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전에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의 이야기이지만 개인들의 이야기라 약간의 오류나 착각은 있을수 있으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요.
저희 아버지는 1927년 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정도 교사생활을 하시다 대학교 영문학과에 진학하셨습니다.
그 당시엔 이런 케이스가 흔했다고 하더군요.
서울에선 이모네에서 생활하셨는데 통학을 자가용기사가 데려다주시는등 편하게 지내시다가 2학년때부터는
이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고등학교 동창인 절친[약학과] 과 혜화동에서 자취를 하였다고 합니다.
조실부모하고 누님이 교사하면서 뒷바리지하던 친구분이 어렵게 생활해서 같이 살게되었다고 하네요.
6.25 전쟁이 났을때는 원래 자주 큰 분쟁이 있었어서 별로 큰 일이라 생각하지도 안았고 그 당시 분위기가
무력으로 북진통일해야한다, 전쟁나서 잘됐다 ,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거라는
낙관론과 무관심이 팽배해 있었고 다들 일상적인 분위기였으나 고위층 자녀를 과외했던 친구 누님이 오셔서
지금 고위층 집은 다 피난가려고 한다고하고 한강 다리가 끊겼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바로 한강다리로
가보니 정말 다리는 끊기고 시체들이 떠있거나 백사장에 있는걸 보고 상황이 심각함을 알게되었다고 합니다.
수소문해서 나룻배들이 있는곳으로 갔으나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어 기다리다 배를 탔지만 사람이 너무 타서
뱃전까지 물이 들어오고 한강에는 나룻배 몇개가 전복되어서 시체가 떠다닐정도로 참혹했다고 합니다.
같이갔던 친구분 누님은 무서워서 도저히 배를 못타겠다고 혹시 사고나면 수영을 좀 하시던 저의 아버지에게
동생분을 데리고 수영해서 건너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나룻터에서 눈물의 이별을 하게되었습니다.
다행히 사고없이 한강을 건너서 무작정 남하하던중 수원쪽으로 지나는데 파난민 대열에 일단의 무장군인이 오더니
청년들에게 따라오라고해서 처음엔 정체를 모르니 불안했으나 좀 따라가니 웬 서양인이 있고 들어보니 영어를 하고
있어서 미군[군사고문관]인걸 아셨다고 합니다.
백여명가량이 모이니 몇몇분이 갖은 이유를 데면서 따라가지 안을려고 했으나 그 중 한분을 나오라고 하더니 논두렁앞에서
그냥 총을 쏴 버려서 군소리 없이 따라가게되었고 나이,학력등을 조사하고 저의 아버지와 친구분은
미군 미군사고문관을 따라 켈로부대로 8240부대, 유격대에도 가게되셨다고 합니다.
친구분과는 항상 같이 군생활하고 강화도, 교동에서 북한 지역으로 침투하고 주둔하시다가 휴전이 임박해지자 아버지만
먼저 군사고문단과 같이 먼저 철수하셨는데 부대로 한 밤중에 무장국군들이 들이닥쳐 부대원을 다 모으더니 부대가 해체되니
이젠 국군 신병으로 입대하라고해서 이게 뭔 개소리인가했지만 강제로 신병으로 입대당하고 당연히 훈련없이 모두
동부전선이나 중부전선등 최전방으로 제일 위험한곳으로 모두 가게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이제까지의 군복무기간등은 인정이 안되었고요.
저희 아버지는 울산바위가 보이는 속초방면으로 배치되었고 휴전된 후에는 원주에 군단사령부로 가게되어서 결국
미군으로 3년하고 국군으로 5년 복무해서 총 8년간 군복무하셨습니다.
원래 군시절 이야기를 잘 안하셨지만 제가 학도병나온 영화를 볼때 화를 내시면서 당장 티비를 끄라고 역정을 낸적이
있으신데 나중에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듣게되었습니다.
신병들을 징집시 학도병들도 왔는데 훈련중인 학도병중에 예전 교직생활하셨던 학교 학생들이[직접 가르치신 안았지만]
있어서 아버지를 알아보고 선생님이라고하고 아버지도 반가와서 간식이나 물품등을 자주 가져다 주셨는데 대부분 학도병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집에 가고싶다, 엄마를 보고싶다고하면서 울면서 하소연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조교들이나 다른 군인들은 무서워서 말도 못하다가 아버지에게는 안심하고 속 마음을 이야기했던듯 합니다.
나중에 아버지 군대 지인분들에게 들으니 학도병들의 학교 선배와 동향이신분들이 모여서 미군에게 어린 학생들은 돌려보내달라고
항의했는데 아버지도 같이 동참하셨다고 합니다.
지인분들 이야기로는 당시 분위가가 항의자들은 군법으로 즉결하려고 하였으나 미군들이 아버지가 있는게 의아해서 당신은 왜
동참했냐고해서 저기 학생중에 내가 가르친 제자들이 있다라고 말하자 미군들도 놀라서 그럼 이해한다라고 말하고
처벌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도 미국이나 한국이나 교사와 제자간의 관계는 인정해서라고 하더군요.
그 이후 전투에서 사망한 학도병과 부상으로 불구가되어 호송온 학도병들이 고통속에서 선생님 살려주세요하는걸 보면서
지옥이 이런거구나라고 생각하셨고 평생을 그 트라우마로 고통스러워 하셨습니다.
같이 군생활하던 절친분과 전우 유격대분들은 그 이후 대부분 생사를 모른다고 하십니다
휴전이후 한참후에 알게된 사실은 아버지가 온 배가 마지막이고 이후의 수송선은 의문의 폭발사고로 침몰하여 천여명이 사망하고
더 이상 북한지역의 부대원을 데려오는 일은 중단됐고 남겨진 대원 수만의 생사는 알수 없다고 합니다.
아버지나 동료분들은 다들 고의로 북에 남겨놨다고 생각하시더군요.
이유야 많지만 그 당시 부대원들에게 항상 종전후에 보상을 후하게해주고 각종 특혜를 주겠다고 얘기했지만
실상은 군복무 기간도 인정안해주고 이중 군복무시키고 상해로 장애나 사망해도 일절 보상이 없었으니
후환이 두려워서 였을거라고 생각하시더군요.
이번에 국방부에서 비정규군 보상금을 준다고 올해 10월까지 신청 받는데 신청자는 고작 3천명정도로
3만명이 넘는 비정규군의 숫자에 비하면 터무니 없더군요.
아마 군번도 계급도 없고 기록도 없으니 자기 가족이 비정규군인지 모르는 유족이 태반인듯 합니다.
저희 아버지는 국방부에 기록이 있지만 국방부에서 연락도 못받다가 유격대동지회에서 연락이 왔으니
참 아직도 국가의 보상 행정도 엉망입니다.
저희 아버님이 학도병들 이야기하면서 오열하는거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대부분 강제로 징집된 학생이고 15살짜리 중학생들도 있었다고하더군요.
어머니를 찾으면서 울던 그 모습에 피눈물이 났다고 합니다.
저희 아버님은 국방부에 기록이 있는데도 연락 한번 안왔으니 참 어이없습니다.
이 분들은 군번도 계급도 없어서 여태 장애나 사망보상금이나 연금도 없던 분들입니다.
고맙습니다
연락이 없었습니다.
기록이 없는분들이 더 많다고하니 참 안타깝습니다.
너무 끔찍한 상황입니다
그러셨던것 같더군요.
영문학과 시를 좋아하고 일어와 독일어도 유창해서 미군 군사고문단과는 나름 인간적인 교분이 있어서 항명에도
구제 빋을수 있었다고 주변분들이 그러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군사고문단은 요즘 PMC같은 역활 같아서 일반적인 군인이 아니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