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전체에서 핵심이 되는 건 구원과 회복입니다.
그런데 그 지향점이 되는 걸 예수님은 천국이라 칭하셨습니다.
말씀의 맥락 안에서 천국이 가지는 성경적 의미를 읽어 보겠습니다.
1.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백성은 그 법에 다스림 받고 자신이 따르는 법이 무엇인지 고백하는 것으로 자신의 소속된 국가를 표했습니다.
이는 고대 국가 경계를 나누는 기준이 되었고 초기 기독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란 증언으로 목숨을 잃는 일들이 허다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따르는 법 중에서 그 중함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건 제사였습니다.
그러니 선민의 가장 중대한 의식인 제사를 드리는 성전은 이스라엘의 모든 것이며 구심점이었습니다.
(주를 섬긴다는 건 곧 예배이고 그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게 제사여서,
십자가의 제사와 토라의 완성에 관해 이해하는 게 성경적 예배론을 정리하는 데 중요합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은 당시의 유대에겐 다윗의 자손으로 그 나라의 옛 영광을 회복해 줄 정치 지도자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나라는 국가 권력을 다시 찾는 게 아니라 당신의 공의를 세우고 원수조차 사랑하는 천국(하나님 나라)이었죠.
천국은 엘로힘이나 야훼라는 말을 입에 담기조차 두려워했던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여진 마태복음의 표현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직도 저 단어들이 나오면 아도나이(주)라고 읽어요.)
하나님 나라란 말을 써도 별 문제가 되지않는 헬라인을 대상으로 기록된 누가복음에선 저리 표기되어
둘은 같은 뜻입니다.
3.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사고파는 자들을 다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탁자와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뒤집어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 하였거늘 너희가 그것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마21:12, 13)
여기서 강도는 우리가 아는 그런 뜻이 아니라 유대를 무력으로 되찾고 싶었던 저항군을 말합니다.
바라바와 주님의 십자가의 좌우에 있던 강도들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김구는 풀어주고 안중근과 윤봉길을 같이 십자가에 달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형이 저항군들을 처단하던 사형 방식이었는데 요세푸스의 기록에선 하루에 한번에 2000개의 십자가가 선 날도 있다 하고,
여러 저항군들이 소개되는 걸 볼 때 당시 유대인들이 얼마나 로마에 강하게 맞서 싸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로마는 그 시절 유대에겐 진정 원수였던 거죠!
4. 그런 저항군이 다른 데도 아닌 성전에 모여 거기에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임시정부를 세웠던 건,
당연히 성전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를 호되게 꾸짖으시죠!
당신의 나라는 정치적으로 회복된 나라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인간다움인 의와 사랑을 회복한 나라인 걸 구약의 말씀에서부터 전하고 있었지만
당대의 바리새파 등의 종교인들은 토라의 그 본질을 지키지 못하고 껍대기 뿐인 가식과 전통에만 매여 있었고
백성들은 원수 로마를 내쫓고 다윗의 나라를 되찾는 민족적 자부심을 찾는 데만 관심이 있었던 무지에 분노하셨습니다.
(계속)
제가 감히 한 말씀 드려봅니다. 부활, 재림, 그리스도 다 좋습니다만 성경 열심히 풀어봤자 세상에 큰 변화 없습니다. 아니면 아예 신학을 연구해서 성경의 올바른 해석에 기여하세요. 여기서 열심히 성경에 대해 논파하신들 예수가 기뻐할까요? 차라리 예수가 가르친대로 나가서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푸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이런 폭력적이고 독선적인 신앙은 우리 민주주의와는 반대되는 신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