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프리드님 실록의 기록은 선조의 입김이 닿을 수가 없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정형은 원균과는 어떠한 인연이 있었는지 궁금해집니다(파벌이라돈지 개인적인 연이라던지). 실록은 이정형의 말(혹은 이정형의 원슌에 대한 평가)을 담았고, 비변사에서 올린 “원균이 있을 때보다 못하다” (이건 세를 말하는 것 같은데요, 원균의 실력을 평하는게 아니라) 역시 비변사의 평가니까요. 실록은 당시의 대화 등을 기술했으니 그 역시 난중일기와 마찬가지로 원균을 평가하기엔 정확하다 하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개인적인 생각을 적은 일기 vs 신료들의 주관이 들어간 평가가 기술된 실록. 이러고 생각됩니다)
지그프리드
IP 125.♡.201.36
09-23
2022-09-23 23:3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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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ik님 위 백승종 선생님 페이스북 링크 참고 부탁드립니다. 원균을 두둔하던 쪽은 아니라고 하시네요
meik
IP 178.♡.239.143
09-24
2022-09-24 00: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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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프리드님 페이스북의 글과 전북의 소리에 올리신 한치윤의 사료도 읽어 보았습니다만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김응서의 탓으로 명과의 작전이 일본 측에 알려져서 결과적으로 조선의 군대만이 출전했다고 하는데 (자세한 얘기는 없더군요) 수륙병진을 원하던 원균은 왜 홀로 조선군만을 이끌고 출전하게 되었는지, 명과의 합동작전이라면 그 전까지 긴밀한 소통이 없었는지, 직전까지의 소통으로 명이 샅이 출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 출전했지만 명군은 없었고 일본군도 자리를 비우고 매복을 한 터라 빈손으로 돌아오는 길에 당한 것인지, 명확하지가 않더군요. 심지어 수적 열세로 매복한 일본군에게 당했다고 쓰여 있던데, 명군이 없어서 수적 열세였다는건지, 일본군에 대한 정찰이나 정보도 없이 명군이 없어도 된다는 식으로 진격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매복에 당했다는 건지 알 수가 없네요.
페북에 쓰인 글과 한치윤의 사료는 저에게 “공적에 조바심이 난 장군이 합동작전이 초기부터 틀어졌슴에도 무리하게 진행하다가 매복에 몰살 당했다” 로 읽힙니다. 링크의 (가) 는 제사에 보낸 제문이니 딱히 재평가의 자료가 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제문에 설마 한나라의 군주가 안젛은 말을 쓸리는 없으니까요 - 어지간하면 좋게, 조금은 부풀리기도 해서 쓸거라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저 무얼로 어떻게 재평가를 하겠다는건지 아리송합니다. 물론 제가 사학자도 아니니 그저 일반인이 가질 수 있는 의문 정도로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지그프리드
IP 125.♡.201.36
09-24
2022-09-24 00:4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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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ik님 네. 저도 평소부터 백승종 성생님의 깊이있는 좋은 글들을 오랜기간 읽어오고 감탄도 하고 했어서, 이번 원균 건을 쉽게 내려놓기가 잘 안되네요. 무시하기에는 그간 백 선생님의 글과 연구가 너무 뛰어나고요. 원사료를 직접 접하지 못한 일반인들이 감히 반박하기에는 공부의 깊이가 너무 다릅니다.
난중일기가 중요한 사료라면 왕이 내린 제문 또한 중요한 사료일 수 밖에 없고요. 난중일기가 비공식기록이라면 제문이나 실록은 공식기록이니까요. 학자 입장에서는 종합적으로 판단을 할 수 밖에 앖고 어려운 숙제일 수 밖에 없습니다.
여담입니다만, 100년 뒤 학자가 2000년대 정부의 업적을 관보와 조중동을 보고 연구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주제입니다.
얼룩배기황소
IP 121.♡.189.248
09-24
2022-09-24 01: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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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프리드님 실록이 문제가 아니라 아랫사람 동원해서 여론형성하는거야 흔히 하는 짓들이고 장수는 결과로 판단합니다. 원균은 패전했고 이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백승종 저 분 한 때 존경씩이나 했는데요ㅠㅠ 사료에 있으면 역사적 맥락 따위 무시하고, 수백년 동안 지속된 사람들의 평가 무시하는 그런 분이셨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출세욕 명예욕만 있는 줄 알았는데 관심병도 있으실 줄이야. 원가들의 후원을 받나봅니다. 원유철 이 분도 같은 집안으로 알고 있는데. 정말 에휴입니다.
/Vollago
비겁한 장수가 아니라
역대급 어그로죠.
지능을 칠천량에 수몰시켰나 ..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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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원균보다 더 악랄해보이네요.
일본으로 치자면 무타구치렌야 급..
존경하는 역사학자이신 백승종 선생님께서 사료를 바탕으로 원균의 재평가를 말씀하고 계시긴 합니다. 이순신과 원균의 사이가 나빴던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므로 난중일기가 원균에 대하여 편향되게 서술한 점은 감안을 하고 읽어야 합니다. 그 외에 사료가 생각보다 많네요.
백승종 선생님 페이스북에 더 많은 주장이 있습니다. 백데이터를 가지고 전문가가 하는 주장이라 반박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백선생님의 원균을 제외한 다른 주제의 다른 글들도 대단히 깊이가 있습니다.
실록의 기록은 선조의 입김이 닿을 수가 없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정형은 원균과는 어떠한 인연이 있었는지 궁금해집니다(파벌이라돈지 개인적인 연이라던지). 실록은 이정형의 말(혹은 이정형의 원슌에 대한 평가)을 담았고, 비변사에서 올린 “원균이 있을 때보다 못하다” (이건 세를 말하는 것 같은데요, 원균의 실력을 평하는게 아니라) 역시 비변사의 평가니까요.
실록은 당시의 대화 등을 기술했으니 그 역시 난중일기와 마찬가지로 원균을 평가하기엔 정확하다 하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개인적인 생각을 적은 일기 vs 신료들의 주관이 들어간 평가가 기술된 실록. 이러고 생각됩니다)
김응서의 탓으로 명과의 작전이 일본 측에 알려져서 결과적으로 조선의 군대만이 출전했다고 하는데 (자세한 얘기는 없더군요) 수륙병진을 원하던 원균은 왜 홀로 조선군만을 이끌고 출전하게 되었는지, 명과의 합동작전이라면 그 전까지 긴밀한 소통이 없었는지, 직전까지의 소통으로 명이 샅이 출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 출전했지만 명군은 없었고 일본군도 자리를 비우고 매복을 한 터라 빈손으로 돌아오는 길에 당한 것인지, 명확하지가 않더군요. 심지어 수적 열세로 매복한 일본군에게 당했다고 쓰여 있던데, 명군이 없어서 수적 열세였다는건지, 일본군에 대한 정찰이나 정보도 없이 명군이 없어도 된다는 식으로 진격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매복에 당했다는 건지 알 수가 없네요.
페북에 쓰인 글과 한치윤의 사료는 저에게 “공적에 조바심이 난 장군이 합동작전이 초기부터 틀어졌슴에도 무리하게 진행하다가 매복에 몰살 당했다” 로 읽힙니다. 링크의 (가) 는 제사에 보낸 제문이니 딱히 재평가의 자료가 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제문에 설마 한나라의 군주가 안젛은 말을 쓸리는 없으니까요 - 어지간하면 좋게, 조금은 부풀리기도 해서 쓸거라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저 무얼로 어떻게 재평가를 하겠다는건지 아리송합니다. 물론 제가 사학자도 아니니 그저 일반인이 가질 수 있는 의문 정도로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난중일기가 중요한 사료라면 왕이 내린 제문 또한 중요한 사료일 수 밖에 없고요. 난중일기가 비공식기록이라면 제문이나 실록은 공식기록이니까요. 학자 입장에서는 종합적으로 판단을 할 수 밖에 앖고 어려운 숙제일 수 밖에 없습니다.
여담입니다만, 100년 뒤 학자가 2000년대 정부의 업적을 관보와 조중동을 보고 연구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주제입니다.
몇년내 반은 황천길 갈텐데
인생을 허비하고 있네요
나라가 꼴이 우스워져서인가
별게 다 튀어나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