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검사님 정확하게는 당시 전라선 철도는 단선이었습니다. 그래서 통표를 받고 운행했는데, 이걸 받으면 정해지 구간까지 운행하고 정해진역에서 통표를 받을 때까지 대기후 통표받고 다시 운행하는 방식으로 상행선과 하행선을 하나의 철로만으로 운영했는데, 이때 이 통표를 돈을 받아야 줬습니다.
Ice뷁
IP 211.♡.50.151
08-23
2025-08-23 10:5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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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윙체어님 와... 진짜 개갞끼들.... 원래 무정차 인데도 삥 뜯었단 거군요.
하늘편지
IP 211.♡.203.212
08-23
2025-08-23 10:5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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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건후로 지명도 바꿨죠, 이주일님하춘화님도 당시사고에 피해입으셨죠
Ice뷁
IP 211.♡.50.151
08-23
2025-08-23 10:5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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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편지님 이주일님은 목숨을 건 인생터닝포인트 였다고 하더군요.
스윙체어
IP 125.♡.234.74
08-23
2025-08-23 11: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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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편지님 아니요. 지명은 15년도 더 지나서 도농통합도시가 되면서 변경된겁니다.
하늘편지
IP 211.♡.203.212
08-23
2025-08-23 12: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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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윙체어님 그런가요, 예전 어느TV프로그램에서 그날의사고가 참혹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게 하기 위해 지명을 변경했다는 기억이 있는데...아닌가보군요
IP 182.♡.71.182
08-23
2025-08-23 11: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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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주변은 큼지막한 건물조차 형체만 남아있는 정도로 대파되었다. 역에서 근무하던 철도 공무원 16명을 포함하여 59명이 사망하였고 1,343명이 중상 및 경상을 입었으며 이재민 1,647세대 7,800여 명이 발생하였다. 이는 그때까지 국내에서 발생한 폭발사고 중 최대 규모의 피해였다.
사건 이전에 이리역 주변은 창인동으로 불렸는데, 판자촌과 홍등가가 난립했던 슬럼이라 이리에서 오래 거주한 사람들에게 창인동을 물어보면 혀를 내둘렀을 정도다. 하지만 폭발이 사람도 건물도 모조리 휩쓸어 버리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재개발의 기회가 되었다.[5] 사고 이후에는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에서 중앙시장을 경유하는 중앙로1길 확장노선과 익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익산대교를 경유하는 익산대로가 건설되어 익산의 주요 간선도로로 활용되고 있다.
-------------- 아니 이건 또 역사의 아이러니네요. (나무위키 찾아보고 있습니다.)
스윙체어
IP 125.♡.234.74
08-23
2025-08-23 11: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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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판자촌이 아니라 전통 일본식 목조 주택들이었습니다. 익산은 2000년대 초반까지 전통 일본식 목조 주택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신사도 그대로 남아있다가 1992년에 철거될 정도로 개발이 안되던 곳이었습니다.
사고의 확대를 막은 뒷이야기도 있다. 사고가 나던 때에 승객 600여 명이 탄 여객열차[10]가 이리역 직전 역인 부용역에 정차 중이었는데 이 열차가 제 시간대로 운행되었다면 사고 시각에 이미 이리역에 도착했어야 했다. 그런데 기관사가 부용역에 진입하면서 통표(운전허가증) 회수에 실패[11]하는 바람에 부용역 통과 허가가 나지 않아 통표를 획득할 때까지 계속 멈춰있어야 했다. 사고 발생 약 5분 후 통표를 회수하여 출발이 가능해졌음을 무전으로 보고하던 중 "이리역에 대형화재가 발생하였으니 진입하지 말라"는 답변을 받았다. 본인의 실수 탓에 열차를 지연시킨 기관사는 초조해져서 "화재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진입해도 되지 않느냐"고 재차 문의했지만 이리역 측은 "상황이 심각하니 무조건 대기하라"고만 답하였다. 그러나 기관사는 통표를 얻었으니 운행을 강행하기로 하고 결국 열차를 이리 방향으로 출발시켰다. 한편 이리역 역무원 송석준은 폭발 충격에 기절했다가 간신히 의식을 되찾은 뒤 해당 열차가 들어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철로를 따라 1km를 달려가 이리역으로 진입하려던 열차를 향해 윗옷을 펄럭이며 정지 신호를 보내어 가까스로 열차를 세웠다고 한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송석준 역무원은 2013년 코레일 철도안전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었다.
또한 사고 당시 이리역 구내에 석유를 가득 실은 유조화차로 조성된 열차가 대기 중이었는데 마침 이리역 인근 모현동에 살던 기관사가 화재가 발생하였으니 열차를 신속히 이동하라는 긴급연락을 받고 달려나와 열차를 황등역으로 신속히 이동하였다. 만일 유조 열차가 역 구내에 계속 남아있었다면 그마저 폭발하면서 역 일대가 완전히 불바다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이리역(현 익산역)은 철도교통의 요충지[12]로서 그 중요도로 말미암아 신속한 복구작업이 전개되어 사고 다음날인 11월 12일 열차 운행을 재개하였고 11월 20일에는 모든 선로의 복구를 완료했다.
대규모 폭발이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탓에 해당지역 사람들은 북한군의 공습인 줄 알고 서울에 사는 친지들의 안부를 걱정했다고 한다.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 책에 따르면 당시 이리에 주재하던 어느 기자는 서울 본사에 연락을 넣어 "이리는 쑥밭이다! 서울은 무사하냐?"라고 외쳤고, 이리 주민들 중에도 다른 지역에 사는 친척들에게 전화해서 "거기도 폭격 맞고 있느냐?"라고 묻는 사람이 속출했다
sang
IP 106.♡.128.91
08-23
2025-08-23 11: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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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보니... 폭격수준이네여 ㄷㄷㄷ
아빠가안티
IP 211.♡.1.59
08-23
2025-08-23 11:25:54
·
저때 이리시내의 모든 유리창이 깨졌다고 들었어요.
벅스라이프
IP 211.♡.197.71
08-23
2025-08-23 12: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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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약과 뇌관을 결합해서 운송 ㄷㄷ 저 꼬라지 보니 저때 사고 안났어도 언젠가 크게 사고났을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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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이전에 이리역 주변은 창인동으로 불렸는데, 판자촌과 홍등가가 난립했던 슬럼이라 이리에서 오래 거주한 사람들에게 창인동을 물어보면 혀를 내둘렀을 정도다. 하지만 폭발이 사람도 건물도 모조리 휩쓸어 버리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재개발의 기회가 되었다.[5] 사고 이후에는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에서 중앙시장을 경유하는 중앙로1길 확장노선과 익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익산대교를 경유하는 익산대로가 건설되어 익산의 주요 간선도로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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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건 또 역사의 아이러니네요. (나무위키 찾아보고 있습니다.)
또한 사고 당시 이리역 구내에 석유를 가득 실은 유조화차로 조성된 열차가 대기 중이었는데 마침 이리역 인근 모현동에 살던 기관사가 화재가 발생하였으니 열차를 신속히 이동하라는 긴급연락을 받고 달려나와 열차를 황등역으로 신속히 이동하였다. 만일 유조 열차가 역 구내에 계속 남아있었다면 그마저 폭발하면서 역 일대가 완전히 불바다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이리역(현 익산역)은 철도교통의 요충지[12]로서 그 중요도로 말미암아 신속한 복구작업이 전개되어 사고 다음날인 11월 12일 열차 운행을 재개하였고 11월 20일에는 모든 선로의 복구를 완료했다.
대규모 폭발이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탓에 해당지역 사람들은 북한군의 공습인 줄 알고 서울에 사는 친지들의 안부를 걱정했다고 한다.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 책에 따르면 당시 이리에 주재하던 어느 기자는 서울 본사에 연락을 넣어 "이리는 쑥밭이다! 서울은 무사하냐?"라고 외쳤고, 이리 주민들 중에도 다른 지역에 사는 친척들에게 전화해서 "거기도 폭격 맞고 있느냐?"라고 묻는 사람이 속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