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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뭉한 사람은 끝장 난 사람이다
"당신은 글 써야겠다. 사람 만나지 말고....."
"왜? 내가 어때서? (버럭)"
"음. 글보면 되게 진지하고 지적이고 중후하다고 생각할텐데 막상 만나 보면 유머나 농담도 잘하긴 하는데.... 봐 버럭도 잘하고, 예민하고 인상도 별로야. 푸근해보이지 않아. 아무튼 난 글의 당신이 더 좋아. 좀 멋져. ㅎ"
가끔 아내가 내 페북에 들어오곤 하는데 어느날 지나가듯 한 말이다. 아무래도 가장 오래 함께 산 사람 말이니까 맞는 말일거다.
그런데 정작 아내는 사람을 잘 못보고 나는 사람을 잘 본다. 이 역시 아내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살면서 함께 만난 사람 누구였든지 내 예측이 틀린 적은 없었다.
아내는 자주 틀린다. 그래서 상처 받을 때가 종종 있었다. 항상 상대의 장점을 먼저 보는 건 좋은데 문제는 상대가 내 마음 같지 않다는 데 있다.
"어땠어? ㅇㅇㅇ 그 사람..."
"응. 참 좋아. 똑똑하고 괜찮은...... 아. 몰라. 모르겠어. 난 당신하고 달라. 그냥 다 좋아 보여. 왜 그렇지? "
나도 모른다. 그 이유를.... 그저 직감적으로 첫 만남에서 '이 사람 앞에서는 말을 삼가해야겠다.', '다시는 안봐야 할 사람이네. 나와 안맞아.' 정도의 인상을 가지게 되는 것 뿐인데 잘 맞는 편이다.
나름대로 사람을 처음 대할 때 철칙이 있기는 하다.
나는 먼저 나를 다 보여준다. 최선을 다해서.
사람을 집이라고 치면 집들 사이에는 담장이 있다. 아주 어릴 적에는 없다. 그래서 어릴 때는 놀이터에 풀어만 놔도 친구가 생긴다. 자라면서 한단 한단 담장을 쌓아올린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면 그 담장이 원래부터 있었던 걸로 인식한다. 그런데 혼자 살지 않으니 옆집은 늘 궁금하다. 그래서 까치발을 하거나 점프해서 옆집을 훔쳐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냥 그 담장을 부수면 그만이다. 내 담장이 곧 이웃집 담장이다. 내 집은 보여주기 싫어하면서 남의 집을 보려는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내 집을 보여주면 남의 집도 보인다.
이런 방법의 최고 장점은 불투명하고 음습한 사람을 금방 알아챈다는 점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투명한 사람이고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의뭉한 사람이다.
의뭉한 사람은 빤한 사람이고 끝장 난 사람이다.
말은 의사전달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감추는 망토로도 유용하다. 반면 글은 결합되어 있으면서 해체도 가능해서 숨기려해도 숨길 수 없는 마력을 지녔다.
말이 얼굴이면 글은 눈이다.
내용은 바르고 논리정연한데 자꾸 이 사이에 낀 이물처럼 뭔가 걸리적거리거나 읽을 수록 뿌연 백태가 끼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영락없이 숨은 의도가 있거나 목적 달성을 위해 글의 힘을 빌리는 사람이다. 의뭉한 사람의 전형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는 사람들, 소위 민주진영 인사들로 불리는 시민운동가, 변호사가 대표적이다. 진작에 페친을 끊은 사람들이긴 하다.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글의 소재는 광고 업계의 불문율인 3B와 비슷하다. 3B는 Baby (아기), Beauty (미인), Beast (동물)이다.
그래서 글밥도 없고 내용도 시원찮은 셀카에 '좋아요'가 쏟아지고, 반려동물이나 아기 에피소드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글로써 승부를 본다면 여행, 책, 예술, 요리 그리고 역사나 미담을 더해도 좋을 것 같다. 다만 거부감이 들 정도로 현학적이거나 전문적이어서는 곤란하다. 자부심까지는 괜찮은데 오만이나 자랑으로 느껴져서는 실패다.
사실 그런 글은 잘 쓴 글도 아니다. 스며들지 않고 겉도는 글은 논문이나 학술지에 실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글은 쉽게 읽히는데 가볍지 않은 글이다.
얼마전 읽은 백건우 님의 마을 최고령 어르신 부고와 얽힌 사연이 좋았다. 두어번 다시 읽었다. 오랜만에 MBC라디오 <고향의 소리를 찾아서>를 듣는 것 같았다. 그 방송도 그렇고 글도 마찬가지인데 나름의 이유를 짚어볼 수 있다.
첫번째는 민요가 됐건 어르신의 소사(小史)건 관심이 없으면 채득할 수 없는 내용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자식조차 귀담아 듣지 않았을지 모르는 마을 어르신의 일생을 인터뷰한 것은 가신 분께도 크나큰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 자체로도 훌륭한 일이다.
두번째는 대단하다고 엄지척할 거대담론이 아니고 이웃의 소소한 이야기라서 오히려 대단하다는 것이다. 앞서간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이고 이웃의 이야기이자 우리 이야기다.
민초의 숭늉같은 이야기다. 그래서 그 속에서 역사의 의미, 삶의 진정성과 지혜가 계속 우러나오는 것이다.
세번째는 그다지 어렵게 쓰여진 글이 아니라는 점이다.
무슨 뜻이냐면 정성껏 마음을 다해서 듣는 것만으로 이미 글을 쓴 것과 진배없다는 뜻이다.
사실은 그게 무척 어렵다. 진심이 있어야 하고 애정이 담겨야 한다. 듣는 귀만 열어놓고 있어도 글 절반은 쓴 것이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게 어렵다고 하지 않는가.
무릇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들을 줄 아는 사람이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도 어릴적 외할머니 무릎을 베고 들었던 흉년 든 해의 이야기에서 배태(胚胎)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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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5일) 우리 마을에서 최고령이신 박기빈 어르신이 돌아가셨다. 나이로는 자식뻘이 되는 나도 어르신과 가깝게 지내며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세월은 무상해서, 마을의 지혜로운 어른들이 돌아가시면, 살아 있는 역사가 사라지는 듯해 안타까운 마음이다.
박기빈 어르신 생전에 구술사 인터뷰를 했는데, 아래 그 자료를 올리며 새삼 박기빈 어르신을 추억하고,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정배리 박기빈 구술사
내 이름은 박기빈이고, 나이는 아흔 둘이에요. 태어난 건 1930년 겨울이고,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 광암리( 지금은 경기도 하남시 광암동으로 바뀌었다.)에서 태어났어요. 네 살이 되어서 여기 정배리로 왔어요. 아버지 고향이 여기였어요. 할아버지 때도 정배리에 계셨으니 오래 되었어요. 할아버지 얼굴은 몰라요.
어릴 때 기억은 그다지 많지 않아요. 농다치 고개로 걸어다니고, 쌀 한 말이라도 사려고 양평장을 보려면 걸어서 농다치 고개를 넘어 다녀야 하고, 여기서 사는 동안에 서루(써레)도 못 쓰고 밟쌀미하는 논두랭이 (논이 좁고 길거나 작아서 써레가 들어가지 못해 손으로만 모를 내야 하는 논) 그거 해 먹느라고 고생 많이 했어요.
결혼을 일찍했어요. 열여섯. 해방되던 해에요. 아내는 문호리 사람이에요. 문호리 갈맬이 고향이에요. 자식이 열 남매인데, 지금 현재로는 사남 일녀에요. 첫 딸은 세 살 먹은 걸 업고 피난 가서 잃어버렸어요.
그때는 정배학교가 간이학교였어요. 2학년 다니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공회당에서 공부를 배우고, 안재성 교장선생님에게 종아리 맞아가면서 배웠어요. 지금도 그 선생님한테 더 맞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배학교 마당에 세운 안재성 교장선생님이 좋은 일을 많이 하셨어요. 은행나무도 마을에 심고.
안 교장선생님 양복을 맞춰 드렸어요. 그분이 워낙 청렴하신 분이라 받지 않으실 거 같아서, 선생님이 사시는 싸릿골에 가서 몰래 저고리 치수를 알아가지고 맞춰 드렸어요. 그때 찬조를 받은 사람이 119명이에요. 그때 돈으로 6만 2천원. 돈을 가장 많이 낸 사람이 명달리 김주홍 씨에요. 다른 사람들은 보통 5백원. 그게 이제 63년 전 일이에요.
전쟁 (한국전쟁, 6.25전쟁으로도 부르며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침략으로 시작되었다.) 나고 스무 살 무렵에 군대 갔어요. 국민병 (1.4후퇴 때 정식 군인이 아닌, 민간인을 대상으로 예비 병력을 확충하기 위해 젊은 사람들을 소집했다. 만17세 이상 40세 이하의 남성을 대상으로 했다.) 으로. 1.4후퇴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협공으로 아군이 남쪽으로 밀려 후퇴하던 시기의 시작.) 때는 여기서 걸어서 문경새재를 넘었어요.
웃말 부락에 피난민들이 여기도 많이 왔어요. 나중에 북진할 때 알아보니 군인 장교들 가족이 많았어요.
북한 패잔병들은 저 아래 싸릿골로 해서 명달리 쪽으로 넘어갔어요. 그때 우리 마을에서도 두 사람이 북한 패잔병들에게 잡혀서 끌려가고 있었는데, 여기서 계속 끌려가다간 죽을 것 같아서 죽을 둥 살 둥으로 명덕골 고개에서 구르듯이 도망 내려오기도 했어요.
우리는 여기 학교 앞산에 흙구덩이를 파고 엠원(M1)총을 쏘면서 북한군 패잔병들하고 교전도 했어요.
군대 가서 금화고지에서 전초 중대로 나갔다가 문을 해닫고 전부 지뢰매설을 하고 했는데, 하루는 중대장이 불러요. 중대장실에 가서 이야기를 하는데, 생전 처음 중공군의 곡사 화력을 받았어요. 싸리문을 해닫고 그 밖으로 나가면 아군이라도 총을 쐈어요.
중공군이 쳐들어오니 중대장이 먼저 도망을 하고, 겨울에 철원 금화고지에서 전화선으로 동아줄을 틀어서 만들어 눈이 산더미처럼 쌓인 산을 내려왔어요. 그러다 동상에 걸렸어요. 발, 손 전부 동상에 걸렸는데, 의무대에서 전부 자르라고 했어요.
나는 싫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자꾸 후송을 거듭해서 경남 시청까지 후송이 되었어요. 원호대에서 휴양을 하다, 내가 처음 국민병 들어가서, 주먹밥이 그리워서 지원을 했지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나 훈련받던 곳으로 와서 다시 심사를 받아야 했는데, 군의관들이 와서 손발을 구부렸는데, 그곳에서 명예제대, 의가사제대를 했어요. 그때가 1954년일 거에요.
그리고 바로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그 뒤로는 줄곧 여기 정배리에서 살았어요.
군대 갔다와서 민병대 교관으로도 일했어요. 서종면에 민병대 분회를 지었어요. 그때는 경찰들도 꼼짝 못했어요. 지금 문호리 버스 종점 있는 자리에요. 정배리에서 민병대를 가르치기도 했어요. 민병대는 마을 주민들이었는데, 우향우, 좌향좌, 총 쏘는 법 같은 걸 가르쳤어요. 나보다 나이가 열 살 많은 사람들도 가르쳤어요.
친구하고 같이 약장사도 했어요. 차에 놓고 파는 약인데, 협회에서 허가증을 내주면 설악으로 어디로 다니지 않은 곳이 없어요. 마당에서 괭가리를 치고, 정옥환이니 뭐니, 바르는 약이며 팔았어요. 그런데 돈이 안 되었어요. 외상을 주고 그러면 돈을 못 받아서 돈을 벌지 못했어요.
사발다랭이 논이었어요. 벼를 열 섬만 해보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버님이 소 두 바리로 하는 논 갈고 밭 갈고 하는 걸 못하셔서 증조부님에게 천대를 무척 받았어요. 그래서 이걸 내가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열여섯 살에 장가를 들었는데, 그때부터 남의 집에 ‘신일’을 다녔어요. 힘든 일을 ‘신일’이라고 해요. 남의 논 갈아주고, 밭 갈아주는 일을 다녔어요. 논밭을 갈아줄 때 연장을 걸어주는 걸 할 줄 아는 사람이 해수 할아버님 밖에 안계셨어요. 나중에 내가 연장을 걸었어요. 정배리에서 두 바리로 가는 게 없어지고, 한 바리로 가는 가달뱅이 연장, 소 한 바리로 가는 연장을 내가 가장 먼저 만들어 썼어요.
설악면 묵안리, 돗자리를 잘 쳐서 시집갈 때 돗자리를 가져가는데, 돗자리가 송아지 한 마리 값이었어요. 그 동네는 내가 만드는 연장을 몰라서, 내가 직접 만들어서 가져다주니까, 답례로 돗자리 하나를 받았어요.
새마을운동 시작하면서 정배 1리, 2리가 나뉘었어요. 마을마다 똑같이 지원을 했는데, 마을을 둘로 나누면 지원금이 두 배가 늘어나니까, 그때 나눈 거에요.
새마을사업으로는 지붕 개량, 초가집이었는데, 구구각색으로 돌기와로도 하고, 슬레이트 지붕으로도 했어요. 그때 당시 슬레이트로 한 집이 가장 좋았어요. 그때 슬레이트 지붕은 지금까지도 끄떡없어요. 그 뒤로는 슬레이트 품질이 나빠져서 잘 깨지는데, 옛날에는 좋았어요.
정배리에 전기가 들어온 건 1974년 겨울이에요. 서종면에서 가장 먼저 전기를 끌어온 게 정배리에요. 왜정 때 서종면을 발전시킨 분이 백남학 면장이었어요. 길을 닦으려면 일본의 승인이 있어야 하는데, 일본이 도장을 찍어주지 않았어요.
백남학 면장이 상부에 말하기를, 나무 한 그루에 10원할 것이, 길이 나면 100원 할텐데, 수만 그루가 서종면에서 썩고 있는데, 왜 길을 내지 않느냐고 했더니, 일본놈이 무릎을 치면서 ‘나루호도’라고 했대요. 그래서 그때 사람들이 모두 돌을 깨고 흙을 날라서 길을 만들었어요.
옛날부터 우리 마을에서는 개울물을 먹었어요. 곳곳에 샘물이 나오는 곳이 있어서 그걸 먹고, 바가지 우물 (바가지로 퍼 올릴 정도로 작은 샘물) 에서 나오는 물을 먹었어요.
우형 아버지가 양평에서 소를 사다 먹였는데, 나보고 소장수를 해보자고 해서 그때부터 소장수를 시작했어요. 나이가 오십 중반이었어요.
쉰 살 넘어서 소장사를 할 때, 송아지 한 마리에 2만원 (국가기록원 자료에 의하면 1967년 10월 송아지 한 마리 가격은 21,700원이었다.)
도 안 갔을 때에요. 송아지를 사서 설악면으로도 가져다주고, 마을에도 주었는데, 새끼를 낳아 팔게 되면 본전을 치지 않고 반씩 나눴어요. 설악면 묵안리, 방일리, 가일리 등에 줬어요.
소장수를 그만두기 직전에는 소 중계사 회장도 했어요. 중계사가 많을 때는 70명이 넘었어요. 환갑되기 전해에 그만 두었어요. 양평 우시장은 지금 농업고등학교(양평고등학교) 옆에 있었어요.
우형기(저울)이 등장하고, 소를 무게에 따라 값을 매기기 시작하면서 중계사가 사라졌어요. 소개비(거간비)가 나가지 않으니 농민들도 좋아했지요.
양수리에서 장을 보려면 하룻밤 잠을 자야했어요. 장이 새벽 3시부터 시작했어요. 서울에서 단골로 소를 싣고 다니는 차가 오면 내가 어느 여인숙에 있을테니 태워달라고 부탁하고, 차를 타고 양평으로 갔어요.
그때는 여인숙에 계약을 해서 일년에 쌀 두 가마를 주었어요. 5일마다 여인숙에서 잠을 자야 했으니까. 양수리 우시장도 컸어요. 지금 양수리 굴다리 밑에 우시장이 있었어요.
서울로 소를 팔러 갈 때는 ‘채꾼’이라고 있어요. 채꾼에게 소를 맡기면, 채꾼이 도농삼거리 근방에 소를 먹여서 내보내는 집이 있어요. 거기서 새벽에 길을 떠나 마장동에 도착해요. 채꾼은 소를 붙들고 소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요. 채꾼은 소가 팔려야만 돈을 받을 수 있어요.
운이라는 게 있어요. 언청이가 한 사람 있었어요. 비치 고개 아래 언청이가 살았는데, 아편중독자인줄은 몰랐죠. 거기서 자주 쉬어가곤 했는데, 돈을 전대에 차고 다녔어요. 전대는 칼로 그으면 금방 잃어버리니까, 전선을 넣어서 전대를 만들어요.
내가 소장수를 그만 두자마자 사흘만에 가평 경찰서에서 찾아왔어요. 알고보니 그 언청이가 용천 갈고개에서 사람을 죽인 거에요. 경찰이 제일 먼저 수사하는 사람은 노름꾼이에요. 경찰에는 노름꾼 명단이 다 적혀 있어요. 그 사람들부터 추적을 해요.
옛날에 가난하게 살아서 쌀 열 섬만 하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해서 소장수해서 돈을 벌어 정배리에서 제일 좋은 논을 샀어요. 산골다랭이 고개 밑에 있던 논부터 다해서 120가마까지 농사를 지어봤어요. 그때만 해도 소 두바리 가지고 농사를 지었어요. 내가 가래를 만들어서 가래질로 논을 풀었어요.
여기는 소동점, 대동점이 있는데, 그게 구리가 나서 그런 이름이 생겼어요. 그런데 구리가 나오긴 나오는데, 인건비도 나오지 않는데요. 서후리에도 구리가 나고, 여기도 구리가 나오는데, 돈이 안 돼서 철수했어요.
서후리는 장사가 났을 때 회가루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서후리에서 나와요. 서후리에서 회를 구워서 장사가 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서후리로 회를 받으러 왔어요. 명달리에서도 오고, 서종에서는 다 서후리로 와서 회를 받아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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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가 박기빈 어르신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