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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Henri de Toulouse-Lautrec
1864년에 태어나 36년의 짧은 생을 살다 간 프랑스 화가.
'드 de'는 '~가문의'를 의미. 따라서 로트렉은 귀족 가문의 자제.
로트렉의 부친은 백작이고 모친도 귀족 가문 출신.
당시 유럽 귀족 가문의 특징은 근친혼. 부와 권력을 자기들끼리 독점하기 위해 친인척간에 결혼.
로트렉의 경우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자매 지간.
건강한 유전자를 갖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최대한 다른 유전자와 결합하는 것인데 정반대로 했으니 그 결과는 유전병.
로트렉도 유전병을 갖고 태어남. 농축이골증이라는 병으로 뼈의 돌연변이로 인한 왜소증.
신체는 152cm에서 성장을 멈췄고 얼굴과 생식기만 정상적인 성인의 형태를 유지.
백작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부친은 로트렉에게 큰 기대를 걸었으나 기형적인 모습으로 인해 어떻게든 감추고 싶은 아들이 됨.
말을 타고 사냥하며 귀족 가문의 후예다운 교육을 받으며 성장해야 했는데 계속 병치레.
자신을 향한 부친의 외면과 혐오를 감내해야 했던 로트렉의 탈출구는 그림 그리기였음.
또 다른 버팀목은 모친의 깊은 사랑.
아버지에게 심리적으로 버림받은 아들을 직접 가르치고, 그림 그리는 것도 적극 지원.
귀족 가문의 정상적인 일원이 될 수 없는 것을 깨닫고 자기만의 길을 걷기로 함.
그림 공부를 더 해서 화가가 되고자 17세에 집을 떠나 파리로 감. 당시 파리는 유럽 미술의 수도. 화가들의 스튜디오가 널려 있었음.
코르몽 스튜디오에서 견습 화가로 커리어를 시작. 그 무렵에 동료로 만나서 자주 교류한 화가가 빈센트 반 고흐.
후기 인상주의로 분류되는 로트렉의 화풍을 보통 고흐의 컬러링 테크닉 + 드가의 주제 +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絵)의 조합이라고 평가.
우키요에는 에도시대 중.후기에 유행한 풍속화. 당대의 일상생활 모습, 풍경, 풍물 등이 주제인데 특히 니시키에(錦絵)라고 하는 다색 목판화가 유명.
화가로서 어느 정도 커리어 쌓이자 몽마르뜨에 개인 스튜디오를 오픈.
당시 몽마르뜨에는 화가 스튜디오뿐만 아니라 고급 카바레, 카페, 바, 사창가 밀집.
풍차로 밀을 빻는 제분소도 그곳에 있었는데 누가 인수해서 고급 카바레로 바꿈. 멀리서도 눈에 잘 뜨이게 건물 위에 있는 풍차를 빨간색으로 칠함. 지금까지 명맥이 이어지는 물랑루즈(빨간 풍차) 카바레는 그렇게 탄생.
카바레끼리 홍보전이 치열했는데 물랑루즈 측은 홍보 포스터 제작을 로트렉에 의뢰.
로트렉은 홍보 포스터 디자인의 전범이 될 만한 새로운 포스터를 만듦. 로트렉의 포스터는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물랑루즈는 대박을 침.
덕분에 로트렉은 카바레에서 VIP 대접을 받음. 무대 바로 앞에 특별석을 제공받았고, 술도 원하는 만큼 마실 수 있었음.
공연하는 댄서와 테이블마다 시중을 드는 웨이트리스를 면밀히 관찰하며 다양한 스케치와 그림을 그림.
그의 커리어가 정점에 있던 때는 이른바 '벨 에포크 La Belle Époque' 시대.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의미로 19세기 말부터 1차 대전 전까지 유럽의 태평성대. 경제적 풍요로움과 그에 따른 사치, 탐닉, 탐욕이 넘쳐났던 시기.
물랑루즈 카바레는 벨 에포크를 상징하는 곳이었음. 미모의 접대부가 서빙하고 화려하고 선정적인 공연이 매일 펼쳐짐.
돈 좀 있고 잘 나간다는 파리지앵이 다 몰려들어 성황을 이뤘고 모든 비즈니스와 정치는 물랑루즈에서 이뤄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음.
로트렉은 매일 저녁 출근하다시피 하며 예리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물랑루즈에 있는 사람들을 스케치북에 옮김. 사실적인 묘사로 마치 우리가 그날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줌.
그림의 주된 대상은 댄서와 매춘부였음. 댄서는 관람석 제일 앞줄에서 면밀히 관찰했다치고 매춘부는 어떻게 자세히 그릴 수 있었는지 궁금증을 자아냄.
로트렉의 매춘부 그림은 당사자의 허락을 받고 그들의 숙소 등에서 장시간 포즈를 취하게 하고 그린 것이 많음.
돈 많은 귀족 집안 출신이니 거액의 모델료를 지급하고 그렸을까?
그것은 아닌 것 같음. 그림 속 매춘부의 포즈나 표정이 돈을 넉넉히 받아서 나온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
그냥 당신 그리고 싶은대로 마음 껏 그려요, 나는 신경 안 쓸테니, 그런 느낌이 듦.
로트렉에 대한 이질감, 거리감이 없었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보임. 아마도 로트렉의 기형적 신체와 귀족이면서 전혀 귀족답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모습에 동질감과 연민을 느껴서 그랬을 것임.
살면서 그의 내면에 깊은 상처와 좌절이 켜켜이 쌓였을 것임은 추측이 되고도 남음.
로트렉에게 그림은 유이한 도피처였음. 다른 하나는 바로 술, 그것도 독주.
맥주, 와인에서 시작한 그의 음주는 벨 에포크를 풍미한 '녹색 악마' 압생트(absinthe)에 이름.
압생트는 70도짜리 증류수로 너무 독해서 마시면 환각 작용을 불러일으킬 정도.
몽마르뜨에 몰려 있던 예술가들 사이에 압생트가 대유행했음.
그런데 로트렉은 압생트도 모자라서 거기에 코냑을 반 섞은 자기만의 칵테일을 제조해서 마심.
그 압생트+코냑 칵테일을 '지진 The Earthquake'이라고 명명함. 한 잔만 마셔도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마구 흔들린다는 의미였음.
로트렉의 일상은 그림 그리기를 제외하면 독주 마시기와 무분별한 섹스로 점철되었음.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에 맺힌 응어리를 조금 풀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임.
자신을 심리적, 육체적으로 학대한 결과는 단명으로 이어졌음. 어쩌면 로트렉은 그런 육체로는 별로 오래 살고 싶지 않았는 지도 모르겠음.
요양병원에 있다가 집으로 가서 모친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았는데 부친을 향해서는 "아버지, 이 늙은 멍청이야!", 모친에게는 "어머니, 이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분"이라고 했다고 알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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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트렉에게 세 명의스승이 있는데,,,
그 중 코르몽의 화실에서 찍힌 사진에 빈센트랑 같이 있는 사진 붙입니다.^^
로트렉의'지진' 칵테일 레시피. 압생트를 못 구하신다면 제일 도수 높은 보드카와 코냑을 반반씩 섞어서 마시면 대충 비슷 https://instituteforalcoholicexperimentation.blogspot.com/2010/10/earthquake-cocktail.html
귀족의 삶을 못 살았을진 모르지만 귀족들보다 더 오래 이름을 남기게 되었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노래 가사에 로트렉이 언급 되어서, 로트렉이 누구야 했던 적이 있었고,
그때는 그냥 (어릴때라) 고흐 고갱 같은 화가인가 보다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요...
나중에 알고 보니 말 그대로 아웃사이더 였습니다.
"명예도 없고 금전도 없어
자존심이 있을 뿐이야
괭하니 검게 반짝이는 눈은
로트렉의 그림을 보네"
벌써 그게 30년도 더 지난 일이라니.. 참 시간이 빠르다 싶습니다.
살면서 몇 번은 더 접했지만, 큰 관심거리가 아니어서 그냥 지나치곤 했는데...
덕분에 공부 잘하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https://m.blog.naver.com/justinceo/30126959076
역시나! 였군요. 정보 감사합니다!! ㅎ
인도도 신분제인 카스트제도가 법적으로 폐지 됐지만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선 구분되어지고 있죠..
땅을 기반으로 얻은 부와 권력은 의외로 수백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신라시대부터 커다란 영토를 사유화한 귀족들은 만석꾼 천석꾼으로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왔구요.
이게 상위 극소수층이라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뿐입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도 만석꾼의 아들로 금수저 였습니다.
다른 이들처럼 압생트 한잔에 각설탕 하나씩 넣어 먹었다면 아마 더 일찍 당뇨로 죽었을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