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독교는 천주교와 개신교로 나뉩니다.
그냥 일단 기본 정보 차원에서...
기독교는 여러 차례 큰 변화의 시기를 겪습니다. 대략 나누어 보면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의 신으로서 존재하던 구약시절,
이후 예수가 태어나 제자를 가르치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후 부활,
이후 예수쟁이를 때려잡던 바울이 예수를 영적으로 만나 회심하고 유럽에 기독교를 설파한 시기,
이후 로마의 국교가 되어 교황이 국왕과 맞짱뜨던 천주교 시기,
천주교의 부패를 비판하며 새로운 체계를 세운 개신교 시기.
이렇게 크게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크게 천주교와 개신교, 성당과 교회이지요.
2. 믿으면 구원이라는 '값싼 은혜'
우리 개신교의 상당수는 미국의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실 종교의 역사야 원래 창시자가 한 말과 행동이 기득권과 조화를 이루며 통치도구로 왜곡되는 역사라고 봐도 큰 무리는 없겠습니다마나.. 기독교는 주류 종교의 위상을 차지하면서 '사랑의 종교'라는 근본을 잃어버리는 과정을 너무도 많이 겪었습니다.
예수는 유일신교 문화에 속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전지전능한 존재를 인정한채 모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가 주로 한 이야기는 유대민족이 믿어온 방식이 잘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도 어려울 때마다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이 이리저리 실수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했으니 반성해보자... 이니 예수도 '잘 못 알았던거야 반성하자'라고 한 것이 뭐 그리 잘 못된 이야기도 아니지요.
제가 파악하기론 예수는 당시 여러 율법을 지키느냐 여부로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던 이들을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임을 이야기 했습니다.
문제는 천주교의 부정부패를 비판하고 나선 개신교의 주류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는 교리를 내세우면서 부터입니다.
그런데 그 우리의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교리가 아주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당시에는 다들 아시다시피 면죄부를 팔았다고 하지요. 그 의미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가 있겠지만, 어쨌듯 천주교는 믿음과 성화(선한 일)을 해야 구원받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들 논리로는 죄를 지었으면 교회에 돈내고 면죄부를 사는 것도 교회가 보증한 '선한 일'로 구원에 도움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선한 일'로 구원 받는게 아니고 (전지전능한 창조주 대비) 인간은 모두 하찮은 존재라는 전제하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이지 천주교가 제시하는 일들을 하는 것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종교개혁 당시의 '은혜구원론'은 그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면 충분히 받아들일만한 괜찮은 교리입니다.
예수님도 동네방네 떠들면서 기도하고 금식한다고 자랑하지 말고, 조용히 짱박혀서 중언부언 하지말고 '주기도문'을 예로 간결하게 기도드리라고 하셨죠.
그런데 문제는 '선한 행동'은 기독교의 근본 가치이며 예수가 내린 새로운 계명이라는데 있습니다. 당시 은혜구원론을 주장한 루터도 절대 선한일을 그만하라고 한게 아니고, 그것이 기독교의 근본가치가 아니라고도 한 적이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천주교의 면죄부 장사를 비판하는 도구였고, 구원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하에 이뤄지는 절대적인 일임을 인정하는 인간의 자기낮춤이라는 교리적 의미를 가진 '은혜구원론'의 본뜻은 이후 이상하게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즉 죄를 짓던 말던 선행을 하던 말던 개차반 살던 말던 '믿습니다!' 외치면 죄 사함 받고 구원된다는 어이없는 이야기가 교회의 주류가 되어버립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많은 교회가 '믿으면 구원' 이 키워드에 집중하고 있으며 이 키워드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보냈어 우리의 죄를 자신의 죽음으로 대속하시었고 그로서 인간은 구원받았다'라는 명제만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어이없는 '값싼 은혜'가 주류를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3. 독생자 죽음을 둘러싼 해석들
예수의 죽음을 두고 정통적인 개신교 논리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이 두고 보지 못하겠는데, 그냥 죄없다고는 못하니, 자신을 예수로 탈바꿈하여 그가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므로 양을 재물로 하듯, 예수님을 재물로 받고 인간 모두의 원죄를 사하였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 사함 받은 자로서 잘 살면 됩니다.
이 해석에도 여러 의문이 안따라오지는 않겠으나 뭐 전통적인 해석이고 기독교 세계관의 원죄론과도 조응하니 뭐 아주 그른 것이라고는 말 못하겠습니다.
다만... 이런 이야기들은 예수가 정작 살아 생전에 한 행동과 말들과 별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예수의 말과 삶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끼리도 사랑하며 살라'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이 그 모든 율법과 하나님의 역사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이다.. 정도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속(재물로 대신 죽은)것일수도 있겠지만...모두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속에서 보면, 억울하게 잡혀 죽는데 그때조차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폭력으로 저항하지 않고 감내하고 죽을 수도 있는 순종이기도 합니다. 즉 자신의 가르침대로 살다가 가르침 대로 가신 것이죠.
'가장 낮은 곳에 임하는 자가 하늘에서 가장 귀한자'라는 자신의 가르침대로, 살아서는 다른 이의 발을 닦아주시고, 죽을 때는 가장 비참한 형벌(십자가형은 가장 굴욕적인 형이었다 합니다..)에 의해 죽는 죽음을 받아들이며 가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 세상의 큰 길은 하나님이 정하여 놓은대로 결국 '선(사랑)'을 향해 갈 것이니,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사랑'만 하다 가라...그러면 족하다를 믿는것과 다름 없습니다.
4. 기독교는 삶에 대한 가치관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가름침 아래 우리는 엥간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사랑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느냐. 우리는 아이를 키우면서 가끔 어려운 일에서 아이가 극복해 나가고 성장하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만든 이 세상은 분명 괴롭고 모순적으로 보이나, 우리의 성장을 위한 토대입니다. 그 성장은 우리의 사랑의 성장이구요.
우리 모두는 현생이라는 고난게임에서 '사랑'이라는 수단으로 서로 잘살아 우리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엔딩을 가진 목적을 가진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이 무목적하거나, 우리 세상이 단순한 적자생존이며, "내가 잘사는게 최고"라는 가치관에 절대적으로 반하는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적을 그저 놔둔채 허허허 하고 있으면 된다는 것인가요. 아니겠지요. 부모는 아이를 훈육합니다. 방법에 많은 논란이 있으나, 체벌이라도 아이를 죽이거나 상처받게 하려는 목적인 사람은 없을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나쁜 사람을 본다면 허허허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이를 키울 때 그 아이가 잘 되길 바라듯 사랑으로 대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나쁜 사람을 볼 때 할만한 일들도 정해집니다. 본인이 아이를 좀 강하게 키우는 사람이라면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좀 때리겠죠.... 그렇지만 고칠 때까지 때리겠다.. 이런건 좀 아니겠지요. 대신 그냥 놓고 허허허 하고 사는 것도 당연히 기독교가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교회는 동성애자들이 죄인이 주장합니다. 사실 교회의 논리에는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그런 모순을 극복하고 성경에 죄라고 하니 죄인이라 한다하여도 말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누군가를 잡아 죽이는게 당연하다고 말하는 순간 그건 그냥 그 자체로 기독교가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위한다는 대의명문 걸어보더라도, 그것을 위한 누군가 잡아 죽이려 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잡아 죽임을 당함조차 견디는 분이셨지 잡아죽이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항상 사랑과 함께 입니다. 그러나 기득권은 공의를 강조하고 형식을 강조하고 자신의 순종이 아닌 타인의 순종을 강조합니다. 불행히도 우리 교회는 기득권화된 종교의 안좋은 점 위주로 뽑아 강화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돌아가 세상에 더 굳게 사랑을 심어야 하는 굳은 믿음의 도구가 되어야 할 것인데, 하나님에 대한 형식적인 '믿음'만을 강조하고 자신들이 사랑의 씨앗이 되는데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만 하나님의 씨앗이라고 주장하는 도구로 변질되어 사용되곤 합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사랑의 씨앗이 되기를 강요하나, 우리는 그 짐을 피해 타인의 씨앗을 빼앗아 배를 부르는데 예수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교회들 중 스스로 사랑의 씨앗이 되는 교회와 목사와 신도는 참 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나 그럼에도 몇몇 교회와 목사와 신도들은 씨앗이 되곤 합니다.
러프한 글이지만, 교회 다니시는 분들이나 안다니시는 분들이나 한번쯤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사랑의 씨앗을 뿌리고 사는지 미움의 씨앗을 뿌리고 사는지.
개인적으로 포교를 불법을 정한 나라에 들어가 포교활동을 하는 것도 이해가 어렵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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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교회의 논리에는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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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전인수,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성경해석하는거랑 똑같네요.
제 댓글 어디에 범죄얘기가 있습니까?
글이 마음에 안드시면 이해가 가게 말씀해주시면 댓글 달아보겠습니다. 저는 전통적인 대속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는데 말입니다.
교회논리에서 죄인의 관점은 제쳐두고...
예수님은 주로... 인간이 죄인이라는 논리를 주로 남을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는데 사용하셨습니다. 너가 들보를 넣고 있는데 남의 티끌을 비난하느냐라구요.
그럼 죄 지은자만 죄인이지 왜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까?
이전에 최초의 인간 아담이 지은 최초의 죄(신의 직접적 명령을 어김)가 인간 모두에게 책임으로 대물림되었다는 개념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입니다. 죄의 결과는 존재의 죽음으로 결정되었고요.
이것은 본인이 직접 지은 죄가 아니고 인류 공통의 죄가 되어 본인이 회개한다고 자유로워지는 되가 아니기 때문에 신은 다른 신위의 존재(스스로와 동급인 존재)를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어 원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도록 하여 인류 구원의 길을 열어주었고 다시 부활하였다는 사실을 믿으면 원죄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기독교의 기본 교리입니다.
개인이 지은 죄는 (범죄라고 표현했습니다) 원죄와는 다르게 예수믿는다고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단체는 사이비이고 날강도랑 동일하게 여기셔도 됩니다.
원죄에 대해서는 기독교의 교리이니 신자가 아닌 사람을 무조건 죄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단체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골방에서 홀로 기도하고 개인의 신앙과 생활에서의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해서 (주)예수 혹은 본인이 교주가 되려는 사기꾼들 뿐 아니라 본인 이익을 따라 여기저기 몰려다니는 신자들만 탓하기에는 대중에 대한 기독교의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습니다.
대중들이 보는 기독교의 모습은 주변 신자들의 삶을 통해 보는 모습이 가장 많을 것이기에 저도 반성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함 받은 원죄가 아니라면
죄 지은 자만 죄인이어야죠
"사실 교회의 논리에는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왜 우리 모두 죄인이냐는 물음입니다.
원죄와 구원은 기독교의 교리입니다. 그뿐입니다.
기독교에서 믿는 원죄를 사함받는 필요충분조건=믿음 인 거고요
kita님이 죄인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주장한다면 사이비 취급하셔도 됩니다.
당시의 기득권인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의 비리와 가식의 실태를 고발하는 동시에, 그들의 돈벌이중 하나였던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좌판(아마 높은 확률로 기득권 계층에게 자릿세를 냈을 것입니다)을 다 엎어버린 일화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당연히 비 기득권 계층은 억압받고 압제받는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해 줄 새로운 '진보적 지도자' 인 예수를 따르게 되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기득권 계층이 여론을 선동하고 대중을 호도하여 예수에게 '신성모독'의 굴레를 씌워 십자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합니다. 쉽게 말해 정치범인거죠.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기독교는 이러한 진보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관은 전혀 따르지 않고 이상한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보수 진영과 달라붙어서 무지렁이같은 백성들의 고혈을 어떻게 빨아먹을까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죠.
없는 죄를 만들어서 누명을 씌우고, 그게 안되면 적어도 모욕이라도 주고 대중들의 인식을 나쁘게 만들어서 사회적 지위를 잃게 만든다...거기서 더 나아가서 기소하고 재판에까지 가서 유죄를 받게 하여 사회적으로 매장시킨다...
그들의 철옹성같은 권위를 지키는 방법인거죠.
학자에 따라서는 예수가 당시의 유대교, 즉 야훼신앙의 억압에 저항한 사람으로 보기도 하지요.
그런 예수를 (자기들도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배째라는) 삼위일체라는 설정을 들이밀면서 억지로 전쟁신이자 부족신인 야훼로 신격화해서 만든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정명석이나 이만희를 야훼라고 주장하는 종교들과 다를 바가 없죠.
브라만교의 억압에서 벗어나 개인의 깨달음을 얘기한 싯다르타의 가르침에 지옥이니 각종 신 등 다시 브라만교의 미신적인 요소들을 덧붙여 불교라는 종교를 만들어 종교놀음을 하는 거나
야훼신화의 억압에서 벗어나 사랑을 얘기한 예수의 가르침에 다시 야훼신화의 미신들을 덧붙여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어 종교놀음을 하는 거나 둘다 우스운 일이라고 봅니다.
세상의 목표와 방향을 '사랑'으로 보는지, 아니면 각자의 이익다툼과 힘싸움으로 보거나, 아니면 아무런 방향도 없는 무엇으로 생각하느냐에서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사랑하는 것이라는 기준을 세운 것이 예수라고 생각하기에.... 사회운동가라도 맑스와 같은 사회운동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내면의 사랑을 키워 세상을 조금이라도 사랑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 예수와 옳은 가치를 위한 투쟁을 벌여 세상을 바꿔놓는 혁명가는 조금은 거리가 있다 생각합니다.
물론 기득권에 위험시할만한 진보적인 인물임은 분명하구요..
한 인물을 종교적 관점에서 해석할 때와 사회적 관점에서 해석할 때의 방향은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겠지요.
개인적으로 저도 기독교인이고 말씀하신 그 '이신칭의'의 교리를 믿는 사람이지만, '이신칭의'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 보기에 상당히 비 합리적인 교리일 수도 있겠다 생각은 듭니다. 기독교인들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교리만 믿는, 그래서 비윤리적이고 양심에 따르지 않아도 되는 믿음을 갖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라고 비 기독교인들은 생각 할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믿음이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은혜는 값싼 것이 아니라 "공짜"이고(공짜와 값싼 것은 전혀 다른것입니다. 비싼 물건이어도 공짜로 받을 수 있지만, 돈을 주고 산다면 절대 값 싸게 살 수 없죠), 공짜로 받은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우리는 세상에서 '선행'으로 그 믿음의 결실을 맺어야 한다] 로 함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 함축문에서 뒷부분은 다 빼버리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 이거 하나만 갖고 '응 믿으면 다 돼' 라는 인식을 가진 가짜 기독교인들이 많아지다 보니 문제가 되는거죠(목사 중에도 엄청 많습니다)
사실 예수는 기득권을 타파하고 기존의 유착된 경제체제를 뿌리뽑는 일에 매진한 '사회운동가' 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당시의 기득권인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의 비리와 가식의 실태를 고발하는 동시에, 그들의 돈벌이중 하나였던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좌판(아마 높은 확률로 기득권 계층에게 자릿세를 냈을 것입니다)을 다 엎어버린 일화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 이 말씀에 매우 공감합니다.
자기를 높이고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의 형식만 강조하고, 그 속의 알맹이(사랑과 공의)는 버려 버리고, 율법을 자신의 칼로 쓰던 기득권의 위선과 가식을 정면으로 비판했다고 생각합니다.
위선과 가식으로 찬 기득권층은 요즈음으로 치면
'법과 원칙에 따라 하겠습니다.'라고 앵무새처럼 떠드는 세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세겨봅니다
하느님이야 다중인격 수준으로 갈팡질팡이고 예수가 주장한 것들에는 지금 봐도 좋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애초에 종말론과 심판을 기반으로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교도)을 모두 배척하는 게 핵심 교리인 종교인데다 세월이 너무 오래 지나서 시대에 뒤떨어진 부분이 너무 많죠.
모든 걸 사랑으로 포용하고 같이 나누면 참 좋겠습니다만 현실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어서 안타깝죠.
유대교는 자민족주의가 강한 종교였습니다만... 기독교는 보편종교로 진행되었구요.
예수가 종말론과 심판을 기반으로 이교도를 배척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대한민국 (주)개신교교회는 이교도 배척이 핵심교리가 맞다고 봅니다.
야훼는 다른 신을 믿는 자는 가족이라도 죽이라는 부족신이자 전쟁신이고,
예수는 반대로 사랑을 얘기한 사람입니다.
이만희를 야훼라고 하는 것처럼 예수를 야훼라고 신격화해서 만든 종교가 기독교인데 모순되는 두 요소를 붙여두었으니 당연히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싶다면 전쟁신 야훼 숭배 신앙은 배척하는 게 맞죠.
단지 세상을 사랑으로 사느냐 미움으로 사느냐 무관심으로 사느냐는 제가 선택할 수 있고 저는 사랑을 사는것이 옳다고 믿을 뿐이죠.
기독교는 온갖 모순된 교리에도 불구하고 "신의 뜻은 사랑"이라는 걸 전면에 내세워 세상에 깨우치고, 그대로 살아간 창시자를 가진 종교로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종교가 자신들의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대신 성전을 찾겠다고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고, 그런 천주교를 비판하던 개신교는 또한 자신들이 새로운 기득권으로 성전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암튼 뭐든간에 너무 의존적이 되면 좋지 않다고 봅니다
황금율에 대한 비판은.. 자신의 것을 황금율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에게 강요하는 상황에 대한 우려인 것으로 알고 있긴 합니다..
다만 예수의 가르침은 단순한 황금율 이상을 넘어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리를 가자고하면 10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주라 하지요. 그래서 오히려 현실적으로 인간은 그대로 지킬 수 없음은 인정하되, 그 방향을 잊지않고 조금이라도 따르면서 살 수 있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Vollago
당시나 역사적으로나 천주교가 비판 받을 부분은 없다고 생각치 않습니다. 오히려 교리적으로 구원에 성화가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에 대해선 저는 아무런 반대도 없는 편이구요. 사실 같은 "기독교"에서 마음에 드는 곳에 가셔서 사랑으로 사시면 된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당장 현실의 천주교와 교회들을 비교하면 교황님 때문이라도 현재 개신교의 위상은 참혹하죠. 지금 개신교하면 전광훈 등이 떠오르는데 천주교는 프란체스코 교황이니..ㅜ..ㅜ
저도 찾아보겠지만 혹시 어디서 보신 것이지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가톨릭 교리서 https://maria.catholic.or.kr/dictionary/doctrine/doctrine_view.asp 라든가 Joint Declaration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https://www.lutheranworld.org/sites/default/files/Joint%20Declaration%20on%20the%20Doctrine%20of%20Justification.pdf 정도는 참고해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https://kr.christianitydaily.com/articles/3369/20060724/%EA%B0%90%EB%A6%AC%EA%B5%90%C2%B7%EB%A3%A8%ED%84%B0%EA%B5%90%C2%B7%EA%B0%80%ED%86%A8%EB%A6%AD-%EC%B9%AD%EC%9D%98%EA%B5%90%EB%A6%AC-%ED%95%A9%EC%9D%98%EC%84%A0%EC%96%B8%EB%AC%B8-%EC%84%9C%EB%AA%85.htm
이에 따르면 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개신교인이다 보니 개신교 쪽 입장으로 쓴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재물로 받고 인간 모두의 원죄를 사하였다...고 해석합니다. "
이게 말이 되나요? 그러니까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스스로 예수로 환생해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음으로서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 했다는 식으로 이해한다는 말인거죠?
하하하... 삼위일체론을 모르는건 아니지만..
성경에 대해 일자무식인 저도 예수가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모습들이
성경 곳곳에 나오는걸 아는데.. 그럼 스스로에게 기도했다는 건데...
이 무슨 코메디 인지... 정말 기독교 신자들은 삼위일체론을 진지하게 믿는 건가요?
그외에 논리적인 모순이나, 삼위일체론이 이해가 가느냐... 저는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삼위일체라는 설정은 기독교인들 스스로도 설명을 못하겠다고, 배째라고 하는 내용으로
그걸 정확히 안다고 하는 사람은 이단/사이비라고 보면 된다고 할 정도죠.
하지만 그것이 기독교의 정체성이니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하는 거고....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여기서 믿는자 = 선한일을 행한자 라는걸 알 수 있죠.
야훼신화 계열 종교 중에서 유대교, 이슬람교 등은 그나마 넘지 않은 선을 넘은 거죠.
기독교인들이 정명석이나 이만희가 신이라고 믿는 신천지, JMS 신도 등을 조롱하는데, 제가 보기엔 누워서 침뱉기입니다.
김용옥 등이 얘기하듯이 전쟁신 숭배신앙이자 유대인들의 부족신화인 야훼신화는 야훼신화대로 두고, 예수의 사상은 예수의 사상대로 보면 될텐데
억지로 예수가 야훼라며 그가 주장했다는 사랑을 폭력과 배타의 신인 야훼에 끼얹으려고 하니 설정붕괴 투성이가 됩니다.
굳이 신이 예수를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자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불교에서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 유대교 문화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도 아주 그른 선택은 아니지 않았나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은 그냥 흘러왔다 자족하며 흘러가는 존재라는 아무런 구속 없음보다 저와 같은 구속이 더 마음에 들어 기독교인체 하고 살고 있습니다.
의지할 존재가 있다는건 초월적인 힘을 갖게도 하지만 나의 과오까지도 그 존재에게 던져두고 자신은 면죄부를 얻고자 하는것 같습니다.
인간은 편리함을 추구하고 아전인수가 본능인지라...
초월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겨우 로마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게 기독교죠...
대단히 역설적인 죽음인데.. 그조차도 전통적인 '이신칭의'론으로 그 역설을 무시하려 들죠. 아전인수가 인간의 본능 맞는 것 같습니다.
인간을 신으로 만드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자신의 잘못으로 피해를 받은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받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참된 회개를 통하여 구원받았고 새 사람이 되었다며 목사가 되고 떵떵거리며 삽니다.
참 슬픈 일입니다....
그들을 없애지 않고서는 계속 욕 먹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기독교 일까요?
그런데 아이들에겐 접근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원죄라는 개념의 가르침이 어떤 방향이든 아이들은 죄의식을 갖게 되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죄의식만큼 나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세상은 미워하고 이기면 사는게 아니라 사랑하면서 도우며 사는거야... 정도만 가르친다면 기독교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교육 같습니다.
개신교계에서 이를 바로 잡을 의지도 방법도 없기 때문에 아예 접근을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만희 개객끼 해 보세요.
이명박 개객끼 해 보세요.
/Vollago
구약과 신약은 서로 다르지만, 글 자체는 신약 위주네요. 구약에 대한 설명 없이는 신약 설명이 어렵습니다.
외식하는 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예수 이전에 개혁적인 존재였다는 건 아시죠? 종교개혁이 2번있었던 것도요.
자의적 해석은 사이비를 낳습니다. 가능하면 역사적 사실을 같이 넣길 바랍니다. 교회라는 단어도 글 속에 여러가지 의미를 섞어 사용하시네요.
그냥 예수를 믿는 주관만 강한 평신도라 오류는 많을 것 같습니다.
그저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사랑하고 살 것을 원하신다...가 제가 생각하는 기독교인지라 그 수준에서 쓴 글입니다. 자세히 가르쳐 주시면 듣겠습니다.
악랄하고 피를 흘리며 무자비하고 약탈하는 것. 이것이 참된 믿음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비기독교 국가에서 우리의 신앙이라면서 자행되는 일이다.
지옥을 들이대면서 벌이는 범죄를 성경이란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일이 오늘날 우리들의 기독교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만일 예수가 지금 이 세상에 있다면 그는 절대 기독교 신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의 종교는 끔찍한 종교일 뿐이다.
- 마크 트웨인
http://gyuhang.net/21
감동적인 표현이네요.
제가 생각하는 한국에서의 종교란 기복신앙이 메인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떠한 종교 심지어는 불교 마저도 한국의 기복신앙과 습한하여 특성을 가지게 됩니다.
이는 개신교, 천주교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이라는 행위 자체로 내가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즉, 믿기만 한다면 구원을 받게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구원이라는 것은 내세의 구원이 아닙니다. 현생의 구원을 의미하고 이러한 현생의 구원이 내생의 구원으로 이어진다는 순환적 생각을 한국 종교는 은연중에 만들게 되지요.
즉, 내가 신을 믿어 현생이 잘 살게 된다면 이는 내가 신을 믿고 행동하였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며, 이것이 구원의 증거로 이어지게 되는 겁니다.
기복 신앙의 중요한 정신은 바로 위와 같은 현생을 구원하게 되는 점입니다.
따라서, 내가 잘 못 사는 것은 잘 살기 위한 시련이며 나는 잘 살게 될거야 라는 간단한 구조로 종교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힘든 모든 조건은 신의 시련이며, 이를 견디면 잘 살게 될 것이다.(많은 컬트 종교들이 이러한 정신적 믿음의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에서 잘 살게 된다는 것은 불교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고 난 뒤의 구원을 약속받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내용을 대대적으로 지금은 힘들고 다음에는 더 힘들겠지만 죽은 후 구원받으실 겁니다. 하면 장사가 안될 겁니다.
따라서 종교에서 신의 말씀을 믿고 하는 선한 행동은 그저 내가 잘 살기위한 한가지 방법으로 치부되어 버리기 일 수 입니다. 내가 너무 힘들게 살거나 좋아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으며, 그저 믿는 다는 행위만으로도 죽은 후에도 구원받을 수 있을거고, 현재의 행위는 내가 현재를 잘 살기 위한 방법이므로 지금이 힘들 경우 언제든지 치워버릴 수 있는 행동의 양식으로 치부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저는 마틴 루터가 재창했던 모든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점을 매우 높게 사고 있습니다. 이 말은 내가 신과 1:1로 만나겠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종교인이 가져야하는 소양은 신의 말씀이 진짜 이러한 뜻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공부하고 또 공부하는 사람이 종교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돌무더기님의 고민은 좋은 고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고민하고 또 의심하고 또 공부하는 종교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실 저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종교를 가짐으로서 가지는 내적평화는 사실 치열한 자기 투쟁안에서 휴식 시간에만 이루어짐으로 항상 인간은 치열하게 내적으로 생각하고 공부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씨앗을 뿌린다고 하셨는데 돌무더기님 안에서 사랑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무엇인지 조금은 궁금합니다. 신의 사랑은 예수를 보아 희생의 면이 크게 부각되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돌무더기님의 사랑도 희생이라는 단어와 치환되어 사용될 수 있을까요? 분명히 아니실 겁니다. 다시 한번 신의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랑에 희생이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치환까지는 아니겠지요. 사랑이 더 큰 개념이니. 희생없는 사랑은 거의 없다고 생각은 합니다.
어떤 질문이신지 더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지요..?
사실 글로 쓰다가 보니 엄청나게 길어지고 난해해보이는 문장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위와같이 엄청나게 어려운 질문은 본디 아니였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종교인 돌무더기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씨앗이 단순히 무엇인지 그 정의가 듣고 싶다." 라는 생각에서 드린 댓글입니다.
아래는 제가 왜 사랑의 씨앗이라는 말이 궁금한지에 대해서 조금 더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아 보았습니다. 즉 사랑의 씨앗으로 표현되는 행동은 신의 사랑에 대한 정의에서 나오는 행위인가가 요지가 될 수는 있겠습니다. 따라서 신의 사랑에 대한 정의가 하신 말씀중에서는 조금 중요할 것 같습니다. 하하..
맑스의 글 중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라고 전제한다면 그대는 사랑을 사랑과만, 신뢰를 신뢰와만 등으로 교환할 수 있다. 그대가 예술을 향유하고자 한다면 그대는 예술적인 교양을 갖춘 인간이어야만 한다. 그대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그대는 현실적으로 고무하고 장려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인간이어야만 한다. 인간에 대한 - 그리고 자연에 대한 - 그대의 모든 관계는 그대의 의지의 대상에 상응하는, 그대의 현실적·개인적 삶의 특정한 표출이어야 한다. 그대가 사랑을 하면서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사랑으로서의 그대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대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그대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그대를 사랑받는 인간으로서 만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것이요, 하나의 불행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맑스가 말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기에는 조금은 무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위의 비유는 자본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서 자본으로 인간의 사랑과 신뢰가 교환된다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서 말한 내용이라고 배웠습니다. 다만, 신의 사랑에 희생이 속해있다면 그 희생에 대해서 돌무더기님께서 어떠한 교환물로서 신의 사랑에 답하고 있는지가 궁금한 합니다. (즉 신의 사랑에 대해서 정의가 된다면 어떠한 특정 행위가 신의 사랑에 대한 교환물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신의 사랑에 우리가 답하는 것은 단지 믿음 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답하면 신의 희생에 대한 교환이 아닌 신이 인간을 믿었기에 우리는 신을 믿는 구조가 되어 버릴것입니다. 따라서 신의 사랑에 대한 종교인의 교환물로서 믿음이라는 교환물이 저에게는 조금 이해되지 않습니다.
신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신이 인간의 구원을 약속했기에 때문이며, 약속에 대한 신뢰가 신뢰로서 교환되기 때문에 믿음은 신에 대한 사랑의 교환물로서는 작동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신의 사랑은 믿음 이외에 행위나 행동으로 교환되어야 하는데 여기서 돌무더기님이 생각하시는 사랑에 대한 정의는 신의 사랑에 대한 정의로서 교환물을 생성하게 될 것이고, 저는 종교인인 돌무더기님을 통해서 종교인이 가지는 어떠한 양식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될 기회를 얻게 될것입니다.
저는 신을 믿는 종교인이라면 신에 대한 사랑의 교환으로 종교인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초월을 이야기하는 불교를 제외한 많은 종교에서 신의 사랑에 대한 답변으로 내놓을 수 있는 교환물은 무엇인지가 궁금합니다 십일조나 헌금이라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맑스가 인간 관계가 자본으로 대치되는 것에 대한 엄청난 경각심을 품고 있었고 그의 생각에 저는 동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화가 되니 무척이나 기쁘네요. 물론 일하는 중에 월급루팡을 할 수 있어 더 좋네요.
제가 일과시간중 마지막 업무 하나를 처리해야 할 긴박한 입장이라...;;;
사랑, 섬김, 희생.. 같은 것들이 기독교의 사랑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사랑이냐? 라고 하면 어쨌거나 기독교는 삼위일체니 예수님이 베푼 사랑도 사랑이겠죠. 예수님은 제자를 섬기고 아픔에 공감하고 고쳐주고 뭐 그러시다가 자기의 목숨을 희생했군요. 어쨌거나 정통적인 견해로는 대속물로... 그러니 그 신도들이라면 그들도 사람을 섬기면 될 일입니다. 예수님이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라고 하였으니.. 사실 전능한 신에게 다시 무엇을 바친다는 것은 의미 없잖습니까...? 대신 신이 세상에서 원하는 그림을 우리가 그리는 것은 의미가 있겠지요.
신이 원하는 세상이 피조물들이 서로가 서로를 희생하고 섬기는 세상이라면 그에 따르는 것이 그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겠지요.. 신이 자기의 분신(?.. 어쨌거나 독생자..)을 보내 희생시킬만큼... (저는 본을 보여준 것으로 해석하는 쪽이 더 잘 이해됩니다.. 인간이 살아가야 할 길을 신이 인간이 되어 보여준 것이라..) 어째거나 피조물을 사랑한 것은 분명한 것이니... 그 신이 원한 것을 해주는게 맞겠지요.
그가 원한 것은 인간끼리의 사랑섬김희생과 같은 것들이고요... 답이 되시나 모르겠습니다. 일단 일을 좀 마무리하러 가보겠습니다..
어떤 좋은 뜻을 갖고 시작했다 해도 결국 구습이 되는 순간이 올 수 밖에 없고
언젠가는 그것을 혁파해야 하는데 이런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언제나 엄청난 에너지의 충돌을 야기하고
그것이 현재에 와서는 전쟁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신교 500년의 세월이 흘러 개신교도 어떤 방식으로든 혁파가 필요할 때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일반인의 입장에서 말씀드려보면 이 글 읽기가 별로 내키지 않는데, 기독교 교리에 대한 내용이 잔뜩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인에게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시려는 신자분들을 가끔 보는데 안타깝습니다. 저는 기독교 교리에 대해 하나도 관심이 없거든요. 재미도 없고, 길고, 알 수 없는 전문 용어가 사용되고, 심지어 이 전문 용어들이 주는 어감도 고전적이라고 할까요? 고리타분한 느낌을 주는 것들이 많습니다.
아시고 계신 것 같지만 저같은 사람에게 기독교의 이미지는 굉장히 않좋은데 이걸 바꾸고 싶으시다면 행동으로 보여주셔야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광훈같은 사람을 교단에서 쫓아내려는 시도를 한다거나, 신자들이 십시일반 힘을 합쳐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거나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면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을 거에요.
기독교는 유독 직접적인 전도를 많이 하는데, 그보다는 평소 살아가시는 모습으로 설득력을 얻으시는 방법을 추천드립니다.
신천지나 JMS 신도들 같은 경우는 그나마 이런 게시판에 공개적으로 자기네 교리를 장황하게 늘어놓지는 않는데
기독교인들 같은 경우는 자기네는 그래도 된다고들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 제가 교회를 다닌지가 30년 쯤되고.. 신자라고 스스로 생각한지가 10년이 좀 못되는데... 기독교적 용어를 마음으로 쓴게 채 5년 정도인것 같습니다. 가령 '은혜'받았다거나.... 그 의미가 와닿지 않게 사용하는 것이 많으니 비기독인들은 불편해하는게 당연하죠. 마치 운동권시절 운동권 용어처럼요.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아무래도 아주 관심 없는 분을 대상으로 한 글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잘 아시는 분들이 보면 어이없는 구석이 여럿 보이는 글일 것 같습니다.
전도의 의도는 없다고 보셔도 되구요. 마지막 말씀처럼 평소 살아가는 모습이 전도가 되는 수준이 되어야 기독교가 어디가서 떳떳하겠지요. 제가 하고 싶었던 말도 그것입니다.
다만 평소 살아가는 모습이 주일 평일 가리지 않고 열심히 교회 다니며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히 헌금 내는 모습이 아니라... 엥간하면 따뜻한 마음과 시선으로 사람을 보듬고 지지해주며 중심 잡는 사랑의 모습이어야 하겠지요.
그런 것이 믿음의 모습임을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신천지나 JMS에 빗대 쟤들은 지들이 숨어서 해야 할 것들인지는 아는데.. 정도의 의도로 비아냥 하시려는 의도이신 것 같긴 하군요.
물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 어떤 생각을 하시든, 어떤 말씀을 하든 자유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과 반응이 있는 거구요.
그와 별개로 남이 하는 욕과 비아냥 등의 행위가 정도를 넘으면 형법으로 처벌되죠.
반응이 비아냥 아니냐고 여쭌것이고요.
제가 모공에 제 관심사를 푼것은 무례가 아니지만.. 님께서 제 글에 비아냥거리는 댓글을 다신다면 무례지요.
클리앙에 남녀차별주의, 나치즘, 메갈, 일베, 신천지, 국힘당 류의 의견이 올라오면 무지하게 심한 말들이 달리지요.
저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야훼 숭배 또한 위의 것들처럼 해악이 큰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고, 별로 호의적이지 않은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고방식들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그들이 인류에 대해 무례를 범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우리 민주주의 사회와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이니 우리 사회에서 퇴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어쨌든 제글에서도 님께서 제일 거치신데... 제가 이해못할 독선적 배타적 폭력적인 예수숭배를 이야기한 것 같지는 않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위에 다른 댓글에도 썼지만, 저는 싯다르타나 예수나 나름 그 시절의 억압적인 종교에 저항한 인물들이리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을 거꾸로 이용해서 다시 종교를 만들고 다시 똑같이 종교놀음을 하는 사람들이죠.
저는 김대중이나 전태일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폭력에 저항한,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은 사람들이 예수같은 삶을 산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신격화하여 숭배하는 사람들은 이런 전태일 같은 사람들을 신이라고 부르며 엉뚱한 자기들만의 게임을 하는 거나 비슷한 꼴이라고 생각하는 거구요. 게다가 그 신격화하여 갖다붙이는 대상이 고대 이스라엘 부족의 너죽고 나살자는 전쟁신이라니...
돌무더기님 같은 기독교인들을 포함해서 신천지, JMS, 통일교, 각종 음모론자 등등은 계속 자기 믿음을 전파하려고 할 거고, 아마 외부의 증거들을 아무리 접해도 설득되지도 않을 겁니다.
어쩌겠어요. 그런 것들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거라도 계속 얘기할 수 밖에요.
지금 이 글에 달린 댓글들 중에도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댓글들이 꽤 되는데, 아마 10년 전, 20년 전 쯤에는 반대였을 겁니다. 무작정 '종교는 좋은 것, 문제가 있어도 신도들이 나쁜 거지 종교 자체는 비난하면 안되는 것'이라는 식의 편견에 사로잡힌 댓글이 훨씬 많았을 거예요. 예전엔 흡연이나 남녀차별적, 인종차별적 언행이 당연한 건 줄 알고 살다가 그래서는 안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왔듯이 야훼신화 계열 종교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되어오고 있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라서 비난하지 말자..는 이야기만큼이나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든, 종교얘기니까 부정적인 언사를 해도 된다는 모습도 적절치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앞 쪽 댓글에도 있듯 전도는 삶으로 하는 것에 저도 동의하므로, 제가 굳이 여기서 이런 글로 기독교를 전도할 이유도 없고 아마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제글로 전도가 된다고 생각치도 않을 것 같습니다. 아마 복음을 왜곡한다고 말씀하시겠지요.
세상을 살면서나홀로 전우주에 먼지 같은 존재로 태어나 아무 의미 없이 살다 가면 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이 모든 세상의 존재가 서로 얽혀 구별할 수 없는 것들이니 그걸 내려 놓고 고통 없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인가 우리를 창조한 뜻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구요. 인간은 각자 자신만의 고독과 허무를 이겨내는 방법이 있겠고 이를 비난할 이유가 있을까요.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아무런 목적이 없이 그저 왔다 가느냐, 아니면 어떤 의미 속에서 사느냐... 라는 선택에서 저는 의미를 갖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느냐, 팃포댓 전략으로 사느냐, 무관심으로 사느냐, 이기적으로 사느냐, 나 홀로 모두를 짓밟고 사느냐.. 중에서 저는 첫째가 마음에 듭니다.
알고보니 예수가 그런 이야기를 2000년전에 먼저 하고 그에 따라 살다 갔습니다. 제게 그가 신이든 무엇이든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가르치고 행한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 가능하면 따르고 싶을 뿐이니까요(물론 그는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고 선언하긴 합니다..그것이 불교적인 차원의 이야기인지 진짜 유일신의 삼위일체적 현존이란 소리인지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만일 예수가 세상은 나를 믿고 모두를 짓밟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으면 저는 기독교를 안믿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모두를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했으니 믿을 마음이 생긴 것이지요. 예수의 존재를 확신해서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에 믿을 의지가 생긴 것에 가깝습니다.
님께서도 님께서 마음에 드시는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아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넷 감사합니다-
그무엇이든 예수팔아 돈버는 업자들로 밖엔 안 보입니다. 신도들은 돈만 빨리는거고요.
그래서 개독이라고 욕 먹는거겠죠.
/Vollago
순복음은 형식상으로라도 예수님을 팔긴 하지요..
어디가 더 나쁜놈들은지는 좀 애매하군요...
비신도 입장애선 그넘이 그넘입니다. 장사꾼들이죠.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예수팔아 돈벌이, 여신도 겁탈 등.
/Vollago
다만... 예수는 역사적으로도 막되먹은 사람이라는 흔적은 없고, 사랑하라고 말하고 자기가 잡혀 죽는데서도 사랑하라고 죽은 사람이라면... jms와 이만희와 비교되기는 좀 그렇다고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예수를 팔아 지들 뱃속을 채우는 놈들이나, 지들이 새로운 예수라고 주장하는 놈들이나 어떤 넘을 신이 더 나쁜놈이라 판정하실지는 모르겠군요..
세속의 기준으로는 그넘들이 한 범죄들로 판단하면 될 것이구요..
/Vollago
하면서 헐레벌떡 욕하러 온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좋은 글이네요. 현재 기독교인들이라 불리는 자들이 다 한번씩 읽고 이야기 나누게 하고픈 글입니다.
행복하세요.
최근 교회내 동성애 혐오정서의 기저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멀다고 느낍니다. 이거 이외에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현저히 멀어진 부분이 많지요.
기독교가 성경을 통해서 알려주는 교리 또는 메시지는 워낙 광범위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큰 틀에서는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됩니다. 진리가 모두에게 명확하고 선명하게 드러나있으면 참 편하겠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진리를 탐구해나가야 하는 존재이니 서로 간의 해석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네요.
저도 요즘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는 중이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