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경악한 채병덕이 국방장관 공관에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이에 채병덕은 가회동에 살고 있던 비서실장 신동우 중령에게 전화를 걸어 신성모의 소재를 물었는데, 이때 신동우 중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관님은 숙소에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장관님은 영국에서 오래 사셨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아무도 만나시지 않고 또 전화도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채병덕은 신동우를 불러 신성모의 집으로 안내하게 한 다음 신성모에게 직접 상황을 보고했다. 그때가 아침 7시였는데 신성모는 일요일에 북한군이 공격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오전 10시 30분, 신성모는 이승만을 찾아가서 북한군이 이미 1시간 전에 개성을 함락시키고 탱크를 앞세워 춘천을 공격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승만이 놀라서 "국군에는 탱크를 막을 수단이 없지 않은가?"하고 혼잣말을 하자 신성모는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란 말을 되풀이하며 이승만을 안심시켰다.
6월 26일 채병덕과 함께 국회에 출석한 신성모는 "국군이 걱정없이 물리친다. 해주를 접수하고 3~5일이면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라며 거짓 보고를 한다. 채병덕은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했다."라고 허위 보고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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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amu.wiki/w/%EC%8B%A0%EC%84%B1%EB%AA%A8
당시 국방부장관 신성모에 대한 나무위키 글인데 ㅎㄷㄷ 하네요
이양반에 대한글을 좀더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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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명색이 국방부장관이면서 국방에 대한 개념이 너무 없었다는 것이고, 하필이면 그의 재직시기에 6.25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를 보좌하는 육군참모총장마저도 (병참, 군수행정)에 특화되어있던 채병덕이었다. 그의 잘못된 처신은 6.25 전쟁 초기에 한국군이 대응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한편으로 아군 피해가 속출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애초에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자리에 있었다지만 지청천, 이범석과 달리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한 실전경험이 없었고, 광복과 귀국 이전까지 해양선박 관련된 일만 했기 때문에 군사 쪽에 대해 아는 건 이범석보다 없었다. 한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부에서 일했었지만 해당 업무를, 그것도 책상머리에 앉아서 얻을 수 있는 경험 자체는 거의 새발의 피 수준이었다.
중략..
그런 놈이 정작 그 이듬해 여름에는 전쟁준비는 커녕 육군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들, 그것도 전방부대를 포함한 모든 지휘관들을 장교클럽에 모두 모아놓고 술파티나 하고 자빠졌다. 당시 일부 장성의 증언에선 이후에 북한 스파이인 것이 발각되어 사형된 장성이 이때 파티 비용 전액을 지불했다고 하는 내용도 있다. 진짜라면 간첩 입장에선 '감사합니다'가 절로 나왔을 듯. 아무튼 저렇게 발언했으면 오히려 전방부대를 중무장시켜야 말과 행동이 맞는 건데, 말은 저렇게 해놓고 행동은 지휘관들을 빼다가 술파티를 벌이고 있었으니 다른 건 다 둘째치고 이것 하나만으로도 지휘관으로서는 실격이다.
중략..
더욱이 군사능력의 부재로 예비전력을 자기 마음대로 해체해버렸다.(예비군 해체)
중략..
곧이어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나자 착복금 중 일부가 이승만 정치자금으로 사용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신성모가 사건 배후로 지목되었다.
이 사건에서 신성모는 제일 먼저 책임을 져야 할 인물이었는데, 국방부장관이라는 직위에 따른 책임도 있었지만, 국민방위군 사령부는 신성모가 단장으로 이끌었던 대한청년단 단원들로 충원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안무치하게도 사건 수사를 방해하면서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 하였다. 예를 들자면 국민방위군사령관과 부사령관에게 책임을 전가한다거나, 그들을 재판하는 군사재판장마저 자기 친구로 임명하여 봐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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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안망한게 정말 천운이었네요 ㅜㅜ
그리고 뭔가 지금의 모습과 비슷해보이기도 합니다
전문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정부나 각 요직으로 가있고....
채병덕이 나중에 좌천 후 투입된 하동, 진주 방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훨씬 더 가혹한 비판이 있었을 겁니다.
전사한 사람이라서 덜 까는 편이죠.
(물론 극혐하는 사람도 엄청 많습니다. 특히나 6.25 당시 육사 기수 낮은,,, 그 당시 때 위관급 장교였던 기수들은 채병덕을 심지어 간첩이라고까지 몰면서 극혐하죠. 채병덕 덕분에 동기들이 의미 없게 축차 투입, 축차 소모되면서 전사했다고 하면서요.)
독수리로 드론 잡는다는 개소리나 하고 자빠졌습니다.
그 엄청난 위암의 일부죠
하필 굥이라.
전쟁 같은 최악의 상황을 겪어도 반성할 줄도 모르고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고 똥을 계속 지지하고 있으니...
점심은 개성에서 먹고 저녁은 평양에서 먹자고 도발하던 놈이 실제로는 경상도에서 저녁을 쳐먹었다죠.ㅋㅋ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에 판단을 내리는 자리에 누가 앉아 있는가가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죠.
지금은 정말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진짜로요.
열심히 사는게 맞나 싶기도 하고...
저당시 다들 30대에 장군들이었는데. 능력이 없으니 전쟁 제대로 못했습니다.
미군이 오죽하면 전시작전권을 회수해 갔을까요?
한국애들한테 맡기다간 더 큰일 난다 였습니다.
아니 더할겁니다
이승만은 정말...어휴
한국전쟁 때도 7시간을 허비했다.
육군 참모총장은 과음 후 인사불성이었고, - 채병덕
작전국장은 전화 연락이 안 되었으며, - 육본 작전국장 장창국
국방부장관은 일요일을 즐기고 있었고, - 신성모
대통령은 낚시 중이었다. - 이승만
(아침부터 비원에서 낚시를 즐기던 이승만 대통령은 오전 10시쯤 경찰 보고를 받고 경무대로 돌아왔는데, 이때야 신 장관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는 간략한 상황보고 끝에 “크게 걱정하실 것 없다”는 말을 거듭했다.)
그 시간에 전선은 초토화되었다.
6.25의 7시간, 박근혜의 7시간 (2014년 9월 18일)
https://ppss.kr/archives/29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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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첫날 7시간은 그렇게 한심하게 지나갔다. 대통령에게 보고되는데만 7시간이 걸렸다.
이 날을 복기해야 하는 이유는 다시 그런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전화가 빗발쳐도 별 거 아니라며 코를 골았던 육군 참모총장의 실수가 그렇고,
핫라인 하나 없는 작전국장의 처지가 그렇고,
일요일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는다는 최악의 영국 신사 신성모는 그 하이라이트였다.
누구도 책임지는 이가 없고 누구도 정리하는 이도 없이 작전국장님, 참모총장님, 국방장관님만 부르짖으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던 한국군은 바야흐로 몰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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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는 6.25 수수께끼
https://www.hankookilbo.com/Collect/2145
“6·25 당시 육군 지도부에 통비(通匪)분자가 있었다.”
대한민국 군번 1번으로 유명한 이형근(李亨根) 예비역 대장(2002년 작고)의 주장이 큰 파문을 일으켰었다.
그는 1994년 '군번 1번의 외길인생'이란 자서전을 통해 열 가지 미스터리를 꼽으며 이렇게 주장했다.
군 지도부에 적과 통하는 세력이 있었고, 미스터리가 열 가지나 된다니 너무 충격적이었다.
열 가지 미스터리는
첫째, 일선부대의 남침 징후 보고를 군 수뇌부가 묵살 내지 무시한 점.
둘째, 전쟁 발발 코밑에 단행된 주요 지휘관 인사이동.
셋째, 전쟁 직전 대대적인 전후방 부대 교체.
넷째, 24일의 비상경계령 해제.
다섯째, 24일 전 장병의 50% 휴가 및 외출 외박.
여섯째, 24일 밤 육군 장교클럽 댄스파티. 일곱째, 의정부 축선 병력 축차(逐次)투입.
여덟째, 국군이 반격해 북진 중이라는 허위방송.
아홉째, 한강교 조기 폭파.
열째, 공병감 최창식(崔昌植) 대령 사형 조기 집행이다.
물난리에 북한에서 미사일을 쏴도 술 먹으러가는 어떤 놈 말입니다.
북괴(?)가 이 글을 안 읽었으면 좋겠군요 ㅡㅡ;;;
아니 말살이라는 말로도 부족합니다.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엄청난 군수물자 횡령이 있었고 이로 인해 전쟁 중에 아군 아사자가 엄청 많았다는 겁니다.
북한군의 떼34를 앞세운 소련식 전격전에 대응이 불가능했습니다. 한마디로 미국이 전쟁 절대 하지말랬는데,
맨날 전쟁불사 하다가 불벼락 맞았죠. (우째 요즘 생각이 나서 뒷목이 서늘합니다?)
김일성 역시 애치슨 라인을 크게 오해하고는 남침하는 병크를 저지른 건데,
적어도 이승만이 북진통일만 덜 외쳤어도 미국이 어느정도 제대로 된 중화기를 주지 않았을까요.
그나마 저렇게 개판친 전쟁 초반에 흩어진 국군을 모아서 제대와 임무를 부여하고 수습하여
반격의 기틀을 마련한 공로자는 역시나 독립군 출신인 김홍일 장군이십니다. (얼굴까지 미남...)
독립군 출신이든 일본군 출신이든 군단급 지휘를 해보신 분이 이분 뿐이라 가능한 거였죠.
독립군 출신들이 민족주의자라 다들 미군에게 지휘받기를 싫어하는 쪽이다 보니,
전쟁 중후반에는 한직으로 밀려나고, 영어 잘하고 미군한테 아부 잘떠는 백선엽 같은 부일매국노가
전공을 죄다 독식한게 역사의 슬픔입니다.
'죽기 전에는 죽어도 일본과 외교 정상화 하지 않은 것'이죠...
이 것 말고는 현 대한민국을 아싸리 판으로 만드는데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정치가 입니다.
유재흥에 비하면 신성모나 채병덕은 우수한 인재입니다.
한국의 무타구치 렌야라고 들어보셨나요? 그사람이 유재흥입니다. 대대로 친일파인 사람이고 친일파인명사전에도 올라가 있죠..
나쁜놈들이 더 잘먹고 장수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