,여자나 중국인,일본인,대구출신 등의 정체성은 태어나면서 그냥 일방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속성이지
행위나 말처럼 그 개인들이 선택한 게 아닙니다.
그런 건 비난이나 반성이 불가능한 대상입니다.
그런 걸 기준으로 비난이나 차별을 하는 건 '넌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이고, 그냥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거지요.
시진핑의 행동이나 말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시진핑이 중국인 부모에게서 중국인으로 태어난 남성이라는 걸 비판하는 건 말이 안되는 거죠. "제가 중국인으로, 남자로 태어난 걸 반성합니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비난을 하려면 저런 게 아니라 누군가의 특정한 언행을 비난해야겠죠.
너무나도 논리적이고 타당함 때문이겠지요
혐오와 반지성주의가 판치는 시대에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전에는 인도, 홍콩을 거쳐서 우리에게 오던 거래선이 이제는 모두 중국을 거쳐 우리에게 옵니다.
외국 나가보면 시끄러운 중국인들도 옛날에 비해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느낍니다. 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간에, 세상은 변합니다. 우물안 개구리로 살면 도태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