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과연 법치국가인가. 법치국가란 한마디로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한 사회를 말한다.그러나 국민 상당수는 우리 사회가 법 앞에서 그리 평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우리나라의 법은 광복 이후 권력자의 편에 서왔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조선시대의 사법기능은 의금부,형조,사헌부,포도청 등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조선은 벼슬아치의 부정부패를 강력하게 처벌하는 국가였다.벼슬아치가 직위를 이용해 재물을 긁어모은 것을 장죄라 하고,그런 벼슬아치를 장리라고 했다.조선은 장리의 명단인 장리안을 따로 작성해 관리했다.이를 장안 또는 ‘뇌물을 받은 더러운 인간들의 장부’라는 뜻에서 <장오인녹안>이라고도 했는데,여기에 이름이 오르면 자신은 물론 자자손손 벼슬길이 막혔다.
조선시대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의금부는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는다"고 되어 있고,형조는 "형조의 상복사는 사죄를 상세히 복심하는 사무를 맡고,고율사는 법령 및 사건 검찰을 맡으며,장금사는 형옥과 금령에 관한 일을 맡으며,장례사는 노비와 포로에 관한 일을 맡는다"고 명문화되어 있다.사헌부는 종2품 대사헌 1명,종3품 집의 1명,정4품 장령 2명,정5품 지평 2명,정6품 감찰 24명 등 30명의 관원으로 구성되고,의금부는 통상 당상관 4인과 낭청 10인으로 구성됐는데 당상관은 겸직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낭청 10인이 핵심이었다.형조는 경국대전에 명시된 초기의 관원에는 판서 1인,참판 1인,참의 1인,정랑 4인,좌랑 4인,명률 1인,심률 2인,율학훈도 12인,검률 2인 등이 있었다.품계는 의금부 판사가 종1품이고,형조판서가 정2품인데 비해,사헌부 수장인 대사헌은 종2품에 불과하여,의금부판사나 형조판서보다 1∼2등급 낮은 품계로 책정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사법기관의 역할과 상호견제 = 강문갑 기자
오늘날의 검찰에 해당하는 조선시대의 사법기관은 사헌부다.경국대전에는 사헌부의 역할에 대해 “관원을 규찰하며,풍속을 바로잡고,원통하고 억울한 것을 풀어주고,협잡(남을 속이는 짓)행위를 단속하는 일을 맡는다”고 규정하고 있으며,사헌부는 사간원과 더불어 양사 또는 대간이라고불렀는데 두 기관이 백관에 대한 탄핵권을 갖고있지만,사헌부는 수사권까지 있었다.사헌부의 수사권은 고소가 있어야만 수사를 할 수 있었다.오늘날의 검찰은 고소가 없어도 수사할 수 있는 무제한 수사권이 법으로 보장되어 있음에도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 것이 일상이 된 것이다.사헌부는 어떤 사건이건 철저하게 수사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수사권은 사헌부의 독점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헌부 외에 왕명사건을 수사하는 의금부,지금의 경찰 격인 포도청과 서울시에 해당하는 한성부,법무부에 해당하는 형조에도 수사권이 있었다.수사권을 여러 기관으로 나눈 것은 현재 검찰이 보여주고 있는 ‘봐주기 수사’같은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였다.사헌부에서 이런저런 사유로 봐주기 수사를 한 정황이 발견되면 사간원에서 탄핵했고,의금부와 형조의 재수사 대상이 되었다.구조적으로 ‘봐주기 수사’따위를 할 수 없는 구조였다.
사헌부 내의 기강은 엄격하여,사헌부 고위 관료가 비리에 연루되면 사헌부 내에서 징벌하여 탄핵했다.대사헌도 거침없이 탄핵하는 사헌부가 다른 기관장의 비리에 대해서 어떻게 대했을 것인가는 짐작할 수 있다.본인에게 하자가 있을시 스스로 물러나는 피혐과,친족이 유관부처에 배치되면 둘 중 한 사람이 사직하는 상피를 엄격하게 적용했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은 견제를 싫어한다.고위관료들의 자리에서 보면 사헌부와 사간원의 인사권을 장악하려고 할 것이다.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대간(사헌부,사간원)을 살아있는 권력으로부터 독립시키는 장치를 마련했다.
대간의 인사권만은 이조판서가 아니라 정5,6품인 이조전랑에게 주었다.이조전랑이 다른 자리로 옮길때는 이조전랑이 자신의 후임을 천거토록 하는 자천제를 실시했다.사헌부의 업무는 권세가 집을 찾아다니며 인사청탁을 하는 분경(奔競)금지 및 왕이 잘못된 일을 시행했을 경우 이를바로 잡고자 하는 언론 활동인 간쟁과 부정부패 혹은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관리를 비판하는 탄핵과 왕과 세자의 교육 그리고 각종 법률 및 인사와 관련,의정부나 육조로부터 전달받고 승인하는 서경 등 이었으며,특권에는 소문만 들은 것으로도 고위관료를 탄핵할 수 있는 풍문탄핵권과 자신이 주장한 것에 대한 근거를 대지않아도 무방한 특권이 주어졌다.사헌부의 권한이 막강한 만큼 정치적으로 엄정 중립을 지켜야 했다.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 당쟁이 심해지면서 사헌부는 특정 당파의 이익추구 기관으로 변모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사헌부에 대한 가장 큰 견제기관은 의금부였다.조선의 국왕은 사헌부의 수사가 불공정하고,부실수사나 사건의 은폐가 확인되면 의금부로 사건을 이첩하여 조사토록 하였으며,왕실 관련 사건을다룬다는 점에서나 수사기관 위의 수사기관 이었다.의금부는 왕명에 따라 반역이나 왕실 관련 사건이나 일반수사기관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중대한 범죄를 다루는 특수기구였습니다.사헌부에서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사건은 신문고를 두드려 억울함을 호소하게 했는데,신문고를 설치한 곳이 의금부의 당직청이었다.
좌:구 사헌부 청사 청헌당,우:겸재 정선의 의금부 = 강문갑 기자
오늘날의 검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하게 된 뿌리는 일제강점기에 있다.조선총독부가 1912년 <조선형사령>을 만들면서 검찰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시킨 것이다.광복 후 법을 제정할때 원칙에 따라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했어야 했지만 친일세력들이 다시 득세하면서 일제 법령을 그대로 따르면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검찰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조선의 검찰인 사헌부가 의금부,형조 등에 힘의 견제와 분산이 된 것보다 후진적인 현실이다.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있다.제도적으로 진실을 덮지 못하도록 하고,여러기관에 분산시켜 끊임없는 견제와 감시로 한쪽으로 권력이 쏠리는 현상을 방지했던 우리 선조들의 국정 운영 방식을 오늘날에 되살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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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적으로만 알고있었는데 오히려 조선시대가 검찰역할의 상호견제가 뛰어났네요. 결국은 원인이 일제에 있었다니 이것 또한 웃기는 일인듯 합니다.
강압과 독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