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말아야할 역사 제주 4.3사건..
강의 영상으로 보시는걸 추천합니다 작년에 올라온 1시간 짜리 통합버전 영상도 있지만 이 영상이 보다 핵심만 정리된 영상입니다
아래는 스샷과 설명입니다 영상을 보시면 패스하셔도 됩니다
모두가 알듯이 1945년 해방이 되고 이후 46년에 제주군에서 제주도로 승격이 됩니다
그리고 이후 재정압박에 시달리며 동시에 미군정에서 과도한 세금을 걷어가서 미군정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미군정은 3.1절 행사도 하지말라고 했으나 제주도민들은 약 3만명이모여 3.1절 행사를 했습니다
여기서 당시 경찰이 말을 타고 가던중 6살 아이가 발 말굽에 치이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그 경찰은 사과나 응급조치 없이 그냥 도주를 했고 여기에 성난 도민들이 경찰서까지 쫓아갑니다
그리고 그 경찰서에서는 그 민간인들에게 발포를 하여 6명이 사망합니다 사망자 중에는 초등학생도 있었고 아이를 안고 있던 아이엄마까지 있었습니다 등을 관통하여 안고있던 아이까지 죽었다고 하죠
그 사건으로 당시 제주도지사 (초대 도지사 박경훈)는 사직 제주도의 모든 공무원 파업, 교사, 도민들까지 전부 들고일어났고
3.1절 기념식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500명이 끌려가 고문을 받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러자 미군정은 극우집단인 서북청년단을 내려보내 공포분위기를 조장하고 횡포를 부립니다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김달삼이 350명의 무장대를 이끌고 1948 4.3에 봉기하여 제주도 경찰서 12곳을 습격합니다
당시 여러 경찰이 죽게되고 이 과정에서 경찰가족과 군인가족도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4.3 날짜를 기준으로 보자면 4.3의 시작은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사회주의자 김달삼을 비롯한 세력의 무장봉기가 맞습니다
그 여파로 5.10 총선에서 제주도 선거구 2곳은 선거가 이뤄지지 못했고 200명중 198명만 당선 됩니다
미국은 당시 중국을 공산세력에게 빼앗겼고 마지노선이 한반도 남쪽인데 남한만이라도 공산화를 막고 싶었는데
제주에서 공산세력의 봉기와 그로인해 총선이 제대로 치뤄지지 않았던 상황 때문에 미국은 상당히 불쾌했습니다
그리하여 미군정청에서 9연대를 제주로 내려보냈습니다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이 와서 봤을때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질것 같아 김달삼에게 항복을 요구 합니다
회담을 하며 지도부 명단을 확보하겠다 대신 내 아내와 내 갓난아이를 볼모로 넘기고 우리 9연대는 토벌하지 않겠다 하며 화해합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당시 경무부장 조병옥이 딥빡 합니다
4.3때 내려와 김익렬과 다툼 조병옥은 모두 죽여야 한다고 주장 했다고 합니다 (당시 대선후보)
이승만은 같이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에 첨언에 따르면 "제주도 놈들을 모조리 죽이시오"
조병옥과 함께 내려온 미 군정장관인 윈리엄 딘은 제주도 좌익분자들의 저항을 묵과하지 않겠다 토벌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김익렬 중령은 연대장에서 해임시켜 버리고 김익렬도 좌익으로 몰아버립니다
그리고 오라리라는 마을에 방화사건이 일어났는데 극우 서북청년단이 방화를 하여 무장대가 한것처럼 꾸몄고 미군정장관은 제주도 빨갱이 들이 벌인 일이라며 토벌을 정당화 하는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무장대는 한라산에 주둔하고 토벌대는 월정리에 본부가 위치하였고 당시 토벌대가 중턱에 있는 도민들에게 해안가로 내려오라고 하며 소계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전부 불지르겠다고 해서 일부 도민들이 산간지역에서 해안가로 내려왔는데 그들을 무자비 하게 학살해버립니다
죽이지 않은 사람은 고문 오히려 산간지역 사람들까지 분노하여 무장대에 합류하거나 숨어들게 되며
9연대와 서북청년단이 숨어있는 도민들을 잡아내서 학살을 합니다
그리하여 제주도 어느곳을 가도 학살현장을 발로 밟은것이 됩니다...
토벌대 본부가 있던 월정리는 가장많이 학살당하고 고문당한곳
애기들만 묻었던 애기 무덤도 있고 북촌리에는 무남(남자가 없는)마을이 생겼고
제주 공항에서고 뼈 500구가 드러나기도 했으며 신화월드가 있는곳도 학살지였고 산방산이 있는곳에서도 폭격현장이 있고 거기서 시신 수백구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제주 곳곳이 전부 학살이 이뤄진 학살지였습니다
민간인 희생자를 많게는 8.6만까지 보는 학자도 있다고 하며 일상적으로 제주도민의 1/3이 죽었다해서 10만중에 3만명이 죽은 사건 아무튼 위 통계표에서는 1.4만 정도로 잡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10세이하 어린아이가 770명 60세 이상 70세 이하의 노인들이 557 71세 이상의 노인이 344
그리고 11~20세 사이의 미성년자 및 학생들이 죽은 숫자도 2464명 입니다
이 숫자만 합쳐서 전체 희생자의 1/3이 넘습니다
평시에 민간인 학살사례만 놓고보면 광주보다 훨씬 규모가 컸습니다
미성년자와 노약자만 30%.. 얼마나 잔혹했냐면 시체를 잘라 걸어놓기도 했고...
그리고 북한에서 내려온 지주들 (농지 무상몰수), 친일파들, 깡패들, 기독교신자들 그들이 전부 반공투사가 되어 이승만 지지세력이 되고 군인들은 쉽게 토벌이 가능할거라 생각했는데 타지에 와서 죽어나가게 되고 경찰과 군인의 가족들도 무장대에게 희생되고
그리하여 극한의 좌우대립 속에서 복수가 복수를 낳게 됨 그래서 다 같은 피해자 일 수 있는데
역시 가장 큰 피해자는 역시 제주도민들..
당시 토벌을 반대하고 김달삼과 화해를 해서 유혈사태를 막고자했던 김익렬 중령이 가족들에게 4.3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며 남긴 말
문형순 총경은 광복군 출신이었습니다
여수 순천사건은 9연대만으로 토벌이 어려우니 그들과 함께 "제주도 빨갱이" 들을 토벌하려 14연대를 내려 보냅니다
그런데 그 14연대가 그 명령을 거부하자 다른 군 부대를 투입시킵니다
그래서 14연대는 산속 여기저기 숨어듭니다 이때 유명한 빨갱이가 잡히죠
바로 남로당원 박정희 그리고 그 박정희는 나중에 백선엽의 도움으로 여차저차 해서 사형수에서 풀려나고 반공투사로 변신하죠
그게 여수 순천사건입니다
미 군정기는 48년 8.15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으로 끝났고 이때 대통령은 이승만이었죠
그 이승만은 집권하고 10월에 대대적으로 군을 증파해서 내려보냅니다
그 과정에서 여순사건이 발생하고 미군정도 끝난 이후에 일어난 시기에 발생한것
그래서 4.3의 가장 큰 책임은 정부를 책임지는 이승만에게 있는것이죠
이후 민주정부가 탄생했고
김대중 정부에서 4.3 특별법 제정 노무현 정부에서 4.3 진상보고서 발간 2003년 부터 4.3 평화공원 조성을 했습니다
4.3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위령비가 만들어졌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 영령들이여 대한민국 정부 잘못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피해를 입은것에 대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사죄드립니다 저세상에서 저희를 용서하시고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라는 추도사를 읍자 해가 떠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진짜로)
위패봉환소 안에 들어가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주는 집성촌이라 같은 성씨들이 같은 마을에 모여살았다고 합니다 실제 저기 위패봉환소에 적힌 희생자들의 명단을 보면 다 같은 성씨끼리 모여 있습니다
제주에서 4.3은 금기어이자 말을 할 수 없었다 말을하면 빨갱이로 몰려서 끌려가 고문받고 죽는 세상이었기에..
마지막으로 작년 제주도를 처음 갔었는데 (가족여행) 제가 4.3 평화공원은 무조건 가야한다고 우겨서...
그 4.3 평화공원을 방문하여 찍었던 사진 일부입니다
저기 저렇게 보이는 비석들에 다 희생자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위령비가 가운데 있고 그 주변을 빙 원형으로 둘러싸서 비석에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위령비 너머로 보이는곳이 위패봉환소이고요
4.3 묘지는 가보지 못했고 4.3기념관이라고 옆에 있습니다 거기 안에 당시 역사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되어 있더군요
늦었지만 4.3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할 가슴아픈 역사.. 제주 4.3 이었습니다
4.3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이승만
윌리엄 딘??? 저것도 미국에서는 인정받는 군인??? 으로 살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