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이념 또는 가치관, 사상이 시대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구성을 갖추고 있고,
그 내재된 속성을 더욱 강화하여 경직성이라고 할 정도가 되었을 때...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조선 후기고 갈수록 점점 더 이 경직성은 강화 되어 갔습니다.
국제 사회는 나홀로 잘 하면 되는 곳이 아니라 나 보다 잘 나거나 나보다 힘이 세거나
무수히 많은 변수에 대응해야 하는데,
고려 말기의 이 변화의 중심에 있던 자들이 들고 일어나니...신진 사대부들이었는데,
이들이 받아들인 사상이 후일 조선의 국력을 쇠락하게 하였으니....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습니다.
만일 성리학이 아닌 다른 사상이었다면 다이내믹한 한국인의 특성상
외부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고 이용하고 나아가 앞선 기술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 보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오래전부터 아시아의 각종 문물이 모여 들었습니다. 비슷하게 한국에도 여러 경로로 여러 문화가 전파 되어 왔습니다.
그런 것 중에 한국에 정착 되어 당대 국가들의 힘으로 기술이 발전한 케이스 중
가야의 철기문화, 고려 자기 정도만 보아도 이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저력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이 글은 제 생각이 많이 반영 된 것이므로,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조선 후기에 성리학이 그렇게 경직성을 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나 열심히 노를 저어왔던 것.
방향과 구조를 바꿔 주지 않는 한 그 구조 안에서 너무 열심히 계속 가다 보면,
그렇게 한국인의 에너지가 변질되었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중요한 만큼,
성리학의 시대에서도 군주들은 들쭉날쭉하는 기후에 따라 식량 생산량이 달라지고,
때로는 전염병이 도는 등 ... 가장 중요한 먹고 사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 힘을 씁니다.
농업을 만물의 근본으로 여긴... 까닭입니다.
반복하지만,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 과거에도 역시 세계는 느리지만 꾸준히 정보가 오가는 시대였고,
곳곳에서 나타난 혁신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성장을 끌어 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조선은 농업 국가로 농업을 천하 경영의 가장 중요한 근간이란 인식이 끝까지 갔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었고, 18세기 이후에는 이양법이 늦게나마 보급 되게 됩니다.
먹고는 살아야 한다는 거죠.
문제는 성리학의 질서 하에 합당한 것들....에 한정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리학에 합당한 것인가 아닌가....
무언가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긴 했는데, 아니 치열하게 하긴 했는데,
그게 성리학의 연구요. 성리학의 질서 하에 필요한 제한적 발전이었습니다.
한국인의 역동성은 이런 사회 안에서도 감출 수 없어,
일부 지식인들은 주로 중국을 통해 외국의 소식을 듣기도 했고, 연구도 했고, 노력도 했지만,
어느 한 사회가 어느 한 국가가 그런 정도는 그다지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시스템이 되어 사회를 굴러가게 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은을 추출하는 방법을 알아냈으면 그것으로 무역을 하고,
무역을 통해 해외 문물을 지속 적으로 접하고,
그렇게 들여 오는 문물과 지식을 조선 내에서 수용할 것은 하며,
나름의 발전을 꾀해야 하는데,
이 유연성의 부족 하나만으로도 성리학의 시대 소명은,
병자호란 까지... 였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공자왈 하며 각 신분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하는
신분 질서 중심의 사상일지라도 그것에 유연성을 더 할 수 있는 꺼리가 있어야 하는데,
학문이 발전을 하면 할 수록 오히려 더 근간에 충실해야 하는 방향을 강화 하게 되니...
답이 없는 것 같지만 또 항상 그렇진 않습니다.
그래서 흔히 하게 되는 표현이 '시대적 요구'입니다.
안 될 것 같은 기업 이미지등의 아성도 순식간에 고꾸라 지기도 하고, 위기에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시대적 요구에 가장 민감했던 신진사대부들의 왕조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조선이 국가 단위로 관리 되는 상업, 즉 활발한 국내외 교역과는 거리가 먼 정책을 고수하더라도,
그 가운데 해외 정보를 아예 모를 수는 없는 것인데,
이 정도는 논점에서 무시하고 넘어가도 되지 싶습니다. 그 때 이런 기술 저런 기술이 없지 않았다는
디테일은 국가 단위의 의미를 갖기 어려웠다는 말입니다.
정리합니다.
세계와의 창구가 보다 더 많이 열려 있기만 했어도 많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
최소한 일본이 취한 정도. 또는 그 보다 약간만이라도 더 개방적이었다면...
그나마 조공 무역이라는 주기적 창구가 없진 않았습니다만,
이 역시 간에 기별이 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집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정책과 전략의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 이념을 들이밀죠...
내부경쟁도 없어서 세율은 일본에 비하면 너무 낮아서
재정상태가 너무 망이어서 외세를 막을 군비나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죠
군주제 시스템도 구닥다리구요
중국, 일본은 상대적으로 지방세력 및 다원성이 강해 양명학, 실학 등 실용적 학문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된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조선이 개화에 뒤떨어졌던 것이 성리학의 책임인지는 의문입니다.
송,명도 너무 잘 나가서 고였고, 80년대 일본도 너무 잘 나가서 고였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