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홍대선 작가(예전 딴지일보의 필독)가 책을 내고 유튜브 여기저기 출연하고 있는 것 같은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어서 소개해봅니다.
(기본적으로 홍작가에게 있어 한국인은 평시에는 엄청나게 척박한 땅에서 먹고 살기 위해 억척스러워야 했고,
바로 옆의 중국이라는 말도 안되는 덩치의 적과 대치하며 생존하기 위해 전시에는 (살수대첩, 귀주대첩, 노량해전처럼) 패배하여 후퇴하는 적까지도 몽땅 몰살시켜야 했을 정도로 독해야 했던 민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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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국가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한국인은 국가를 도구적으로 본다.
한국인들이 주민센터에서 공무원을 함부로 대하듯이 할 수 있는 나라는 세상에 없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수백년간 민중들에게 "국가는 너희들을 위한 도구고 우리가 잘 해볼게"라는 가스라이팅을 해온 결과이다.
조선을 만든 사대부들은 왕을 경복궁에 가둬놓고 휴일도 없이 하루에 두세시간 밖에 못 자고 민원처리하는 공무원으로 만들었다.
백성들은 신문고, 읍소, 격쟁(꽹과리를 두들기며 왕의 행차를 막아섬) 등으로 민원제기를 할 수 있었고, '처리 안해주면 너 나쁜 놈'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그들이 생각한 민본주의이고, 이런 기질이 현대 한국이 민주주의를 빠르게 받아들이는 기틀이 되었다.
조선 후기에 국가가 도구의 기능을 상실하니 인내천(백성이 하늘이다)을 내세운 동학운동이 나타났고,
일제강점기 시절의 지식인들은 빨리 미국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이자는 뜻을 모으기도 했다.
이런 바탕 위에 3.1 운동도 가능했던 것이고.
홍대선 작가가 이전에 한참 등장했던 팟캐스트 안알남에서는 이런 얘기가 나왔었습니다.
기억이 정확할지는 모르겠는데 대충 요약해보면,
'한국인은 박정희 전두환 같은 독재자에게 당하기만 한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식의 생각은 불합리하다.
그런 말은 한국인들은 다들 바보에 무능력자란 말이 아닌가.
그런 사람들에게 당한 게 아니라 거꾸로, 그런 사람들을 이용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나.
(척박한 땅에서 살아온 억척스러운 한국인들이
24시간 사람을 갈아넣으면 24시간 생산물이 나올 수 있는 엄청난 가능성이 있는 산업화 시기를 맞은 상황에서)
그런 지도자를 적당히 용인하고 이용한 것이 아니겠나.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할 때가 왔을 때 민주화 운동 같은 것으로 지도자를 갈아치운 거고.
(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은 '내 탓이오'로 귀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의 이명박' '모든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는 말도 마찬가지 맥락일 것이고.)
그걸 들으면서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한국인들은 왕의 목을 쳐본 적은 없지만 이승만 대통령을 내쫓아본 적은 있지요.
그 후에 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전두환 같은 독재자도
그런 나라에서는 일반적인 독재자들처럼 끝도없이 제멋대로 굴기는 어려웠고
늘 국민들에게 뭔가 성과를 보여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었을 거구요.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무솔리니 같은 전통적인 강대국의 독재자들 뿐 아니라
제국주의 시절이 지나간 후 독립한 제3세계에서 독재자가 등장한 거야 흔한 일인데,
그런 제3세계 국가들 중 한국만큼 민주주의가 자리잡은 나라가 거의 없다는 것도
한국인들이 그런 역사를 거쳐왔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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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번에 출간한 '한국인의 탄생'이라는 책에서의 인용문 몇 부분입니다.
한국은 어째서 중국에 흡수되지 않았는가?
역사학자라면 모두가 의아해하는 결과가 도출된 과정이야말로 한국인의 비밀을 푸는 몇 가지 열쇠 중 하나다. 한국은 왜 오래전에 망하지 않았는가? 다시 말해 한국은 왜 존재하는가? 어째서 중국의 팽창으로부터 살아남았는가?
한국인은 자신들이 전쟁민족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최근의 전적이 별로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최근이란 임진왜란부터를 말한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은 일본에 멸망 직전까지 몰렸고, 병자호란에선 임금이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 안에서 침공군에게 항복하는 수모를 겪었다. 구한말 러일전쟁의 전리품이 되어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해보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일은 지금까지는 물론 앞으로도 오랫동안 한국인의 자존심을 긁을 것이다. (…) 현재의 한국인에게 한민족이 전쟁을 못 한다는 착각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유라시아 대륙의 주요 민족 중 전쟁민족이 아닌 집단은 찾아보기 힘들다. 패배자들은 이미 사라졌다.
고구려는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중국의 힘을 무시했다. 중국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고구려를 응징하려고 했다. 결과는 양측에 모두 불행했다. 물론 멸망한 고구려 쪽이 훨씬 손해다. 하지만 중국은 손해를 안 봤느냐고 하면, 그렇지 않다. 수나라는 고구려 침공에 실패한 여파로 멸망했다. 당나라는 두 번의 실패로 멸망 직전에까지 몰렸다. 만약 당나라까지 멸망했다면 중국의 역사는 수백 년의 후퇴를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무엇을 얻었는가. (…) 중국은 결과적으로 얻은 게 없었다. 고구려 유민은 곧바로 발해를 세워 고구려의 자리를 대체했다. 발해가 멸망하고 10년 후 고려가 삼한을 통일하고 한반도의 주인이 되었다. 중국의 입장에서 고구려는 멸망한 적이 없는 것이다. 불필요한 고통은 한반도와 중원 양쪽에 귀중한 교훈을 주었다. 중국에 있어 한반도에 싸움을 거는 행위는 막대한 비용에 비해 소득이 너무 없었다. 한반도는 한반도대로 끝까지 가면 인구와 생산력의 한계를 만나 왕조가 멸망하는 사태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지나치게 값비싼 실험을 한 후 한반도와 중국은 이후 암묵적 합의에 이르렀다고 확신한다. 중국은 한반도가 고개를 숙여주기만 하면 건드리지 않기로 결론을 굳히고 행동했다. 한반도 왕조는 중국이 책봉하는 제후국의 지위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체면을 세워주는 대신 실질적인 영향력 행사는 거부하기로 했다. 이러한 타협은 그 자체로 평화다. 그러므로 고려가 일어선 폐허에 아무런 값어치가 없지는 않았다. 고구려는 죽지 않고 부활했을 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조선은 임금이 나라를 사유화한 게 아니라, 사대부가 임금을 국유화한 나라다. 그러나 소유권 문제로 되돌아오면 결국 국가는 임금의 명의로 된 부동산이었다. 근대 민주공화국 체제를 접하기 전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아마도 민주주의 체제를 에이브러햄 링컨이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사용한 것만큼 간명하게, 그리고 완전에 가깝게 정리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이 말의 위대한 점은 정말 쉬우면서도 거짓이나 생략이 없다는 사실이다. 조선 체제 역시 이 문장과 정확히 같은 구조로 설명할 수 있다. 조선의 주권자는 임금이었고, 혁명 주체는 사대부였으며, 혁명의 목적은 백성의 삶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을 딱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바로 다음과 같은 문구일 것이다. “임금의, 사대부에 의한, 백성을 위한”
나는 여기서 감히 조선 사대부의 특징을 하나의 문구로 정리해보겠다.'자신을 도구로 인식한 엘리트'
한국인은 평등하지 않은 것에 매우 분노한다. 그러나 거꾸로, 평등을 당연하게 여기는 기질 자체가 조선으로 부터 왔다는 사실은 간과된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이념적 동의 위에서 굴러가지 않는다. 한국인에게 국가란 어디까지나 현실적 필요를 위해 타협된 결과다. 한국은 협업을 통해 굴러가는데, 그 협동이란 게 싫어하는 인간들끼리 이루어지기에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유지된다. 그러므로 조국은 신성하지 않다. 한국인에게 조국이란 쓸데없는 잔소리가 많은 귀찮은 노인이다. ‘저 노망 난 노인네 언제 죽나’ 하고 읊조리는데, 이건 진심이다. 그런데 더 깊은 진심에서는 쓰러지면 둘러업고 병원으로 뛰어갈 준비도 되어 있다. 한국인에게 국가는 도구지만 한국은 운명이다. 운명은 옳지도 그르지도 않다. 다만 감수해야 하는 무언가다. 조국은 신성하지 않은 숙명이다. 산성(山城) 방어는 숙명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전쟁만이 숙명은 아니기에 한국인은 재난 상황에서도 산성 방어를 수행한다.
한국에서 인간성이란 본질적으로 숭고함과 거리가 멀다. 먹고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지옥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한국인이 인정하는 인간성이다. 관념에 존재하는 철학이 아니라 현실의 과제다. 한국인은 조금이라도 더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1차원적인 욕망을 지겨울 정도로 지켜보는 환경에서 순수한 인간성에 대한 믿음 따위는 자라나지 않는다. 한국인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싫어한다.
그런데 분노가 아니라 짜증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한국인은 인간에게 짜증이 나 있을 뿐 불처럼 분노하고 있지도 얼음처럼 냉혹하지도 않다. 한국인은 이웃과 친지, 친구가 자신보다 가난하기를 원하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기를 원하진 않는다. (...) 한반도의 농사 환경에서 이웃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한국인들은 남의 처절한 불행을 바라기에도 너무 가까이 붙어 있다.
한국인은 삶에 집착하지만 삶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인생에 만족한다고 말하는 한국인을 얼마나 보았는가? 그보다는 ‘죽지 못해 산다’고 말하는 사람을 적어도 100배는 많이 봤을 것이다. 한국인에게는 주어진 환경을 축복이라고 받아들이는 감각 자체가 없다. 한반도의 자연환경을 은혜롭다고 느끼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한국인은 몸도 정신도 쉬는 법이 없으며, 매 순간 열등감과 우월감이 넘나드는 난기류를 타 넘는 철새다. 고통은 한국인의 가장 친한 벗이자 헤어질 수 없는 원수다.
앞으로도 한국인은 화가 많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성격이 그 모양인데 행복할 수가 없다. 반면 한국이 앞으로 어떤 위기에 처할지 알 수 없지만, 결국엔 극복하고 회복할 것이다. 한국의 미래는 희망적이다. 현재 상태에 만족하기엔, 한국인은 성격이 너무 나쁘기 때문이다.
일단은 이렇게 말하는군요
코로나 시국 때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말 잘 들었어요. 가장 일사불란했어요.
이걸 가지고 프랑스 언론이, 동아시아 농부의 후손들이 말을 잘 듣는 거 보니까 옛날부터 수동적이고 착취당하는 그런 기질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보니까 사람들이 참 양떼처럼 주체적이지 못하고 권력의 말을 잘 들어서 방역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 실제 유럽인들보다 더 시민 의식이 있어서 아니야, 라는 식의 프랑스 언론에 헛소리가 있었어요.
이건 뭐냐면 외국의 착각이에요.
서양을 넘어서는 유럽을 넘어서는 동양의 주체적 질서라는게 있을리 없다 라는게 깔려 있으니까 그런 헛소리를 하는 거거든요.
이런 건 뭐냐면 한국 사람들이 재난 상황이기 때문에 협동심을 발휘한 거예요.
전쟁과 재난 상황에서 한국인은 더없이 협조적이고 이타적이고
재난 상황이 해제되고 나면 한국인은 빛의 속도로 이기적이고 시기질투하는 평상시 상태로 돌아갑니다
(책속에서)
전시의 한국인은 특별함을 거부한다. 남들보다 희생적이면서 누구보다 조용한 존재가 되려고 한다. 외적에 맞서는 산성(山城) 안은 혼자만 주목받아서는 안 되는 공간이다. 원치 않게 영웅으로 추대되기라도 할라치면 자신을 뭉툭하게 깎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한국인의 선조가 한반도에 사로잡힌 탓에 얻은 특질을 천박한 숭고함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한국인은 어떤 인간집단인가? 한국인은 숭고한 속물이다. 숭고한 속물은 평시와 전시, 생존의 지옥과 멸망의 그림자 사이에서 태어난 별종이다.
저는 유뷰트 내용을 다 동의는 안되되군요
자기 논리에 자잘한것들은 무시하고 큰틀에서 우겨넣은 듯한 느낌입니다
너무 일관성있게 하나로 쭉 연결되는 감이 있긴 한 거 같아요 :-)
인과관계를 반대로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심리학자가 하는 얘기였었나, (딱히 한국인에 대한 얘기는 아니었는데)
남을 도구로 여기는 사람은 자기도 도구로 여기고 자기자신마저도 착취를 한다고 하더라구요.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8807307CLIEN
도구로서 국민들이 이용했고 사용가치가 없어지면 버린다고
시대정신인거죠
한국이 중국에 편입되지 않은 이유가 가장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