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3년 5월 6일 현재 튀르키예 남동부의 하란에 해당하는 카르헤에서 로마군 4.4만명과 파르티아군 1만명 사이에 로마 역사상 최악의 패배 중 하나로 종결된 전투가 벌어졌다. 로마군 2만명이 전사하고 1만명이 포로가 되었다. 파르티아군의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9천명의 파르티아 궁기병이 비처럼 쏘아댄 화살이었다. 낙타 1,000마리와 짐수레 200여 대로 구성된 화살 보급 부대가 따로 있었기에 화살을 비처럼 쏠 수 있었다. 그런 전술과 보급은 그 화살이 평범한 화살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행되었다. 파르티아인들이 한나라인들에게서 배운 야금술로 만들어진 철제촉은 그 화살에 강력한 관통력을 부여해 많은 로마 경기병들과 경보병들이 문자 그대로 팔, 다리, 몸통이 꿰뚫려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일부 병사들은 선 자세로 땅에 못박히기도 했다. 큰 방패와 갑옷으로 무장한 중무장 보병만이 그 화살비를 견딜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이 전투에서 로마군을 압도한 것은 한나라 야금술로 만들어진 화살만이 아니었다. 로마군은 파르티아 궁기병이 흔드는,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역시 한나라 기술로 만들어진 비단 깃발에도 압도되었다. 그러니까 카르헤 전투는 무기와 일반 소비재 두 부문 모두에서의 중국의 기술적 우위가 서구인들에게 최초로 경험되었다는 역사적 의의가 있는 전투이다. 중국의 그 기술적 우위는 유럽이 과학혁명에서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는 진보를 이루기 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아마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사농공상주의적인 제도적 및 문화적 여건상 중국에서 먼저 그 진보가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통치 엘리트들에게는 적어도 그 진보를 인식하고 실존적 위협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따라서 그 진보를 따라잡고자 할 결단과 그 결단에 상응하는 개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회를 잡지 않았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착오에 빠져 어리석은 쇄국주의 정책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는 19세기 중반 이래의 막대한 치욕과 손실의 한 세기였다. 다행히도 중국은 이제 그 한 세기의 여파에서 완전히 벗어나, 인구 많고 땅덩이 큰 가난한 지방 대국의 처지에서 벗어나, 다시 세계사의 중심 무대로 진출하고 있다. 앞으로 20여년 동안 2,000여년전의 그때와 달리 인류 전체가 중국산 '화살촉'과 '비단'의 위력에 압도당하게 될 것이다. 그 후는? 익숙해져서 더 이상 떨떠름하지도 망연자실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뭐 근거가 없죠. ㅋㅋ 파르티아 위치를 보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이야기 인지.. 서양에서 저런말하면 웃습니다. 당대 페르시아 지방이 동아시아보다 문명이 뒤쳐진 지방도 아니고 말이죠. ㅋㅋ 클리앙에 까지 와서 이러는 거 보면 애잔하죠.
뭐만 하면 다 중국이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이라서.. 그리고 그 당대의 한나라 사람들과 지금 한족하고는 개념이 달라요. 지금 한족은 서구의 침탈에 열등감을 가진 양계초가 청나라 극복을 위한 반청의 개념으로 근대에 만든 민족 개념이라서..
원래 몽골의 국가인 원나라에서 말하던 한인은 한인(漢人) 8종이라고.. 해서.. 거란, 고려, 여진, 발해 등등이구요. 남송 사람은 한인이 아니었습니다. 도종의(陶宗儀)의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에 나오죠. 당대 개념으로는 고려가 한인(漢人)에 포함되어 있었어요.
한인(漢人)은 남송인과 확연히 구별했고 남송인은 차별했죠. 서울의 한강이 漢을 쓰는 이유가 있습니다. 원나라 당대의 관점으로는 우리가 한인(漢人) 인 겁니다.
관련이 있던 없던 유목민족들이 한에게 철에 대해 배웠다고 생각하는 것도 코미디죠. 그들이 미개인이 아닙니다. 최초의 철기가 중동에서 나와서.. 유목민을 통해 정주 문명에 전해진거에요.
그 유목 민족의 끝자락이 현재 대한민국 경주까지 이어지는 거고(경주 계림로 보검(慶州 鷄林路 寶劍)).. 아니 철기문명의 시작이 중동인데.. 뭔 한나라 철기 기술 이야기가 나옵니까. ㅋㅋ 한나라가 유목민족에게 전수를 받았으면 받았지.. 그렇게 뛰어난데 유목민족에게 맨날 털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