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외노자로 살 적, 이준석이 국힘 당대표로 장애인 갈라치기를 할 시절에 적었던 글을 공유해봅니다. 마삼중이라 조롱받던 이준석이 드디어 국회에 입성해서 원내에서 갈라치기와 혐오의 문법으로 한국 정치사에 거악을 불러오기 시작하고 있네요. 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글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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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 이동권 시위로 인한 교통마비에 대해 얼마전 한 공당의 대표가 나서서 장애인들을 탓하는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우선 장애인의 이동권은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문제이고 ‘정치적’으로 풀어가야할 현안이다. 이런 이유로 여러 선진국에서는 초당적 협력이 이루어지는 대표적 지점이다. 장애는 정치적 성향을 따지지 않고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내가 살고 있는 캐나다에서 장애인의 이동권은 한국에 비한다면 역차별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를 자랑한다.
한국에서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요구는 그간 오랫동안 있어왔다. 자료를 찾아보니 자유로운 이동권 보장을 약속한게 무려 20년 전의 일이다. 그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정치인들과 정책결정권자들은 그런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던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다. 조용한 요청에 대한 응답이 없는 상황에서 바닥에 드러누은 사람들에게 시민들은 불편함을 이야기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을 해결해주어야 하는 힘과 권력을 이양받은 공적인 지위에 있는 정치인이 과연 장애인들에게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음식 주문하고 한시간만 늦어도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있던가? 누군가 당신의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를 20년 동안 무시한다면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진심을 담아 고백하거나 면접에 지원했을때 좌절되면 당신은 담담히 그 결과를 받아들이고 감내하는가?
내가 사는 캐나다에서 이런 시위는 일어나지도 않겠지만, 혹시 일어난다면 시민들의 반응은 어떨까? 불편함을 호소하며 장애인들을 혐오하고 조롱하고 모욕할까? 물론 그럴 사람도 있겠지만 극히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감히 그런 생각을 온라인에서조차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캐나다 정치인 중 저 당대표와 같은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장담컨대 그의 공인으로서의 생명은 끝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장애인들의 통행과 이동에 아무런 장애가 없는 캐나다의 한 대학교 건물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서울의 교통에 장애를 초래하는건 장애인이 아니고 그 장애인들의 불편을 초래한 정치인과 행정가들이다. 우리의 저질적인 정치 문화는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역할로 권력을 쥐어준 정치인들이 이런 무책임하고 비양심적인 발언을 하더라도, 0선임에도 여당의 대표로 옹립하기까지 하고 있다.
후대의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는 너무도 자명하다. 그의 발언과 행동은 모두 기록이 남아있으니 굳이 내가 기록을 남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좋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를 그의 이름으로 오염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혐오의 정치인에 대해 경악하고 문제를 지적하는 기록을 남겨야 한다 생각해 이렇게 글을 적어본다.
한편으론 이해도 되는게 사실이다.
그는 살면서 단 한번도 장애를 갖는 사람들을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온실속의 화초처럼 풍족한 자양분과 햇살에 둘러싸여 결핍을 경험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삶의 위대한 투쟁과는 철저히 괴리된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이미 잘 드러나 있는 그의 삶의 궤적 주욱 살펴보면 이는 사실에 귀결되는 듯 하다.
나도 갈라치기를 좀 하고 싶다. 그것은 위에 언급했던 단 한명과 우리 공동체의 갈라치기다.
나는 그가 우리와 같은 공동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철저히 유리시키고 싶다. 비슷한 대립유전자를 공유할 가능성이 높은 같은 유전적 그룹에 묶이는 집단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같은 언어를 쓰는 같은 문화권에 있는 것도 솔직히 믿기지 않는다. 심지어 같은 ‘종(species)’인지도 의문이다. 어디 하늘 높은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헛기침을 내는 무슨 신령스러운 존재인것 만 같다. 그는 철저히 우리와 유리된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한다.
그가 이 글을 볼리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 볼 기회가 닿는다면, 장애인들이 모여사는 영구임대 아파트에서 어린 시절을 경험한 작은 중소도시 출신의 그와 같은 나이의 흙수저 과학자로서 감히 조언을 고하고 싶다.
부디 공감능력이 없다면 있는 척 연기할 정도의 상황판단능력이라도 갖추시길.
어떤 정치적 셈법으로 지금의 전략을 취하는지는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지금같은 행보를 이어간다면 위에도 설명했듯. 지금의 부귀영화 이후 당신의 말로 그리고 역사의 평가는 더욱 분명해질 것임에 분명할 것이다.
당신이 만든 혐오의 칼날을 갖고 놀다가 부디 스스로 목을 베는 일은 없길 바란다.
나는 오늘도 지하철에 전동휠체어를 탄 장애인과 동시에 지하철에 입장했다 나는 그의 문을 잡아줄 필요도 열어줄 필요도 없었다. 지하철 플랫폼에 도착했을때 채 1분도 안지나 그 역시 지하철 플랫폼에 도착해 있었다. 한국의 이야기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는 캐나다 어느 대도시의 이야기다.
늦은 밤 인적이 드문 플랫폼에서 다음 열차를 함께 기다리는 그에게 가서 묻고 싶었다. 당신의 이동할 권리를 누군가 보장해주지 않으면서 그 권리를 주장하는 당신을 20년동안 무시한다면 당신은 과연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아주 좋은 글 감사합니다.
존재 자체가 이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에 기생하는 교활한 사파 정치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