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몽골 유럽원정때 유럽 기사들이 망구다이전술과 기마병의 저런 움직임에 손도 못쓰고 당했다죠 기마돌격을 했는데 상대기병이 말 배 밑으로 숨었다가 반대편으로 돌아나와서 뒤통수에 화살먹이고 거의 반칙수준으로 움직였다 하더군요
노력성실
IP 121.♡.255.125
02-02
2023-02-02 11:3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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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병기 시절 기병은 정말 어마무시한 존재였긴했죠. 그런면에서 총은 전쟁사의 혁명입니다. 나이 성별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줫으니깐요.
IP 112.♡.180.130
02-02
2023-02-02 11:40:23
·
집에 남는 벤츠 S클로 드리프트 연습하는 수준인건가 ?
삭제 되었습니다.
버드나무골
IP 221.♡.90.102
02-02
2023-02-02 11:4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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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너무 어이없게 털려서... 이미지가 이상해졌지만, 임진왜란 이전에는, 전 세계 기준으로 보아도 조선은 군사강국이었죠. 다만 쓸곳이 여진족 밖에 없었지만.. 당시 기병이 수천기 있었는데, 여진족에게는 공포였을 것 같아요.
kmaster
IP 1.♡.134.156
02-02
2023-02-02 11:5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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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골님 평화가 오래되기도 했고 북방에 비해 남부는 상비군의 숫자도 매우 적었고요 나름 대응하긴 했는데 동원체계가 제대로 돌아가기 이전에 바다에서 너무 빨리 무너져서 제대로 대응못하고 그대로 무너졌죠 하지만 반면에 제대로 동원되기 전에 무너져서 많은 병력자원들이 살아남았고 그 살아남은 병력들이 의병조직으로 돌아가면서 전쟁 중후반기에 버티고 반격할수 있는 소중한 자원이 되었지요
아마 동원이 제대로 이루어져서 일본군의 진격을 막았다면 진격속도는 늦어졌을지 몰라도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을것이고 이후 반격이 좀 더 어려웠을거라는 말도 있더군요
@kmaster님 일본이 정규군으로 그렇게 쳐들어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게 가장 큰 것 같아요. 탄금대는 당시 조선의 정예병(기병 비율이 높은)이 총동원된 전투였고, 그나마 비슷한 나가시노 전투와 비교하면 엄청난 사상비율이 나왔을 것 같아요. 탄금대에서 이기거나 막았어도, 지방의 병력자원은 그대로 있기 때문에 일본에는 없는 의병들이 나서면서 일본군이 빠르게 밀리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네요.
@강원대망론님 저는 임진왜란 당시, 생산력은 큰 차이 없었는데, 세금은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해요.(실제 나라에서 거두어서 사용하는 세금이 일본은 착취수준이었죠.), 군사기술이나 상무정신은 일본보다 낮지 않다고 보는데 해전을 보면 오히려 높았다고 보는데요. 동원도 어느 정도 되었는데, 단지 첫 탄금대 전투에서 운이 없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kmaster
IP 1.♡.134.156
02-02
2023-02-02 12:5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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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골님 전쟁전에 예상했고 나름대로 먼저 가서 준비도 했습니다 문제는 그걸 자기 기준에서 생각하고 그에따라 준비한거죠 애초에 제승방략 동원 체계 자체가 문제가 많습니다 조선의 군편제 동원 편제 자체가 전쟁을 위한 편제보다는 역성혁명 쿠데타를 막기위한 체계라 전투력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지방동원군 군 지휘권이 실제 관할지역에 근무하는 장수에게 지휘권이 없습니다 전쟁이 터지면 수도에서 장수가 임명되서 지방으로 파견되는 식 인지라 병력이 동원이 되도 그걸 지휘할 장수가 없는 상황이 되죠 소규모 단위부대야 지방관이 지휘할 수 있지만 통합지휘 자체가 안됩니다 임란 초기에 무너진것도 일본군이 진격하는 속도가 한양에서 지휘관이 내려오는 속도보다 빨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승방략 체계에 따라 모인 병력들도 지휘 장수가 없다보니 명령을 받지 못하는 상태였고 상비군도 아닌 동원된 농민이다 보니 진영을 구축하는것도 불가능했지요
조선은 경제력도 경제력이지만 애초에 역성혁명으로 만든 국가인지라 쿠데타에 대한 두려움 자체가 상당히 컸습니다 그래서 평시에 대규모 상비군을 만들지 않아요 우리가 수성은 잘한다는게 애초에 상비군이 아니니 진형훈련자체가 안되고 각군의 연계도 안되는지라 야전에서는 오합지졸수준도 안되기 때문에 할 수 있는게 수성 뿐인겁니다
kmaster
IP 1.♡.134.156
02-02
2023-02-02 13:03:33
·
@버드나무골님 생산력 차이조금 있었고 세금관련해서도 크게 차이나는건 없습니다 가장큰건 전쟁경험이죠 이당시 일본은 오랜 전국시대 덕에 전쟁경험이 풍부했고 군사도 대부분 직업군인 상비군이었습니다 장수부터 하급 병사까지 전술이해도가 좋았지요 장창 방진을 이루고 상황에 따라 진의 위치를 변화 시키고 예비대를 운영하는등 전문적인 군사집단이었습니다 반면 조선은 상비군 자체가 거의 없는 국가입니다 북방 일부지역과 수도에만 소수의 상비군을 운영하고 있었고 북방의 상비군도 말이 상비군이지 향토예비군에 가까운 성격이었어요 그덕에 여러병종들이 대규모로 진을 이루고 싸울줄을 모릅니다 이론은 아는데 임란이전까지 장수들도 사단이상의 병력을 운영해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각 병종간의 협조도 안되고 예비대 운용도 안되서 야전에선 전투력이 상당히 낮았습니다
@kmaster님 님께서는 전쟁경험과 구조적인 관점에서 보시는데, 저는 탄금대 전투에 한정해서는 신립 장군의 개인적 역량과 운으로 보고 있어요. 야전에서의 전투력이 낮다고 보시는데 기병 수천기를 이끄는 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이 들어서요. 권율 장군의 행주 대첩과, 일본군의 호남 진출 방어 등을 보면 다른 장군이 지휘했으면 달라졌을 수 있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째든 허망하게 털렸기(?) 때문에, 분석과정에서 많은 저평가는 어쩔 수 없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조선의 전쟁수행능력에 대해 그렇게 저평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후의 전쟁을 보면 일본군들 입장에서 '왜 내가 여기서 싸우고 있지'(물로 토요토미 때문이지만...)라는 상황이 많이 벌어지는 것 같거든요.
@버드나무골님 신립장군의 개인적 역량보다는 구조적 문제가 더 컸습니다 신립이 조정의 명을 받고 남하할때 자신이 이끌던 북방 정예군을 대리고 남하하지 못합니다 자신 휘하의 부관과 하급 지휘관 88명만 함께 남하했고 수도 한양에 도착해서야 경군을 지원받을 수 있었는데 이것도 실제로는 지휘체계상 신립이 지원받을수 없는 군사였는데 류성룡이 강력하게 주장해서 예외 적으로 받을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경군도 숫자가 많지 않았고 주 병력은 충청도에서 징집한 농민군이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장수가 병사들의 훈련수준을 파악하는게 불가능했고 가장큰건 초급지휘관의 부족 문제였습니다 병력은 모았으나 창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사람이 상당수였고 그들을 지휘할 능력을 가진 하사관들 초급지휘관들 자체가 너무도 부족했습니다 북방에서 같이 남하한 88명의 부장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지휘 할수 있는 거였죠 결국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칠 수 밖에 없는 원인이 지휘관이 병사들을 믿을 수 없고 병사들도 지휘관을 믿을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부대가 무너지지 않도록 도망갈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하는 고육지책에 가까웠고 그 공백을 기병으로 만회하려 하나 세조때 기병병종 구성이 창기병에서 궁기병으로 바뀌면서 대기병전에는 강하나 보병방진에 매우 취약한 궁기병위주였기에 이또한 실패하죠 거기다 당시 조선의 군대는 보병위주의 보병방진 전술을 처음으로 경험하던거였던지라 공략할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행주산성이나 호남방어전의 경우 이미 제승방략이 무너진후 그지역 민들을 동원하여 수성전을 한것이기 때문에 신립과는 상황이 완전히 다릅니다 호남방어전때도 몇몇 의병장이 수성이 아닌 야전을 시도했다 전멸 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조선은 애초에 역성혁명으로 만든 국가였고 태종때 왕자의 난 세조또한 쿠데타도 집권한지라 병력의 효율성 보다는 군사제도자체가 쿠데타를 막기위한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군사의 역량을 강화 하기 보다는 약화시키고 유사시 대규모로 동원해서 머릿수로 승부하려는 경향이 강해요 어찌보면 명나라의 군사력이 약해진 이유와도 같습니다
버드나무골
IP 221.♡.90.102
02-02
2023-02-02 14:02:04
·
@kmaster님 탄금대 전투에 대해 제가 인지하는 것과 다른 부분이 있고, 저와는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어요. 조선이 군사 역량을 억제한 건 맞는 것 같아요. 멀리가지 않아도, 고려의 무신집권기 당시 폐해도 많았고 조선 건국 과정도 그렇고요. 어쩌면 그냥 임진왜란 끝나고 왕조가 바뀌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도 있어요.
삭제 되었습니다.
파키케팔로
IP 218.♡.166.9
02-02
2023-02-02 11:42:32
·
저 전통이 멀리 타국에 전파된 것일까요..
아티
IP 49.♡.89.107
02-02
2023-02-02 11:44:48
·
@파키케팔로님ㅋㅋㅋㅋㅋㅋㅋㅋ
홀-맨
IP 116.♡.145.202
02-02
2023-02-02 11:46:15
·
@파키케팔로님
인도 ? 파키스탄 ?? ㅋㅋㅋㅋ
부릎뜨니숲이어쓰
IP 112.♡.32.109
02-02
2023-02-02 11:48:57
·
@파키케팔로님 이건 조상님들도 이기지 못할 것 같네요 ㅋㅋㅋㅋ
뽀샤시구공탄
IP 115.♡.119.115
02-02
2023-02-02 11:43:01
·
저걸 연습할 말이 충분했을까 싶은데..ㅎㅎ;;
시리릭
IP 180.♡.5.162
02-02
2023-02-02 11:43:11
·
다른건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어 보이지만 3번은 왜...
swhan
IP 121.♡.35.55
02-02
2023-02-02 11:47:34
·
@시리릭님 연결동작 아닐까요?
IP 106.♡.64.36
02-02
2023-02-02 12:06:30
·
@시리릭님 상대가 창 들고 달려오는 기마병이라면 앞으로 숙여서 말의 배 아래로 빠지는 회피로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짤방보니까 하는사람 많더라구요
심지어 몽골가면 아직도 합니다 ㅎㄷㄷ
저런거 하는 대회도 있더라고요.
이해가 안가는 시험은 아니네요 ㅋ
기마돌격을 했는데 상대기병이 말 배 밑으로 숨었다가 반대편으로 돌아나와서 뒤통수에 화살먹이고 거의 반칙수준으로 움직였다 하더군요
그런면에서 총은 전쟁사의 혁명입니다. 나이 성별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줫으니깐요.
나름 대응하긴 했는데 동원체계가 제대로 돌아가기 이전에 바다에서 너무 빨리 무너져서 제대로 대응못하고 그대로 무너졌죠
하지만 반면에 제대로 동원되기 전에 무너져서 많은 병력자원들이 살아남았고 그 살아남은 병력들이 의병조직으로 돌아가면서 전쟁 중후반기에 버티고 반격할수 있는 소중한 자원이 되었지요
아마 동원이 제대로 이루어져서 일본군의 진격을 막았다면 진격속도는 늦어졌을지 몰라도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을것이고 이후 반격이 좀 더 어려웠을거라는 말도 있더군요
문제는 그걸 자기 기준에서 생각하고 그에따라 준비한거죠
애초에 제승방략 동원 체계 자체가 문제가 많습니다 조선의 군편제 동원 편제 자체가 전쟁을 위한 편제보다는 역성혁명 쿠데타를 막기위한 체계라 전투력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지방동원군 군 지휘권이 실제 관할지역에 근무하는 장수에게 지휘권이 없습니다
전쟁이 터지면 수도에서 장수가 임명되서 지방으로 파견되는 식 인지라 병력이 동원이 되도 그걸 지휘할 장수가 없는 상황이 되죠
소규모 단위부대야 지방관이 지휘할 수 있지만 통합지휘 자체가 안됩니다
임란 초기에 무너진것도 일본군이 진격하는 속도가 한양에서 지휘관이 내려오는 속도보다 빨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승방략 체계에 따라 모인 병력들도 지휘 장수가 없다보니 명령을 받지 못하는 상태였고 상비군도 아닌 동원된 농민이다 보니 진영을 구축하는것도 불가능했지요
조선은 경제력도 경제력이지만 애초에 역성혁명으로 만든 국가인지라 쿠데타에 대한 두려움 자체가 상당히 컸습니다
그래서 평시에 대규모 상비군을 만들지 않아요 우리가 수성은 잘한다는게 애초에 상비군이 아니니 진형훈련자체가 안되고 각군의 연계도 안되는지라 야전에서는 오합지졸수준도 안되기 때문에 할 수 있는게 수성 뿐인겁니다
가장큰건 전쟁경험이죠 이당시 일본은 오랜 전국시대 덕에 전쟁경험이 풍부했고 군사도 대부분 직업군인 상비군이었습니다 장수부터 하급 병사까지 전술이해도가 좋았지요 장창 방진을 이루고 상황에 따라 진의 위치를 변화 시키고 예비대를 운영하는등 전문적인 군사집단이었습니다
반면 조선은 상비군 자체가 거의 없는 국가입니다 북방 일부지역과 수도에만 소수의 상비군을 운영하고 있었고
북방의 상비군도 말이 상비군이지 향토예비군에 가까운 성격이었어요
그덕에 여러병종들이 대규모로 진을 이루고 싸울줄을 모릅니다 이론은 아는데 임란이전까지 장수들도 사단이상의 병력을 운영해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각 병종간의 협조도 안되고 예비대 운용도 안되서 야전에선 전투력이 상당히 낮았습니다
신립이 조정의 명을 받고 남하할때 자신이 이끌던 북방 정예군을 대리고 남하하지 못합니다 자신 휘하의 부관과 하급 지휘관 88명만 함께 남하했고 수도 한양에 도착해서야 경군을 지원받을 수 있었는데 이것도 실제로는 지휘체계상 신립이 지원받을수 없는 군사였는데 류성룡이 강력하게 주장해서 예외 적으로 받을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경군도 숫자가 많지 않았고 주 병력은 충청도에서 징집한 농민군이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장수가 병사들의 훈련수준을 파악하는게 불가능했고 가장큰건 초급지휘관의 부족 문제였습니다
병력은 모았으나 창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사람이 상당수였고 그들을 지휘할 능력을 가진 하사관들 초급지휘관들 자체가 너무도 부족했습니다 북방에서 같이 남하한 88명의 부장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지휘 할수 있는 거였죠
결국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칠 수 밖에 없는 원인이 지휘관이 병사들을 믿을 수 없고 병사들도 지휘관을 믿을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부대가 무너지지 않도록 도망갈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하는 고육지책에 가까웠고 그 공백을 기병으로 만회하려 하나 세조때 기병병종 구성이 창기병에서 궁기병으로 바뀌면서 대기병전에는 강하나 보병방진에 매우 취약한 궁기병위주였기에 이또한 실패하죠
거기다 당시 조선의 군대는 보병위주의 보병방진 전술을 처음으로 경험하던거였던지라 공략할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행주산성이나 호남방어전의 경우 이미 제승방략이 무너진후 그지역 민들을 동원하여 수성전을 한것이기 때문에 신립과는 상황이 완전히 다릅니다
호남방어전때도 몇몇 의병장이 수성이 아닌 야전을 시도했다 전멸 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조선은 애초에 역성혁명으로 만든 국가였고 태종때 왕자의 난 세조또한 쿠데타도 집권한지라 병력의 효율성 보다는 군사제도자체가 쿠데타를 막기위한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군사의 역량을 강화 하기 보다는 약화시키고 유사시 대규모로 동원해서 머릿수로 승부하려는 경향이 강해요
어찌보면 명나라의 군사력이 약해진 이유와도 같습니다
인도 ? 파키스탄 ?? ㅋㅋㅋㅋ
전 몽골 🇲🇳 기마대 초청 연수!
계미년, 신유년 무과 초시 장원 화/목 강의!
술해년, 경인년 무과 차석 월/수/금 강의!
학습당에서 자율적으로 실시하는 무예 강습!
전해 무과 시험 사용 시험마 20필 상주!
매년 무과 합격자 기십명을 자랑하는
한성 무과 학술원 신입 무과 지망학도 모집!
그래서 무과 합격자들 보면 집안에 무인들 있는 집안이 합격을 많이했죠
양반들도 문과 보다 무과를 더 선호했던 이유가 선발인원이 문과는 극소수 무과는 5-6 배
더 많았다고 합니다
문과 관리가 300명 수준
기수들이 카자흐스탄 사람인가 그랬어요
원균도 이걸 통과했을걸 생각하면 보면, 앞으로 존중..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