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근현대사 부분에서 빠질 수 없는 사건이 조선의 경술국치인데요.
을사조약으로 조선은 모든 주권을 박탈당했다는 것은 다들 아실테지만
다들 모르는 것이 을사조약으로 이왕가 (이씨왕가의 줄임말)가 "왕공족" 이라는 지위를 받은 후
1911~1920년까지는 연간 150만 엔, 1921년부터는 연간 180만 엔을 받았는데 세비 150만 엔은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연간 300억 원이 넘는 규모입니다. 총독부는 예산의 2.9%를 왕공족으로 지정된 고종·순종 및 그 일가의 안락한 은퇴 생활을 위해 아낌없이 지출했고요.
(1930년 이왕가 재산 규모는 유가증권이 60만 7,778엔, 부동산 772만 6,091엔이었다. 이왕직이 관리한 전답은 1억 5,000만 평으로, 한반도 전체 논 면적의 5%에 해당했다. 여기서 나오는 수입은 모두 왕공족에게 돌아갔다. 덕분에 일본 황족들도 조선 왕공족의 재산을 부러워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재산을 소유한 대부호로 등극하게 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조선의 패망에 대한 피해자 코스프레를 통해 망국의 원인을 이완용 1명에게만 돌리고 이씨 왕가에 대해서는 연민을 불러일으키며 마지막 남은 조선의 황족이란 이름으로 종종 대중 앞에 출현하는 사례도 있지만 저는 솔직히 역겹다고 생각해요. 이씨 왕족은 자신들의 나라를 팔아넘긴 주역으로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빌어먹을 족속이란 점은 아주 명백하게 분명한 사실인데 한국사에서 이완용이 체결한 을사조약에 가려서 이 부분을 강조해서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래글은 나무위키에서 퍼왔습니다. (출처 : https://namu.wiki/w/%EC%99%95%EA%B3%B5%EC%A1%B1)
왕공족의 성립은 1910년 경술국치와 동시에 이뤄졌다. 경술국치 당시 일제는 한반도에서의 민심을 잃지 않기 위해 한일병합조약 제3~4조에 황실의 우대 조건을 삽입했다. 이에 따라 구 황실을 황제 가문인 천황가보다는 낮고 오등작을 가진 다른 화족들보다는 높은 위치로 대우했다. 이 신분을 왕공족이라고 하며, 이왕은 이 왕공족의 수장이었다. 칭호들도 대한제국을 선포한 지 13년 만에 다시 1단계 ~ 2단계씩 격하되어, '황태자'가 '이왕세자'로, '폐하'가 '전하'로 격하되었다. 넓게 보면 한국 황실이 일본 황실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혼맥을 맺은 적도 있다.
상술했듯이 한일병합조약에서 일본은 대한제국의 황제 및 그 친족들에게 일본 제국 체계 내에서 적절한 신분을 부여할 것을 명기했으며, 이에 따라 고종 본인과 순종, 순종의 후계자인 영친왕을 왕족에 봉하고 흥선대원군의 장남 흥친왕과 고종의 차남 의친왕을 공족에 봉했다. 그 외 가까운 황족들은 조선귀족에 봉해졌다. 1882년 앞서 후작위를 받고 차남 이하 자녀들이 남작위를 서임 받은 옛 류큐 왕국의 쇼타이 왕보다 두세 단계씩 더 높은 지위인데 한국 황실이 일국의 황제 가문이기 때문에 이 정도의 지위는 줘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합병 직후 당초에는 쇼 왕가가 두 계급 아래(왕-공-후)의 후작위를 받았던 것처럼 두 계급을 낮춰(황-왕-공) 고종은 '이태공', 순종은 '이공'으로 봉하여 공작위를 세습하게 하게 할 계획이었는데, 이완용의 건의로 한 계급만을 격하하여 왕작위를 세습하게 되었다. 압도적인 국력차로 단숨에 식민지도 아닌 내지로 집어삼킨 류큐왕국과는 달리, 대한제국은 한때 근대화와 칭제를 추진할 정도로 꽤 체급이 나가는 중견국가였고, 합병까지의 과정도 무력까지 동원된 민중의 반발로 순탄치 못했으며, 합병 직후에도 국내외에 상당한 저항세력이 잔존해 있었던 상황을 고려한 듯하다. 3.1 운동 발발 시점까지도 조선 민중에게 구 황실의 존재가 어떤 의미를 지녔었는지를 되돌아보면, 왕공가에 대해 친왕가를 상회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한 것은 일제에게 있어 충분히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일본은 조약 내용대로 이왕가에게 품위 유지비 150만 엔을 지급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자국 경제가 파탄나버리고 자국민이 굶주리는 상황까지 왔음에도 정말 끝까지 약속을 지켰다. 당사국인 일본에서조차 무리하게 지원하는 것이 아니냐며 경악할 정도.
공족인 이강공가에게는 세비 대신 합병 당시 천황이 내리는 은사공채 84만 엔이 주어졌다. 일가의 경비는 이 공채에서 발생하는 이자 외에 경남과 함경남도에 소유한 어업권을 민간에 대여해서 마련한다.
역시 공족 이희공가는 합병 당시 이희공과 장남 이준용이 받은 은사공채 합계 100만 8천 엔과 원래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의 수익으로 가계를 꾸렸다.
이러한 일제의 녹을 받은 이왕가의 존재와 독립운동에 반대 내지는 소극적인 황족들에 대한 실망으로 인하여 독립운동[6] 중에도, 해방 이후에도 복벽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게 된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조선총독부가 해체되고, 1947년 일본국 헌법 제14조 제2항에 "화족 기타귀족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면서 이왕가 등 왕공족의 지위가 일본 국내에서도 사라졌다. 그리고 1948년 한반도에서도 조선의 궁궐을 비롯해 그들의 막대한 재산 또한 국가에 환수되거나 다른 곳으로 유출되어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다만 직계들만 그렇고, 오히려 방계 황족들은 아직도 막대한 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근데, 요즘 그런 시대 사는 느낌이 초큼 있어요.
https://namu.wiki/w/%EC%9D%98%EC%B9%9C%EC%99%95
https://ko.m.wikipedia.org/wiki/이건_(대한제국_황족)
+ 장남 이충 (모모야마 겐이치)
딸 이옥자
차남 이기
삼남 모모야마 고야
이들 또한 자녀가 있을 것 같은데 추적이 가능하다면 찾아서 근황을 좀 알고 싶네요 그리고 친일 인명 사전에도 이건의 이름이 올라가길 바랍니다.
유튜브, 인스타등에 조선 무조건 까면서 망해도 싼 놈들이라 비난하는 작업.
어차피 대한제국 황실을 완전 평민화 내지 처형했더라면 당시 백성들 반발에 일제통치가 어려워져
적당한 신분을 안배한 것이지, 저들이 잘먹고 잘살았다고는 하기 어렵다 봅니다.
수천년 이어져온 왕정에서 왕을 잃은 백성들의 마음은 어땠을지는 이미 고려 대상이 아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