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릴 때 배운 역사를 한 줄로 ...
소수 고구려 지배층 + 다수 말갈 부족...
이게 일본 제국주의의 방침에 따라 만들어진 엉터리 논리라고 합니다.
고구려가 망하고 엄청난 유민을 중국에서 끌고 가지만,
그 보다 훨씬 많은 고구려인들이 남아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어디 먼 곳으로 단체 이주를 한 것도 아니어서,
발해 건국 당시 당연히 고구려인들이 중심이었고 다수였습니다.
과거 일제의 영향을 받은 역사를 배우면서도 고개를 갸우뚱 했었던 이유가 이거였습니다.
또한 국사 배울 때 제대로 정리를 못했던....여진.
알고 보면 이름만 바뀌었지 핵심은 늘 같았던 말갈, 그 이전에는 숙신... 최종적으로 여진.
또한 시대에 따라 섞임도 일부 있어서 고대와 나중의 여진은 좀 달랐을 것 같긴 합니다.
그래서 제가 요즘 글을 쓸 때 '~ 계' 라고 합니다.
여튼, 퉁구스계의 여러 갈라짐이 있고, 그럼에도 중심은 지키고 있는 것을 여진이라고 하고,
발해 당시에는 속말부 및 여러 부족 다수가 퉁구스계의 부족들입니다.
부족원 수는 작고 계열은 상당히 많이 분화 되어 있었습니다.
고구려 멸망 후 발해가 건국 하며 간접 통치의 질서 속에 다시 들어 오게 되는...
즉, 유민들이 그냥 발해이고, 발해의 외진 곳에 있던 적은 인구를 갖던 여진 부족들은 간접 지배를 받는 구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부분은 발해가 고구려 유민이 주도하는 다민족 국가였고,
말갈은 일부는 흡수되고 나머지는 간접 지배를 받다가... 나중에는 피지배계층으로 전락하거나
주변 부족의 동떨어진 곳으로 명맥만 지켜 갔는데, 어떻게 일제는 다수 말갈 설을 퍼트렸던 것인지,
왜 그런 왜곡을 했는지에 관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앞서 이름 붙이기에 대해 반복해서 이야기 하는 이유가
이 말갈 또한 앞서 이름이 숙신이었고, 또 그 옆, 역사적 앞뒤로 예맥계, 부여계, 옥저계 등이
혼합 되어 있어서...
크게 분류하자면, 퉁구스계의 피가 좀 더 비중이 있는... 부족이 어떤 지역에서 어떻게 섞이는가.. 와 같은
조건들에 의해 여러 분화가 있었다 정도로 보면 맞지 싶습니다.
고연수 고해진이 고구려 군과 말갈병의 연합병으로 15만 군대를 구성해서 당나라와 싸운 기록을 봐도 그런거죠.
그냥 같은 부류의 민족, 부족이죠. 단 그 당시는 고구려 지배하의 사람들인거죠. 군대를 동원할 정돈데.. 서로 부여를 근간으로 하는 혈연적 친밀감이
있는 유목 민족.. 계통의.. 아마 말도 얼추통했을 겁니다. 조선시대에도 여진인들과는 몇일이면 말이 통한다고 했을 정도니..
이성계가 조상이야 어찌되었든 여진에서 살던 사람이라는 건 다 아실거고.. 이성계의 출생지라고 하는.. 화령(和寧)은 더 코미디 입니다.
웃긴게.. 화령을 함경도 영흥이라고.. 떡하니 배우고 있죠. ㅋㅋ 평야가 아닌 산맥(개마고원)을 넘어 유목민족이
들어와 산다고요? 지도 보면 환장하죠. 이성계의 직속 가병인 가별초만 2000명이고 말만해도 최소 몇천필이었을텐데..
이것도 웃긴거죠. 몽골이나 중국사를 보면.. 화령의 위치를 알 수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학자들도 들으면 웃을 겁니다. 이 웃긴 일을 일제시대 조선사편수회에서 일본 사람들이 해내죠. ㅋㅋ 어떻게든 반도에 우겨넣으려고..
1760년경 이익의 성호사설 시기의 사대부들도 아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생각에도 최대 내몽골 최소 만주죠.
성조(聖朝, 이성계)께서 천명을 받아 화령과 조선으로써 명나라에 주청하니 이에 황제가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였다. 무릇 화령의 뜻은 일찍이 듣지 못하였다. 영락제가 북방을 정벌한 것은 아로태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한 것이니, 화령은 원나라의 옛 땅이다. 원나라의 위소(危素)는 "원태조(칭기즈칸)가 창업한 땅이라 하여 《화령지(和寧誌)》를 지었으니, 족히 그 증거를 삼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오랑캐의 지명으로 국호를 주청할 리는 없을 듯하다.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고려 우왕(禑王) 9년에 태조가 변방을 안정시킬 계책을 올린 가운데, "동쪽 경계에 있는 화령의 땅은 도내(道內)에서 가장 땅이 넓고 풍요합니다."라고 한 말이 있다. 그 다음해에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화령부(和寧府)에 오매, 임언충(任彥忠)을 파견하여 간곡히 효유하여 보냈는데, 길이 막혀 반 년을 머물렀으니, 대개 화령은 쌍성(雙城)에서 요동(遼東)의 개원부(開原府)로 직통하는 요충지이다. 그러니 그 땅은 실로 성조가 창업한 땅으로서 이른바 '적전(赤田)'이 이곳이니, 국호를 화령으로 주청한 것은 혹 이 연유가 아니겠는가?
- 성호사설 권15, 화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