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문장에 아래 출처 내용의 핵심이 있다고 생각되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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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는 타인에게 분명히 도움을 주는 일을 하고 있을수록 더 적게 임금을 받는 일반 법칙이라도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일의 가치를 재는] 객관적인 척도를 찾기란 어렵다. 하지만 그러한 척도를 엿볼 수 있는 쉬운 방법은 있다. 어떤 특정 계층의 사람들이 사라지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우리는 간호사나, 환경 미화원, 혹은 기계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을 것이다. 만약 이들이 한 줌 연기가 되어 사라지게 된다면 결과는 즉각적이고도 참담할 것임이 분명하다. 교사나 항만 근로자가 없는 세상은 이내 문제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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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Phenomenon of Bullshit Jobs
앞의 내용은 출처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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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질문을 던지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를테면 재능 있는 시인이자 음악가에게는 아주 극심하게 제한된 수요만을 창출하면서, 기업 법무 전문가에 대해서는 무한한 수요를 창출하는 사회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대답은 이렇다: 만약 인구의 1%가 가용 재산 대부분을 통제하고 있다면, 우리가 “시장”이라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그들>이 쓸모 있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심각한 점은,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궁극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자기가 하는 일이 허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기업 변호사를 만난 적이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이 이야기는 위에서 언급한 적 있는 새로운 산업 부문 대부분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하는 일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조차 꺼리는 전문가들이 있다. 당신은 이 전문가들을 파티에서 만날 수 있고, 이들은 당신이 뭔가 흥미롭다고 간주되는 일(이를테면 인류학자라든지)을 한다는 점을 인정하곤 한다. 이 전문가들에게 술 몇 잔만 권하면, 이들은 자신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무의미하고 멍청한 일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아주 중대한 심리적 폭력이 있다. 내심 자기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어떻게 노동의 존엄에 대해 얘기를 시작할 수 있을까? 과연 이러한 현상이 깊은 분노와 원한 감정을 만들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 사회의 특별한 천재성이 있다면, 우리 사회의 지배자들이 마치 앞에서 물고기 튀기는 사람들의 사례를 들었듯, 사람들의 분노를 실제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향하게 하는 방법을 발견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서는 타인에게 분명히 도움을 주는 일을 하고 있을수록 더 적게 임금을 받는 일반 법칙이라도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일의 가치를 재는] 객관적인 척도를 찾기란 어렵다. 하지만 그러한 척도를 엿볼 수 있는 쉬운 방법은 있다. 어떤 특정 계층의 사람들이 사라지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우리는 간호사나, 환경 미화원, 혹은 기계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을 것이다. 만약 이들이 한 줌 연기가 되어 사라지게 된다면 결과는 즉각적이고도 참담할 것임이 분명하다. 교사나 항만 근로자가 없는 세상은 이내 문제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SF 소설가나 스카(SKA) 뮤지션이 없는 세상은 분명 더 재미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사모펀드 CEO나 로비스트, 홍보 연구자, 보험계리사, 텔레마케터, 집행관료나 법률 상담가들이 사라지게 된다고 하더라도, 정작 인류가 얼마나 고통 받게 될 지는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어떤 이들은 이런 직업이 현저하게 향상되고 있다고 의심할 것이다). 하지만 몇몇 소수의 훌륭한 예외를 제외하면(예컨대 의사라든지), 이러한 법칙은 놀라울 정도로 잘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도착적인 점을 언급하자면, 오늘날에 벌어지는 이러한 현상과 관련하여 세상이 실제로도 이렇게 굴러가야 한다고 믿는 일반 의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식은 우파 포퓰리즘이 행사하는 비밀스러운 힘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하철 노동자들이 노동 분쟁 중에 런던을 마비시켰다는 이유로 원한 감정을 자극하는 타블로이드 신문을 보면서 그러한 비밀스러운 힘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지하철 노동자가 런던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바로 그들의 노동이 우리 사회에 실제로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미국에서 이는 더 명백하게 드러나는데, 공화당원들은 학교 교사나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에 대한 원한 감정을 성공적으로 동원하고 있다. 교사나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은 봉급과 수당이 지나치게 부풀어 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는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은 정작 문제를 일으키는 집단인 학교 행정 관리자나 자동차 산업 관리자에 대해서는 원한 감정을 품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이 노동자들은 “하지만 당신들은 애들을 가르쳐야 할 거 아냐! 아니면 자동차나 만들어야지! 당신들은 진짜 일을 할 필요가 있단 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간 계층이 받을 만한 연금이나 헬스케어를 받을 만한 배짱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 같다.
만약 누군가가 금융 자본의 힘을 유지하는 데 완벽하게 딱 들어맞는 노동 시장을 디자인 해왔다면, 그 누군가가 어떻게 더 좋은 직업을 만들 수 있을지를 생각하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실제로 생산 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가차 없이 쥐어 짜이고 착취당하고 있다. 생산직종 외 나머지 사람들은 한 쪽으로는 공포에 떨면서 널리 매도당하고 있는 실업자 층에 속하거나, 다른 한쪽으로는 기본적으로는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으면서 봉급을 받고 있는 더 넓은 층에 속해 있다. 더 넓은 층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배 계급(관리자나 행정가 등등), 특히 자신의 금융적/재정적 아바타의 관점이나 감수성에 동일시하도록 만들어진 위치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동시에 분명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사회적 가치가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들은 부글부글 끓어대는 원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분명 우리의 시스템은 의식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시스템은 온갖 시행착오를 겪었던 지난 한 세기의 산물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우리의 기술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3~4시간만 일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 될 것이다.
출처: https://namunnib.tistory.com/642 [parrhesia:티스토리]
네, 뭔가 해결책이 필요한 건 사실입니다만, 세금으로 해결하려던 시도가 사실 실패하고 있다네요. 그 약자들에게 특례를 허용하면 그 혜택은 약자가 아니라 강자에게로 가는 게 현상황인 거 같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