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통령과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의 관계는 금리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대통령은 표를 위해 경기를 띄우고 싶어하고, 연준은 그 열기를 식히려 하면서 불협화음은 불가피했다.
이런 충돌은 미국 경제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드라마 중 하나다. 이 대립의 풍경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트루먼 vs 마틴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부터 한국전쟁이 터진 후인 1951년까지 재무부가 금리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당시 연준은 재무부의 ‘하부 조직’으로 취급됐다. 전쟁 자금을 싸게 조달하려고 정부는 낮은 금리를 유지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전쟁 비용이 늘어났다. 재정 압력이 커지자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연준이 저금리로 국채를 계속 매입해달라고 요구했다.
반면 연준은 금리를 올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20% 넘게 치솟았다. 연준 내부에선 “정부가 인플레를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당시 뉴욕 연방준비은행(연은) 총재였던 앨런 스프라울은 국채 수익률 방어에 더 이상 협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1월, 연준 이사들을 백악관으로 소환해 “국가 안보를 위해 저금리를 유지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회의 분위기는 험악했다. 연준 의장 토머스 맥케이브는 이를 ‘대통령의 노골적인 압박’으로 회고했다.
같은 해 3월, 역사적인 ‘연준-재무부 협정’이 체결됐다. 이 협정으로 연준의 통화정책 독립성이 제도적으로 확립됐다.
이후 연준은 독립적으로 금리를 결정할 수 있게 됐다.
이 협정을 주도한 사람이 당시 재무부 차관이던 윌리엄 맥체즈니 마틴이었다. 그는 맥케이브가 해임되자 연준 의장이 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마틴을 ‘자기 사람’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곧 후회했다. 마틴 의장은 독립적인 금리 정책을 펼쳤다.
트루먼은 퇴임 뒤 우연히 뉴욕의 한 파티장에서 마틴을 만났다. 트루먼은 마틴을 보는 순간 분을 참지 못하고 “배신자”라고 쏘아붙였다.
마틴 의장은 “중앙은행의 역할은, 마치 파티가 무르익을 때 펀치볼을 치우는 사람과 같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펀치볼은 과일 칵테일인 펀치를 담는 그릇이다.
모두가 흥에 겨워 파티를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과일 칵테일 그릇을 치운다면 분위기는 싸늘해지는 법이다.
펀치볼을 치운다는 것은 중앙은행이 경기가 과열되기 전에 금리를 올려 시장의 열기를 식힌다는 의미다. 정부 입장에선 경기가 한창 좋은데 그릇을 치우는 것을 분명히 반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마틴 의장의 이 말은 통화 긴축과 금리 인상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명언이 됐다.
◆존슨 vs 마틴
1965년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텍사스 자택 목장에서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윌리엄 마틴 연준 의장이 인플레이션을 우려하며 기준금리를 인상했다는 보고였다.
베트남 전쟁 확전과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복지 정책에 천문학적 지출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마틴 의장을 목장으로 불러들었다. 키가 190cm가 넘는 존슨 대통령은 마틴 의장의 멱살을 잡고 “젊은이들이 베트남에서 죽어나가고 있는데 어떻게 금리를 올린단 말인가”라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마틴 의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금리는 법이 맡긴 연준의 책임”이리고 대답했다.
이 장면은 대통령의 분노와 연준의 독립성이 정면으로 충돌한 상징적 순간으로 남아 있다. 마틴 의장의 결단은 연준의 독립성을 지탱하는 초석이 되었다.
◆닉슨 vs 번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선거를 앞두고 금리 인하를 압박했다. “돈 공급을 늘려라”면서 선거용 경기 부양을 요구했다. 아서 번스 연준 의장은 거부했지만, 백악관의 정치적 압박은 계속됐다.
결국 금리를 인하했다. 일시적으로 경기 호황이 일었고 1973년 닉슨은 재선됐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이 재발했다.
오일쇼크까지 겹치면서 미국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경기 침체를 동반한 물가 상승)에 빠졌다. 이른바 ‘닛슨플레이션’(Nixonflation)이었다.
후에 번스 의장은 물가 폭등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과 함께 ‘최악의 연준 의장’으로 불리는 불명예를 안았다.
◆레이건 vs 볼커
1980년대 초, ‘슈퍼 긴축맨’ 폴 볼커 연준 의장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고금리 정책을 밀어붙였다.
볼커 의장은 원래 지미 카터 대통령이 임명한 인물이었으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그를 유임시켰다.
볼커 의장은 금리를 20%까지 급하게 올렸고, 이에 따라 실업률은 치솟았고 경기는 침체됐다.
대선을 앞둔 1984년 여름 레이건 대통령은 갑자기 그를 백악관 서재로 불렀다. 그 자리에서 짐 베이커 백악관 비서실장 등 백악관 참모들은 “대통령이 선거 전에 금리를 올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서 그를 압박했다.
볼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후에 볼커 의장은 “백악관 서재에는 도청장치가 없어서 저금리 압박을 위한 만남의 자리로 선택된 것 같다”고 회고했다.
이듬해 열린 연준 회의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레이건 대통령이 임명한 연준 이사들이 금리 인하를 주장하며 투표를 강행했고, 금리 인하가 결정됐다. 반대하던 볼커는 사임을 결심했다.
그러나 ‘반란’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사 중 한 명이 “우리가 성급했다”며 재투표를 제안했고, 금리 인하는 철회됐다.
볼커는 의장 자리를 지켰고, 이후 인플레이션이 꺾이면서 미국 경제는 안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는 연준 독립성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로 꼽힌다.
볼커 의장은 인플레이션을 잡고 경제 성장의 초석을 다진 연준 의장으로 기억된다.
◆조지 부시 vs 그린스펀
조지 H. W. 부시(아버지 부시) 시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92년 재선을 노리던 부시는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앨런 그린스펀 연준 의장에게 금리 인하를 강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그런스펀 의장은 거절했다. 부시는 재선에 실패했다.
몇년 후 부시는 한 방송에 출연해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라며 그린스펀을 성토했다. 그린스펀을 연준 의장에 앉힌 사람이 부시였으니 감정이 깊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반면 후임자 빌 클린턴 대통령은 달랐다. 그는 연준의 독립성을 철저히 존중했다. 금리에 대해 입을 여는 일조차 삼갔다.
덕분에 그린스펀 의장은 소신껏 통화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그는 연준 독립성을 지키며 2006년 퇴임까지 무려 20년간 자리를 지켰다. 그린스펀 재임 기간은 ‘미국 경제의 대(大) 안정기’로 불린다.
대통령과 연준 의장의 관계가 어떻게 국가 경제의 방향성과 체질을 결정짓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트럼프 vs 파월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직접적이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연준을 압박하는 이가 도널드 트럼프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11월 제롬 파월을 연준 의장으로 지명했고, 다음 해 파월은 연준 의장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뜻대로 금리 인하가 이뤄지지 않자 계속 그를 압박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만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루스소셜에 “금리를 인하하라”는 글을 하루가 멀다 하고 올리고 있다.
파월 의장에 대해선 “상상력도, 감각도 없는 인물”이라고 조롱도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파월 의장이 곧 물러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파월 의장은 트럼프의 관세 정책이 물가를 자극한다며 금리 인하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대통령의 의도와 반대로 가는 통화정책 때문에 그는 지금도 ‘수난’을 겪고 있다.
미국 대통령은 정치 권력의 정점이고, 연준 의장은 통화 정책의 마지막 보루다.
대통령은 ‘표’를 위해 경기를 살리고 싶고, 연준은 인플레이션의 브레이크를 쥐며 ‘독립성’을 지키려 한다. 이 구조적 대립은 시대와 인물을 가리지 않고 되풀이되어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