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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군인의 아내 백영옥
백씨는 1948년 12월 평안남도 순천에서 철공소를 하던 백원식의 6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가족은 6.25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피난 내려왔다. 1962년 봉래국민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부일장학상’을 받아 경남여중에 진학했다. 경남여고에서 방송실활동을 하면서 그리그의 ‘페르귄트 조곡’ 중의 ‘솔베이지’와 드보르작의 ‘신세계’ 2악장을 즐겨 틀었다. 고려대 법학과에 진학하여 김해여고 출신 조한선을 통해 육사를 졸업하고 월남전에 참전 중이던 오랑을 알게 되었다. 부산, 영주동의 집이 도시개발계획에 걸려 온가족이 거리에 나앉게 되면서 서울에서의 대학 생활은 1학기 만에 끝났다. 부산에 내려와 살던 중 부산대 간호학과에 입학하였다.
월남전에 참전 중인 오랑과 편지가 오가고 사진을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리기 시작했다. 편지를 부치고 1시간도 못되어 못한 말이 생각나 책상에 앉아 또 편지를 쓰고, 하루 3통씩 써서 보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며 백씨의 많은 시간은 오랑을 위해 헌정되었다. 밥을 먹을 때나 책을 읽을 때나 거리를 걸을 때까지 오랑의 생각으로 점점 채워졌다.
그이의 얼굴이 온통 내 시야에 밟혀서 나는 나쁜 생각도, 약한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이가 항상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소원대로 그이는 무사히 귀국하였고 부산의 한 다방에서 처음 얼굴을 마주했다.
- 자서전에서
오랑이 월남에서 귀국하여 근무하게 된 곳은 영천에 있는 육군 제3사관학교였다. 오랑은 주말이면 어김없이 부산으로 왔다. 두 사람은 범어사. 표충사. 해인사. 동화사를 순례했고 태종대. 팔선대. 에덴공원. 을숙도 등을 자주 찾았다.
그이는 무척 정중했고 모든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여자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난 거 같아 혹시 바람둥이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으나 그이의 천성이 바르다는 것을 알고는 미안한 느낌을 속으로 숨겼다. 가야산에서 내려올 때 그이는 들꽃을 꺾어 내 셔츠 주머니에 잔뜩 꽂아 주었다. 어린 날 동화 속의 여왕이 된 기분이었다.
- 자서전에서
두 사람이 표충사 앞, 허름한 여관에서 처음으로 1박을 하던 날, 여관 입구에서 백씨는 오랑으로부터 ‘방 한 가운데 장벽을 치고 절대 상대의 영토는 침범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별 말이 없어도 모든 것이 눈빛 하나로도 통할 때 즈음 오랑은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를 읊조렸고 육사에서 만들어지는 빨강색 루비가 박힌 18금 ‘보온 반지’를 자신의 주머니에서 꺼내 백씨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처음 김해에 가던 날, 그이는 화장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나는 처음 뵙는 그이의 부모님께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아침부터 미장원에 들러 생머리에 컬을 넣었고 엷게 화장도 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서 있는 거울 속의 내가 어색했지만 성숙한 여인의 티가 나야 며느리로 맞아 줄 것 같아 나름에는 만족하며 갔다. 아담하고 깨끗한 삼정동 시댁에는 많은 분들이 계셨다. 막내며느리 감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주위의 친척 분들이 다 오신 듯 했다.
- 자서전에서
1972년 12월 23일 두 사람은 결혼하였다. 오랑은 육사 동기들 중 55번째로 결혼을 하였고, 대전에서 시작된 그들의 작은 신혼 방에는 동기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잠자리에 들 시간에도 동기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밖에서부터 큰 소리로 ‘오랑아 호랑아’하고 불러댔으며, 깜짝 놀란 우리 부부는 죄짓고 들킨 사람들처럼 멋쩍어하며 그들을 반겼다. 워낙 작은 살림이라 동기들이 그렇게 다녀가고 나면 우리 부부가 먹을 식량 보름치가 사라졌지만 그 시간들은 행복이었다. 노래를 시키면 나는 불렀다. ‘눈을 감으면 저 멀리서~’
- 자서전에서
1977년 오랑이 소령으로 진급할 무렵 유신사무관(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할 때 군대를 예편하면 3급 공무원직으로 발령)제도가 생겼다. 오랑이 아내에게 선택권을 주었을 때 백씨는 ‘당신은 군인입니다. 생명이 다 할 때까지 참군인의 길을 걸으실 분이죠’라고 대답했다.
1978년 12월 오랑은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장교들이 특전사로 오래 복무하다가 육군대학을 마치면 통상 후방 지역에서 편한 보직을 맡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오랑은 다시 특전사 복무를 요청했다. 시력장애로 2세 가지는 것도 미루고 있던 아내의 치료를 위해 수도권에 있는 특전사로 다시 원복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1979년 3월 오랑은 특전사령관 정병주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다. 1967년 공수단장을 거쳐 1974년 사령관으로 돌아온 정병주는 대한민국 특전사의 체계를 완성한 인물이다. ‘특전사의 전설’로 존경받던 정사령관 역시 무인의 길만 고집했던 인물로서 오랑과 성향이 같았다. 특전사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를 가장 먼저 알고 이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비서실장의 역할이 매우 큰데 오랑은 그런 정치적 역할에는 익숙지 않은 야전 군인이었다. 사령관의 비서실장은 분에 넘치는 사치였을 수 있었으나 사령관은 그런면의 오랑을 오히려 더 높이 평가했다. 당시 특전사 작전과장으로 지휘통제실 상황실장을 맡았던 박중환씨(육사 20기·당시 중령)는 오랑을 '예의 바르고 똑똑한 후배, 인맥 관리보다 임무 완수에 철저했던 비서실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의 행적은 사령관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특전사령관으로 상징되는 특전사를 보위하기 위한 임무였다고 평했다.
백씨의 시력은 점점 더 나빠졌고 오랑의 도움이 없이는 외출도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운명의 12월 12일 밤을 맞았다.
1979년 12월 12일 저녁 “오늘 저녁도 못 들어갈 것 같아. 미안해.”하며 급히 끊었다. 그 말뿐이었다. 내가 몇 마디 말하기 전에 남편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런 식의 남편 전화를 나는 결혼이후 단 한 번도 받은 적도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한 ‘미안해’라는 말이 계속 귓전에서 맴돌았다.
- 자서전에서
12.12 군사 반란의 성패는 수경사와 특전사를 조기에 제압할 수 있느냐의 여부였다. 당시 수도권에 주둔했던 부대 중에서 쿠데타에 대처가 가능한 부대는 수경사와 특전사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에 전두환이 대한민국 특전사령관에 대한 제압을 지시했다.
12월 12일 저녁 제3 공수여단장 최세창(하나회) 준장이 사령관을 회유하려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최세창이 돌아간 지 10여 분 뒤 체포조가 난입했다. 당시 다른 장교들, 심지어 자신이 모시는 장군을 목숨 바쳐 지켜야 할 전속부관이 포함된 대부분의 장교들이 신군부 측에 회유당해 피신했고 하나회에 속한 육사 동기들로부터 피신하라는 연락을 받았던 오랑은 8발이 들어있는 권총 한 자루를 들고 사령관을 지켰다.
13일 0시 30분 신군부의 지시를 받은 완전무장 특공대원 10여명이 정장군을 끌고 가기 위해 비서실의 잠긴 출입문을 발로 차고 손잡이에 총격을 가했다. 벌어진 문틈 사이로 교전이 오가고 오랑은 6발의 흉탄을 맞고 현장에서 전사했고 정 장군은 손에 부상을 입고 끌려갔다. 체포조들에게도 많은 피해가 있었다.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목이 타는 갈증이 생겨 물을 마셨다.
그 소리가 그이의 가슴에 탄환이 박히는 소리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가슴이 터지는 통증이 왔다.
남편은 어마어마한 운명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
내가 한없이 저주스러웠다.
- 자서전에서
백씨는 불길한 예감에 다음날 아침부터 오랑의 안부를 알기 위해 백방으로 다녔으나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사흘이 지나 김해에서 올라 온 가족들이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전해주었다. 전두환의 보안사에서는 오랑의 장례식을 가족장으로 치르도록 했다.
그곳이 장례식장이라고 누군가가 옆에서 말해주었다. 작은 단 위에 촛불과 과일이 놓여 있었다. 그 중앙에 어떤 남자의 초상화가 검은 리본에 싸여 있었다. 힘없이 주저않으며 다시 사진을 쳐다보았다. ‘왜 당신 사진이 여기에 놓여 있어요?’ 속으로 수없이 물었으나 입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눈앞에 크게 다가서는 남편의 초상화를 보자 또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팔과 다리를 주무르며 정신 차리라고 하였다.
시댁 어른들이 시신을 확인하고 통곡했다. 그이가 보고 싶어 여러 번 관이 있는 쪽으로 가려 했으나 나는 가족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친 듯이 절규하는 내게 누군가가 흰색 저고리 치마를 가져와 입혔다.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옆에서 절을 하라 하면 절을 하고 앞으로 나가라 하면 앞으로 나갔다. 관이 옮겨지는 것이 보였다. 벽제 화장터까지 갔다. 그이의 이름이 쓰인 흰 종이가 붙어있는 하얀 상자를 가슴에 안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안에서는 “서벅서벅” 마치 바람 같은 소리가 났다. 내 품 안에서 상자를 기울이는 대로 내 남편이 나에게 말하는 통곡 소리였다.
- 자서전에서
오랑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들은 여전히 관사에 머물고 있었지만 백씨에게는 장교 관사에서 퇴거하라는 지시가 왔다. 그러나 백씨는 갈 곳이 없었고 갈 수도 없었다. 관사에 계속 머물면서 끈질기게 오랑의 죽음을 파고 다니며 그의 유골함을 안고 미친 듯이 몸부림치는 숱한 날들을 보냈다.
백씨는 그날 비서실에서 근무한 당번병을 집으로 불렀다. 가슴과 배에 6발의 총탄을 맞은 오랑의 몸에서 분수처럼 터지는 피를 등에 적시며 의무실까지 업고 뛰었던 당번병은 상관들의 함구령 속에서도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고 사건이 있기 며칠 전에도 부부 동반으로 식사를 나눈 이웃집 박종규(하나회)가 사령관을 잡아가기 위해 휘하의 특전대원 10여 명을 이끌고 오랑에게 총격을 지휘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만나주지 않는 박종규의 문 앞에 서서 몇 시간을 기다리다가 얼어붙은 몸을 돌려 다시 집으로 오던 날, 끝없이 내리던 눈 속에 쓰러졌다. ‘이대로 얼어버리자. 이대로 눈 속에 얼어서 나도 눈이 되어 버리자.’ 그때 지프차 한 대가 불을 밝히며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지프차의 헤드라이트에 하얀 눈이 어지럽게 흩날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흩날리는 흰 눈이 남편의 유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유골이 온 천지에 하얗게 내리는 것이리라.
그대 가슴 속에 묻히고 싶나니,
흰 유골 가루여 내 몸이 보이지 않도록 계속 뿌려다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관사 안방에 누워있었다.
- 자서전에서
결국, 백씨는 박종규를 만났다.
평상시 같으면 ‘아이쿠 제수씨’하며 반갑게 대했겠지만 그날의 만남은 그렇지가 않았다.
‘당신이 어떻게 후배의 가슴에 총탄을 박을 수가 있습니까?’
‘김 실장은 대세의 흐름을 모르고 저항했기 때문에 그 같은 변을 당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충성을 외쳤던 당신의 상관에게 어떻게 장교인 당신이 군화 발질과 총을 쏠 수 있습니까?’
‘난 군인이니까 명령대로 한 겁니다.’
‘군인이 반란 일으키라는 걸 명령대로 하나 보죠?’
- 자서전에서
이 짧은 대화를 끝으로 박종규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러나 이 대화 속에는 1212 군사 반란의 실상이 담겨 있다.
박종규의 상관은 충성을 맹세한 특전사령관이 아니라 하나회 선배 전두환이었고 오랑은 대세를 모른채 자리를 지킨 하나회 비회원이 이었다. 조폭이 시킨다고 자기 아비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저항하는 동생을 죽인 패륜아가 하나회였던 것이다.
1980년 2월 29일에 백씨의 목숨을 건 항의로 오랑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나는 그대의 무덤가를 다녀오네.
구름이 떠서 비가 내려 내 얼굴을 적시고
몇 송이의 꽃을 그이의 비석 앞에 바치고
나는 훌훌히 떠나는 파랑새가 되어
그대 곁을 떠나온다네.
그대여 안녕, 안녕…
발길을 돌리기 어려운 그대의 무덤 앞에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어 운다네.
- 자서전에서
1980년 5월 광주에서 특전사에 의한 민간인학살이 자행될 때 백씨는 고향 부산으로 갔다.
초여름의 비가 내렸다. 아주 처절하게 얼룩지는 아파트, 내 인생의 마지막을 살았던 거여동 관사를 뒤로하고, 그이가 묻혀 있는 서울을 뒤로하고 나는 부산으로 향했다. 앞으로는 세상 어디에서도 다시는 나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가슴에 품은 날이었다. 부산역에 내렸을 때 가족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조카의 모습도 희미했고 길이 흔들리고 집 대문이 넘어지고 계단이 허물어져 내리고 집의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너무 놀라 고함을 쳤다. 어지러웠다. 이미 그때 나의 시력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져 가고 있었고 나는 친정집에서 문을 잠그고 두문분출 하였다. 온 세상이 아득하게 보였으며 떠드는 방송매체도 모두 듣기 싫었다. TV 총소리는 나로 하여금 곧잘 까무러치는 전율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날 이후 나는 TV를 틀지 않는다.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어깨 위로 풀어 놓은 채 책상에 엎드려 며칠이고 있었고, 거울 앞에서 몇 시간이나 의식 없이 앉아 있었다. 사인펜으로 글씨를 썼다. 크게, 크게, 좀 더 크게 써야만 내가 쓴 글씨를 가늠할 수 있었다. 만원과 천원 지폐도 눈으로 구별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안과에서, 맹인이 되어 맹아를 지도하고 있는 권 선생님을 소개시켜 주었다. 맹인에 대해서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그를 만났다. 병원에서는 절망적인 얘기를 했다.
정신적인 충격에서 시신경의 마비가 온 것이라고 했다. 운명이 부딪혀온 것이었다. 깊은 절망감 몸을 떨었다.
- 자서전에서
백씨는 부산에 내려와 시력을 완전히 잃고 매달 30만원의 연금에 의지하며 살았다. 교도소 교화사업을 하던 영도 봉래산 미룡사 주지 정각스님으로부터 2년간 전화법문을 받았다.
1983년 스님의 권유로 부산시 영도구 영선동의 자비원에서 사회봉사를 시작했다. 자비원의 후원은 그날그날 근근이 먹고 사는 20~30명으로부터 2-3천원의 후원을 받아 절반은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기금으로 쓰고 나머지는 연말에 회원들과 함께 나환자촌, 고아원, 양로원 등을 방문하는데 썼다. 자비원이 알려지면서 봉사를 넘어 많은 사업도 벌였다. 우선, 교육 사업부터 시작하였다. 일반 사람들을 상대로 한 취미생활과 교양강좌가 주 사업이었다. 처음에는 기타 강습이 있었다. 가야금과 장구, 단소 등으로 악기의 종류를 바꾸고, ‘고전 춤’, ‘살풀이’ 등을 강좌 하였다. 또 예절 프로그램에는 예절 강의와 다도(茶道)를 반드시 포함시켜 아가씨, 신부(新婦), 부인 등 전반적으로 여성이 지켜야 할 예절을 강의했다. 어린이 레크리에이션으로는 지능개발을 위한 바둑 교실을 개설하였다. 부산의 시조창 대가 김영봉 선생을 모셔 시조창 강좌도 개설했다.
‘자비의 전화’ 상담은 남녀, 부부, 고부(姑婦) 간의 문제들을 처리하는데, 어떤 때는 ‘자살하겠다.’는 협박성 전화도 오고 상담 선생님의 목소리가 예쁘다면서 한 번 만나 보자는 등의 장난 전화가 걸려오기도 한다. 그런 때일수록 감정의 동요 없이 잘 처리해 내야 한다.
- 자서전에서
1988년 8월 31일 정 장군이 부인과 함께 자비원을 찾아와 위스콘신 대학 경영학과 조교수인 큰아들 정승환이 쓴 박사 학위 논문을 주고 갔다. 논문의 서문에는 '고 김오랑 소령을 추모하여'라는 글이 들어 있었다.
1988년 12월, 국회 12.12 청문회에서 정 장군은 부하들의 비열한 배신을 증언하였다. 이를 계기로 12.12 군사 반란에 대한 세인의 이목과 더불어 신군부의 죄상이 공개되기에 이른다.
1989년 3월 4일 야인으로 살던 정 장군은 경기도 송추 유원지 야산 중턱에서 나무에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국립묘지 정병주 장군의 묘비 기단의 까만 묘지석은 '백비'다. 아무 글자도 적혀 있지 않다.
1989년 10월 정 장군의 죽음에 다급해진 백씨는 남편의 명예 회복과 사건의 정확한 진상규명을 위해 "김 소령에 대한 1계급 특진서훈 및 보상을 요구하는 청원"을 국회에 냈다.
1990년 1월 22일 평민당 당사를 찾아 김대중 총재에게도 김소령의 특진을 요청했다.
1990년 2월 1일 10년여 신군부에 협조하지 않아 반역사적 인물로 평가되어 거론조차 금기시되던 오랑에 대해 국방부는 ‘민원인(백영옥)의 요구’라는 단서를 붙여 중령 진급을 추서했다. 국방부가 추진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990년 6월 김영삼의 3당 합당으로 탄생한 (꼬마)민주당이 인재영입 대상으로 백씨와 접촉했다. 당시 부산의 (꼬마)민주당에는 前대통령 노무현이 있었다.
1990년 12월 백씨는 장기욱 변호사를 통해 신군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기로 한다. 그것은 신군부를 향한 최초의 법적 대응으로 상징성이 컸다. 그로 인해 백씨는 보안사. 안기부(현 국정원) 등 권력기관의 많은 감시와 압력을 받았다.
1990년 12월 10일 오랑의 추모일 이틀을 앞두고 백씨는 소송을 바라지 않는 세력에 의해 병원에 강제 입원되었고 가족의 면회도 차단되었다. 이 일로 국민적 관심이 커지자 12일 만에 풀려났다.
1990년 1월 22일 부산 해동병원에서 퇴원하던 백씨는 “며칠 쉰 후 외부 압력에 의해 유보해왔던 12·12사태 핵심주역 6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다시 준비하겠다.”고 언론에 말했다.
1991년 1월 오랑의 육사 동기 권경석(하나회)이 유신 사무관으로 자비원과 마주 보는 영도구청의 구청장으로 발령받아 왔다.
1991년 6월 28일 밤 전두환. 노태우. 최세창. 박종규 등에 대한 민사 소송 직전, 그녀는 사망했다.
그날은 독일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눈 치료를 다시 시작하기 1주일 전이었다. 경찰은 백씨가 한 번도 혼자 올라가 본 적이 없는 자비원 3층에서 허리높이의 폭 50cm 난간을 뛰어넘어 ‘실족사’했고 사건의 목격자는 없다고 발표했다.
국민묘지에 오랑과 합장 되었어야 할 백씨의 유골은 영락공원 무연고 납골당에 10년간 보관되었다가 산골터에 뿌려져 이젠 흔적도 찾을 수 없고 백씨의 가족 중 아무도 백씨의 유골을 챙기지 않았다.
1995년 2월 28일 김영삼 정부의 법원은 전두환, 노태우 등의 신군부 핵심 인사들을 12·12 사건에서의 반란 혐의로 구속 기소하면서 12.12가 ‘하극상에 의한 군사 반란’이라고 명백히 규정했고 전두환을 ‘내란집단의 수괴’로 판결했다. 그들에게는 서훈 취소와 훈장 치탈 결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훈장을 반납하지 않았다.
특전사에 난입한 특공대원들은 “우리는 간첩을 잡으러 가는 줄 알았다.”고 증언하였고, 세월이 흘러 12.12가 군사 반란으로 규정된 후 “목숨까지 걸고 충성한 군대 생활이 허무하다.”며 하소연하였다.
2009년 12월 9일 박종규는 군사 반란 30주기를 앞두고 ‘김오랑 중령 추모회’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12.12의 과실은 없고 우리 둘(박종규, 나영조)이 항암에 지쳐 누워있으니 이제 우리 둘 모두 용서해주시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 주십시오.”라며 “나는 완전한 패배자”라고 주장했고 그 이듬해 2010년 12월 7일 후두암으로 사망하였다.
2014년 1월 14일 오랑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추서하는 권고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그 권고안은 안영근. 김정권. 민홍철 등 3명의 국회의원에 의해 지속적으로 발의되어 결국 민홍철 의원에 의해 통과되기까지 오랑의 육사 동기들은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았고 특전사 연병장에서 가진 오랑의 유가족과 김해 활천동 주민자치 위원회와 함께한 기념식에도 그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훈장은 활천동 주민자치센터 민원실에 전시하고 있다.
[백영옥을 실화로 세상에 나온 작품들]
1988년 4월 - 자서전 ‘그래도 봄은 오는데’ 백영옥
1991년 12월 – 소설 ‘12월의 여인’ 박명희
1998년 11월 – 연극 ‘4,000일의 밤’ 박상현
2012년 1월 – 소설 ‘눈먼 이의 수기’ 조돈만 (21세기문학상 수상)
김해인물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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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랑 (정해인 분)
정병주 (정만식 분)
2찍들의 정신병 때문이죠.
똥통에서 구를 거면 자기집 똥통에서 구를 일이지, 멀쩡한 나머지 대한민국 사람들 인생까지 똥통에 담그면서도 오히려 적반하장이니...
특히 아버지는 전두환이 정치,경제 잘했다고 두둔하는 분이신데, 이번에 좀 각성하셨으면 좋겠어요;;
사실은 김오랑과 정해인의 모습이 놀랍도록 닮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