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녹취록입니다.
사단법인 한국엔지니어클럽
일 시: 2010년 6월 17일 (목) 오전 7시 30분
장 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521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2층 국화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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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 기록의 정신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왜?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 쓰는 사람만 다냐, 글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錚)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조금 김새시겠지만 기록의 문화입니다.
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저는 못 가봤지만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 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셨지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 왕이 ‘국민 여러분,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 ‘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앉아있습니까?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 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중략)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들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 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놨습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습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 아까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습니다. 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입니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납니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입니다.
○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입니다. 왕들의 일기입니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습니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습니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언젠가는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을 전부 한글로 번역합니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은 개략적이나마 번역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하고 나면 그 다음에 영어로 하고 핀란드어로 하고 노르웨이어로 하고 덴마크어로 하고 스와힐리어로 하고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에 탑재한 다음날 전 세계 유수한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인 여러분, 아시아의 코리아에 150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습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의 일기가 있습니다. 실록이 있습니다. 혹시 보시고 싶으십니까? 아래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당신의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1,000만이 되고,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면 이 사람들은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야,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 우리나라는 뭔가.’이러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면 국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못 하고 있을 뿐입니다.
○ 이러한 기록 중에 지진에 대해 제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 약진입니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습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 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진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 정치, 경제적 문제
○ 그 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년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만 8,000, 반대가 7만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법률 문제
○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과학적 사실
○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동양에서는 어떠냐 하면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입니다, 주희. 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중략)
우리 세종이 대단한 왕입니다. 몸에 피부병이 많아서 온양온천을 자주 다녔어요. 그런데 온천에 다닐 때도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리고거를 끌고 갔어요. 그래서 한양과 온양 간이라도 길이를 정확히 계산해 보자 이런 것을 했었어요. 이것을 가지면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원주를 파이로 나누면 지름이다 하는 것이 이미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 수학적 사실
○ 그러면 우리 수학의 씨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것인데요,
여러분 불국사 가보시면 건물 멋있잖아요. 석굴암도 멋있잖아요. 불국사를 지으려면 건축학은 없어도 건축술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최소한 건축술이 있으려면 물리학은 없어도 물리술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물리술이 있으려면 수학은 없어도 산수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게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졌던 의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지었을까.
그런데 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선생님을 너무 너무 존경합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에스파냐, 스페인에 있습니다. 1490년대에 국립대학이 세워졌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는 1600년대에 세워진 대학입니다. 우리는 언제 국립대학이 세워졌느냐, ‘삼국사기’를 보면 682년,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것을 세웁니다. 그것을 세워놓고 하나는 철학과를 만듭니다. 관리를 길러야 되니까 논어, 맹자를 가르쳐야지요. 그런데 학과가 또 하나 있습니다. 김부식 선생님은 어떻게 써놓았냐면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명산과입니다. 밝을 明자, 계산할 算자, 科. 계산을 밝히는 과, 요새 말로 하면 수학과입니다. 수학과를 세웠습니다.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안 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졸업하게 되면 산관(算官)이 됩니다. 수학을 잘 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서 찾아보십시오. 수학만 잘 하면 공무원이 되는 나라 찾아보십시오. 이것을 산관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산관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 산관이 수학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됩니다. 산관들은 무엇을 했느냐,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다시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가서 했습니다. 세금을 매긴 것이 산관들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수학 상황을 알려면 무슨 교과서로 가르쳤느냐가 제일 중요하겠지요? 정말 제가 존경하는 김부식 선생님은 여기다가 그 당시 책 이름을 쫙 써놨어요. 삼개(三開), 철경(綴經), 구장산술(九章算術), 육장산술(六章算術)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구장산술이라는 수학책이 유일합니다. 구장산술은 언제인가는 모르지만 중국에서 나왔습니다. 최소한도 진나라 때 나왔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좋은 책이면 무조건 다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 8장의 이름이 방정입니다. 방정이 영어로는 equation입니다. 방정이라는 말을 보고 제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저는 사실은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부터 방정식을 푸는데, 방정이라는 말이 뭘까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어떤 선생님도 그것을 소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보니까 우리 선조들이 삼국시대에 이미 방정이라는 말을 쓴 것을 저는 외국수학인 줄 알고 배운 것입니다.
(중략)
저는 이런 소망을 강력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초등학교나 중·고등 학교 책에 플러스, 마이너스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우리 선조들은 늦어도 682년 삼국시대에는 플러스를 바를 正자 정이라 했고 마이너스를 부채, 부담하는 부(負)라고 불렀다. 그러나 편의상 正負라고 하는 한자 대신 세계수학의 공통부호인 +-를 써서 표기하자, 또 π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682년 그 당시 적어도 삼국시대에는 우리는 π를 밀률이라고 불렀다, 밀률은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뜻이다, 오늘 컴퓨터를 π를 계산해 보면 소수점 아래 1조자리까지 계산해도 무한소수입니다. 그러니까 무한소수라고 하는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이 말은 철저하게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밀률이라는 한자 대신 π라고 하는 세계수학의 공통 부호를 써서 풀기로 하자 하면 수학시간에도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없는 것을 가지고 대한민국이 세계 제일이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선조들이 명백하게 다큐멘트, 문건으로 남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그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서양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것이 전부 정리되면 세계사에 한국의 역사가 많이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났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인 세계사를 풍성하게 한다는, 세계사에 대한 기여입니다.
◈ 맺는 말
○ 결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자료는 한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조들이 남겨준 그러한 책이 ‘조선왕조실록’ 6,400만자짜리 1권으로 치고 2억 5,000만자짜리 ‘승정원일기’ 한 권으로 칠 때 선조들이 남겨준 문질이 우리나라에 문건이 몇 권 있냐면 33만권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위에 한문 전공한 사람 보셨습니까?
정말 엔지니어가 중요하고 나로호가 올라가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 국학을 연구하려면 평생 한문만 공부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이러한 자료를 번역해 내면 국사학자들은 국사를 연구할 것이고, 복제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복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경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경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수학교수들은 한국수학사를 연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이 우리나라에는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문을 공부하면 굶어죽기 딱 좋기 때문에 아무도 한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문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동경대학으로 가고 북경대학으로 가는 상황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되냐 하면 공대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물리학사, 건축학사가 나옵니다. 수학과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허벅다리, 갈고리를 아! 딱 보니까 이거는 삼각함수구나 이렇게 압니다. 밤낮 논어·맹자만 한 사람들이 한문을 해서는 ‘한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회에 나가시면 ‘이 시대에도 평생 한문만 하는 학자를 우리나라가 양성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여론을 만들어주십시오. 이 마지막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런 데서 강연 요청이 오면 저는 신나게 와서 떠들어 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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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대해 비하하는 마음이 저도 있었는 데,
25년마다 일어나는 민란/ 임진왜란의 의병등등
이래 저래 풀뿌리 백성들이 지킨 나라라는 생각이 드네요.
교수님 인터뷰도 있습니다...
내용이 길어서 중간중간 잘라내다보니 빠졌냐봐요 😅
허성도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명예교수님이세요
허성도 교수님 좋은 분이시죠.
고려말 명나라 초기 운하로 배가 줄을 서며 다니지만 조선은 성리학과 농업 그리고 자급자족 산업에 기초한 관료주의 국가이지요.
기록을 잘했다고 하는데 사건 서술적 기록은 잘 되어 있지만 수치적 기록은 매우 빈약합니다. 광해군이 궁궐을 짓는데 정철 몇 근 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가장 구체적인 수치 기록이지 나머지는 많다 적다로 표기하여 도대체 재현이나 평가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역사전공 교수들과 이부분에서 문답하다 얻은 것입니다.
또다른 예로 성곽을 보수 공사하는데 산성의 구체적인 제원이나 인력수, 들어가는 식량이나 재원 등의 수치가 미약한 것이 조선의 기록 문화라는 것이죠. 거북선을 재현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그 많은 기록들의 특징이 이렇다면 우리는 단순한 기록만을 한 조선을 국뽕으로 바라봐야 하느냐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진짜 거북선도 2층인지 3층인지도 모를 정도로 수치 기록은 도외시 했더라구요.
그러나 지금도 업종별로 재고나 원가 관리의 차이가 있는거처럼 조선은 농업 몰빵 관료주의 였고 임금의 역할도 결국 농업으로 백성 밥먹여 주는게 주임무였던거 같습니다.
상업이 발달하고 자본이 모이는 구조가 있었으면 조세 제도나 통계가 발달했을텐데 그런거 보다는 그냥 농업 몰빵하고 외세는 제한한 폐쇄적 국가 운영을 기조로 했던거 뿐이라고 봅니다.
지금에야 우리도 대항해시대도 하고 네덜란드랑 무역도 했으면 하지만 중상주의 국가 개념조차 없는데 그게 백성들과 조정에 도움이 될게 없지요. 오히려 왕실이나 귀족이 사치품을 탐했으면 발전했을 수 있겠지만 그러지도 않았구요
포르쉐를 타고 싶은데 국가 예산의 어느부분을 돌리고 장터 갑돌이에게 돈 이자 몇리로 쳐서 빌려 사면 되다는 고안을 해야 하는데 사회와 시스템이 성리학에 없으니 그냥 티코를 타면서 학문을 증진한다는 것이죠.
조선왕조실록은 근처의 후대가 보기위한 역사서가 아니라 우리도 볼수 없는 먼후대를 위한 자료이고요. 광해군을 비판하기 위한 정철 사용량이 나오는데 그것이 구체적인 수치이고요.
수원성 의궤와 같은 자료가 전무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성을 보수하기 위해 그. 이후의 자료가 누적 되었냐를 볼 때 없다고 생각합니다.
건국이후 성리학과 농경을 근본으로 한 관료주의 틀에만 빠져서 국가발전의 저해했다면 비판해야 하지요. 아니 지배층이 국가의 변화를 시도했나요?
그 가치관이 잘못된 결과로 가지고 온 것이죠.
그당시 동아시아 국가..중국 일본 등과 대등하게 견 줄 수 있었을까요? 정조때가 되면 일본은 우리를 무시합니다. 중국에 조공외교하면 조선은 건국 시절과 다를바 없고요.
지금 우리는 다르지요. 모르면 배우러 가고 비교하고 있지요. 70년대 중화학공업 90년대 반도체에만 머무르지 않고 변화하지요. 오히려 북한이 조선과 비슷하지요. 예나 제나 그대로.
조선이 상공업으로 못간건 재정적자입니다. 잉여생산품이 폭발을 해야 자연스럽게 상공업으로 전환 됩니다. 이건 누가 주도한다고 바뀌는게 아니예요. 잉여자본이 폭발하면 자본주의로 전환되는것처럼
세종때 그렇게 화폐경제체제 전환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죠. 하지만 정조 때 와서는 화폐경제로 전환이 됩니다. 이앙법으로 잉여생산품이 폭팔했거든요.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탄생한 타임라인들을 보세요.
일본이 전국시대 막판쯤에 상업이 발달했던 이유는 특유의 봉건제의 도시경영이 있었지만 세계 3위 은광산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돈이 펑펑 나왔던거죠. 때마침 당시 글로벌 화폐는 은이였고요. 땅에서 돈이 쏟아진거죠.
전국시대면 나라가 피폐하기 마련인데 재정이 든든 했거든요. 그렇니 에도막부에 상업이 자연스럽게 발달할수밖에 없었던거죠.
그리고 에도막부가 들어서자 일본도 관료주의로 바뀝니다.
어느 문명에서도 세율보고 사치한 나라가 없습니다. 사치하면 세리들이 알아서 가렴주구를 하는거죠
포르쉐같은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그렇겠지만 옆나라에서 아방궁도 만들었고 금관도 만들었던 나라가 티코타면서 인지부조화 하는거라도 보는건 역시 명품이 세상 최고야 하는 가치관이 있을때 말인거죠.
신교가 처음 나왔을때 청교도 윤리관은 조선 왕조 비하지 못할 정도로 금욕적이었습니다. 아니 그 전에도 기독교는 천년을 넘게 별 철학 없는 경전만이 정치 경제 법률을 숭배하고도 로마발로 천년을 살았죠
조선만큼의 관료제에 묶인 나라도 드물지요. 어느 수준까지는 맞지만 그것을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뒷면이 성리학과 농본사상이 있었고요.
일본과 중국의 생산력이 높다면 배워오고, 자랑스런 조공무역이나 사신을 파견하면서 기술을 습득하고 그를 기반으로 부수산업도 높아야 하는데 조선은 그러지 못한 것이죠. 현상태로 유지하고 기존에 하던대로 였고 후기가 되면서 전쟁이후 상류계층이 무너지니 그 때서야 기술이 따르고 농사기법도 바뀐 것이죠.
세종때 일본에서 배워 오자고 했는데, 그 당시 일본을 보는 시각은 미개한 민족이었지요.
농사를 지어도 도로망이 발전되어야 잉여력이 생성됩니다. 유통이 발전되지 않는데 농사를 잘 지을 이유는 없지요. 세금만 잘 내면 되는 사회니까요. 국가가 주도되어 이 도로를 만들고 산업기반을 발전시켜야 하는데 조선은 자급자족으로 그친 것입니다.
기존에 해 온 것 그대로 유지한 것이 조선관료인 것이죠. 경전 읽고 농업은 자급자족 이외에 성리학의 가르침이 없으니까요.
일본보다 생산력이 낮은것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일본은 별다른 기술없이도 이모작이 가능했기에 생산량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습니다. 일본의 생산력이 높았던것은 결코 일본 지도층의 변화의 바람에 의한 결과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군 전쟁이후 철학없는 경전은 인쇄술의 발전을 가지고 왔지만 경전 스스로를 파멸로 만들었고요.
새로운 정보들이 더 급속도로 퍼져나갔으니까요.
조선은 족보 만들고 경전만드는데 그쳤습니다.
암흑기라고 하지만 문화중심이 유럽중심으로 이동, 정착시기일 뿐이고요.
조선은 침략은 하지 않고 꾸준히 명과함께 여진족 토벌이라는 예방전쟁을 펼쳤지요. 사하르전투가 마지막 예방전쟁이었고요. 나선정벌도 있었기는 하지만요. 즉, 능력이 안된 것입니다. 요동정벌 실패한 것도 유통망이 없어서 보급이 안되는데 무슨 전쟁인가요. 성리학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조선의 지리는 전기나 후기나 동일합니다.
일본의 지도층이라함은 영주나 막부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하고 계신건 서양 문물의 이거 저거를 다 뒤섞은거 같네요.
경전도 파멸됐지만 청교도가 파멸을 일으키고 산업혁명을 만들었다기 보단 절대왕정과 자본의 집약이 총을 만든거가 아닐까요
머저리같은 발상으로 시작한 십자군이지만 이래저래 문물이 들어와서 르네상스에 영향이 있었던건 서양 혼자 냅뒀으면 금속활자 있어도 탁발승 월드로 한 이삼백년 살았을지도 모르지요.
아무것도 배울게 없고 남긴거도 없는 봉건시대로 무기가 좀 발달했던거고 그건 청교도랑은 상관이 없고 결국 절대왕정되서 빵터진거죠.
유럽도 쌀 기후여서 인구가 무역 전에 넘쳐 났으면 그렇게 동네마다 성쌓고 말타고 전쟁하기 전에 절대왕정이 먼저 생겼을겁니다
철학이랑 경제랑 다 짬뽕해서 어쨌건 제국주의까지 왔지만 그게 쌀농사 지역의 관료제의 대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총 한 자루가 고급저택 한 채가격이라고 했으니까요.
청교도라고 조선 성리학과 비교대상이 되지 않기에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도의 우월성은 중세~근대시기에 입헌군주제가 확립된 영국을 이길 나라는 없습니다 고작 한반도만한 땅덩어리로 세계를 제패한게 앵글로색슨 민족이 다른민족보다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조선은 국뽕 빼고 보면 걍 봉건왕정이에요 동시대 기준으로 봐도 선비는 군역의 의무가 없었으며 노비는 그냥 재산이라는 점에서 국력발전에 매우 큰 한계가 발생합니다
나폴레옹하고 정조하고 동시대 사람입니다
조선을 까는 많은 글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바로 조선은 전근대 국가라는 점입니다.
전근대 국가인 조선을, 현대의 관점에서 파악한 뒤, [수준 낮다]고 폄하해 버리죠. 위험한 접근입니다.
조선을 분석하려면 그 시대에 비춰 살펴봐야 합니다. 그렇게 보자면
[조선은 대략적으로 중세의 말기에 탄생해 근대가 시작하기 전까지 존속한 국가]
란 사실을 바탕에 두고 분석해야 합니다.
고려말이면 중세 말기 쯤 된다고 봐야 할텐데, 그 당시 명나라라면 당대 동양의 정점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과장을 좀 보태서, 미국 우주과학과 대한민국의 우주과학을 비교해 놓고
[대한민국은 미국보다 우주과학이 밀리니 대한민국은 별볼일 없는 국가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게다가 조선에게 있어서 성리학이란, 나름 치밀하게 고민한 결과로 채택한 국가철학입니다.
권문세족과 양대 호란으로 인해 무너져갔던 고려와는 차별화 해야만 했던 당시 사대부들이
중세에서 벗어나 근대로 가기 위한 가치관이자 세계관 그 자체였습니다.
농업은 아직 현대식 농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 고기로 삼을 가축도 충분치 않았던 당시 한반도에서
국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산업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농공상으로 대표되는 산업간 위계질서는,
사실상 [당시 국가 관점에서의 우선순위] 라고 봐야 더 정확하다고 봅니다.
그냥 무턱대고 공업과 상업이 너무 미워서도 아니고, 사대부와 왕조 모두가 멍청이라서 공업과 상업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세종과 장영실의 그 수많은 창작품들과 업적들도 없었겠죠.
당장 곡물이 없으면 기근으로 국가가 무너지고,
조선이 조선임을 증명하지 못하면 안 그래도 자기주장 강한 한민족을 이끌고
자기주장은 물론 침략욕도 발군인 이웃나라들의 공세에 맞서
조선이란 나라를 유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맞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보자면 다른 왕조들은 성곽 유지보수나 공업, 상업에는 진심이었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최고권력자인 왕과 그 중심의 핵심권력층의 활동에 관해
조선왕조실록만큼 집요하고도 장기적으로 기록화시키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직지심체요절도 없었고, 팔만대장경을 보관하지도 못했죠.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다른 국가들을 무능하다 욕하지 않습니다.
다른 중세국가들 역시 그들만의 이유와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쓰지만 조선은 전근대 국가입니다.
심지어 유럽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중세국가라고 봐야 합니다.
당연히 현재 대한민국은 물론 다른 발전된 국가들에 비해 뒤떨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로마제국이 대한민국보다 부족하다고 해서 로마제국을 폄훼하는 이가 없듯이,
무조건적으로 지금의 관점에서 과거 국가들을 평가해선 안됩니다.
제가 봤을 때 조선은 물론, 과거 모든 국가들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의 관점이 아닙니다.
[당대의 과업과 고민을 얼마나 최선을 다해 해결하려 노력했는가, 그리고 그 해결과정과 결과가 어떠했는가]
여야 합니다.
당시 과거 국가들에게는 지금과는 다른 당면과업들이 있었습니다.
조선에게는 자국의 평화를 지키면서 어떻게 가치관을 현실에 맞춰 발전시킬 것인지,
변화하는 당시의 국제질서와 그 가치관이 충돌할 때 얼마나 성공적으로 대처했는지 같은
그들만의 과업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조선은 완벽한 국가는 커녕, 현대국가도 아니었기에 지금 와서 보면 바보같거나 치명적인 실수들을 하기도,
그 당시 과업이 아니어서 집중하지 못했으나 결국 지금까지 한계로 남아버린 선택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후대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기억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대목이지,
무턱대고 과거 국가들을 국까로 내몰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당시 선조들을 지금 우리가 비난한다면,
먼 미래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한 성과를 이룰 우리 후예들이
[왜 초광속 드라이브같은것도 못했어요? 무능한 조상들이네?] 라고 힐난해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왕의 행적이나 일기에서 구체적인 숫자를 요구하는 것은 좀 무리 아닌가 싶네요.
수원화성 축조시 사용했던 기중기 같은 것도 세부 자료 있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다른 것들도 개별 사업 관련하여 서적들이 있겠죠.
광해군이 집을 지었는데 15억이 들 정도로 착취를 했지만 나는 작은 비용으로 지었다.
수준이지요. 즉 통계에 대한 개념이 미약했고 이기록들이 후에 어떤식으로 사용될지 한계가 있던 것이죠.
일제시대 경제 데이터를 우리나 전세계는 인용합니다. 100년 지나도 이용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1800년에 있던 조선의 정치 경제에 이용할 데이터는 상대적으로 작다는 것입니다.
특히 서양역사 사료에 비해서 말이죠.
르네상스 이후로 서양은 책을 쓰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기록의 경쟁이 있었지요. 그래서 인쇄술이 발전했고요. 조선은 지역이 작기에 자칫 역적으로 몰릴 수 있고 인쇄술이 있지만 가문의 족보를 만드는데 사용되었고요.
철밥통 관료주의로 인해 변화는 없는 사회였습니다.
춘추나 자치통감과 같이 기록하여 먼 후대가 알수 있게 해주는 것이지 몇십년전의 사건을 서로 공유하고 비교 발전하고자 하는 시스템이 부족했지요. 전무 한 것은 아닙니다.
상공업을 무시하지 않았으면 기록을 통해 잉여재산의 가치를 판단했겠지요.
수치를 적기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일기에 수치가 없다고 뭐라 하면 좀 그렇죠
세부 내역이 없는 것은 아쉬운 것이지 흠이 있거나 부족한 것은 아니죠.
저 자체로만 해도 훌륭한 기록물입니다.
뭘 해도 깔려면 깔 수 있겠지만, 기억나는 것으로 음악이나 기중기 관련한 자료에서 보는 세부 내역을 보면
개별 기록물에는 세부 내역을 포함하고 있으리라 ...없는 것인지 없어 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짐작됩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업적이 큰 것은 정보의 교류입니다. 기록을 인쇄물로 배포해서 평가하며 경쟁을 했지만 우리는 역사기록 자체도 관료주의 틀에 갇혀 있었지요. 그 좋은 인쇄술은 유교 경전이나 족보 펴내는데 그쳤지요.
일본이 전쟁하느라 망했다고 하지만 그들의 저력도 작지는 않았고요. 전쟁을 하면서 기술은 발전했습니다. 울산성을 수년만에 만들어서 버틴 것은 대단한 것 아니던가요? 식랑과 군수물자 수급도 컸고요.
우리는 남한산성에서 50일 있었던가요?
요동성가서 식랑 없다고 바로 후퇴했지요.
대마도도 쫓기듯이 돌아오고요.
고려말 명나라 초기에 전쟁으로 중국이 폐허가 되었을 것이라 하지만 상공업은 만만치 않았고요. 배가 끊임없이 운하를 다니는 것은 경제가 돌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를 조선과 비교할 것 없이 북한이 조선과 다를 없다고 생각합니다. 권력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우물안 개구리가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임진왜란 때 왕이 수도를 버리고 백성들이 스스로 일어나 나라를 지켰지만 집권 사대부와 왕은 민심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실추된 조정의 권위와 더불어 통치의 당위성 강화를 위해 성리학을 더 강화시켜 백성들을 사상적으로 짓눌렀기 때문에 사회 전반을 보다 경직되고 폐쇄적으로 몰고 갔습니다.
소수의 양반은 오늘날 기준으로도 낮은 세금과 병역을 안지는 특권을 누렸고 철저한 신분제 사회 아래 같은 민족, 같은 백성을 노비로 부린 것도 모자라 흉년 또는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 주고 풍년·추수기에 되받는 환곡 제도를 통해 고금리로 양인들의 고혈을 빨았는데 이에 견디지 못한 양인들은 스스로 노비를 자처해서 점차 그 숫자가 늘어났습니다.
환곡 문제를 비롯한 삼정의 문란이 심각했던 조선 후기 세도정치에 접어들어서는 이씨 왕손들 품위유지를 명목 삼아 합법적으로 고리대금업을 허락해준 바람에 환곡을 받을 형편이 안되는 한계 상황에 놓여진 백성들을 빚의 노예로 전락시켜 철종 때에 이르러서 조선 팔도 전체 백성의 절반을 노비로 부렸던 잔인한 나라였습니다.
집권 세력인 노론 계열의 양반들은 정조 사후 부터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대대손손 특권을 누려왔기에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가 명/청 교체기에 중국의 변화를 접하면서 일찍이 서양의 문물과 기독교 사상을 접했는데도 귀국 후 의문사로 죽어버렸고 이후에 제국 열강 시대 때에는 당시 깨어있던 지식인들이 그러한 시대흐름을 인지했어도 세도정치의 폐단에 따라 중앙정치로 진출을 못했던 현실에서 낡은 기존 체제의 개혁에 소극적이었던 나라가 조선이었습니다.
그런 무능한 관료의 나라였던 조선은 청나라에게 삼전도의 굴욕으로 조선 백성 수십만명이 인력 수급을 목적으로 청나라로 끌려가는 과정에 수만명이 굶주림과 추위에 죽었고 그렇게 약소국으로서 자국민을 타국의 노예로 만든 것에 일조한 것도 모자라 일본의 식민지배를 겪는 과정에서 언어와 문화까지 사라질 뻔한 치욕적인 역사를 만든 장본인이 조선왕가와 사대부 양반들입니다.
그렇게 백성들을 사상적으로 억누르고 관료의 권위주의에 굴복하여 스스로 집권 세력 앞에 노예를 자처해온 조선역사 500년이 오늘날 대한민국 기득권들이 꿈꾸는 나라가 아닐까 합니다. 대대손손 나는 양반, 당신은 천한 쌍놈, 그래서 "양반과 쌍놈의 나라", 같은 민족을 노예로 만들어 소수 기득권층만 호화호식했던 더럽고 파렴치한 조선의 역사가 오늘날 대한민국에도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 10대 대기업을 위시한 소위 족벌가문들이 정치엘리트세력과 연합하여 공기업 민영화, 국회 내각제 뿐만 아니라 부동산 투기 조장에 의한 600만 국민 빚쟁이 노예화 등등 과거 조선의 기득권들이 백성을 상대로 고리대금을 통해 피를 빨았던 지난날의 역사를 다시금 상기해보고 가진 자들의 끝없는 탐욕을 결코 외면하지 않도록 현실정치에 보다 평범한 시민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역사는 반복되니까요.
어느 나라나 다 그렇듯 명암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훌륭했던 나라가 어떻게 망가졌고 마지막에 이씨왕가와 집권세력이 나라를 운영할 수 없어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게 나라를 팔아넘기고 이후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사례금을 받고 나라가 그 지경까지 가도 본인들끼리는 잘 먹고 잘 살았던 역사 조차 미화할 수 있을까요. 이 부분이 치욕적이라 교과서에선 마치 이완용 혼자 나서서 나라 팔아먹은 것 마냥 간단히 서술하는 경향이 짙은데요. 이렇듯 정규교육 과정에서 디테일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집권 세력이 이런 식으로 타국에게 나라를 팔아넘긴 사례는 대게 없거든요. 끝까지 남아서 항일투쟁을 주도하고 일본에게 항거하는 모습을 조선 왕족이 보여줬다면 명분 상으로도 그렇고 조선이란 나라가 일본에 단기간에 넘어갈만한 사이즈의 나라가 결코 아닙니다.
그 끝이 이렇듯 치욕적이고 당시 백성들에게 가혹했던 역사를 물려준 조선 이란 나라의 업보에 대해선 그 후손인 우리가 단호히 비판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야 역사가 반복되지 않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 글은 진정한 국뽕입니다.
감사합니다.
망할 만한 이유도,
500년간 유지할 능력도 둘 다 혼재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말 엉망진창이었던 걸로
500년이 전부 폄훼되어서는 안되지 않나 싶어요
뭣보다
우리 나라는 일반백성의 힘이
제일 대단한 거 같아요~
이 글 하나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때문에 전반적으로 어떻다 라고 평가하기에는 해당 기간에 반례가 너무 많죠.
왜 강한자가 살아남는다가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거다 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와드 박고 갑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이런 문자들의 조합은 그 자체로써 이미 훌륭한 가치를 남기고 있고.
클리앙을 비롯하여 각종 커뮤니티에 쌓이고 있는 여러 종류의 글들도, 좀 과하게 접근하면 미래에서 의미있게 바라보게 될 큰 역사적인 기록물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개인적으로 커뮤니티들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구요. 세종대왕 만세 우리나라 만세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디지털화해서 ai가 한글로 번역하여 주었으면 좋겠네용 ㅎㅎㅎ
감사합니당 ㅎㅎㅎ
세조까지는 왕권강화와 국방 때문에, 전근대관료제 모범이 맞지만 그 이후는 시대에 변화하지 못하는 철밥통 관료주의라는 것이죠.
임진왜란 때는 사회지도층들이 저글링하면서 막았지만 그들도 깨달았지요. 왜 죽어야 했지 라고 말이죠. 병자호란때 작살 나고 관료주의는 과거답습에만 머무른 것이고요.
시대는 발전하고 변화하는데 기존 그대로의 관료주의 국가로 있다가 망한 것이죠.
외부에서 보면 5백년동안 보존은 잘되었지만 그 틀을 깨고 수많은 문화가 교류하는 순간 조선왕은 어느 국가에 조공할까? 자신의 왕족 보존만 생각하고 있지 국가철학은 존재하지 않았지요. 특히 고종과 그 가족들이요.
지난 20세기의 대한민국은 대단한 국가입니다. 일제를 찬양하거나 저항을 하다가 국가는 난장판이 된 상황에서 이리 발전했으니 말이죠.
오백년간 유지된 강력한 중앙집권, 천년간 유지한 단일 정체성과 영토.
외국 나와보니 이게 얼마나 유니크한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 균형있게 바라보는 게 옳겠지만 그동안 과하게 조선시대를 싸잡아서 실패한 왕조로 폄하된 부분들이 많이 있었으니 이런 글이 더욱 각광 받는 게 아닐까 싶고요.
비교적 빠르게 대한민국이 민주화를 이루었던 건, 이전 왕조 시대에서조차 정치사회적으로 민주적 요소가 상당히 많았었고 그런 내재된 전통덕분에 이어진 독재시대를 거치면서도 민주주의가 빠르게 뿌리내릴 수 있었지 않았나 저는 추측합니다.
세상은 승자말고는 모두 다 패자죠.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고, 어느 쪽으로든 치우친 평가는 문제가 있습니다.
국뽕도 문제지만 국비하도 문제죠.
피라미드를 건설한건 노예가 아니라 급여를 받는 기술자들이라는게 히에로클리프 해석으로 오래 전에 밝혀졌구요. 조선은 그만한 재정 여력이 없었던거죠.
조선은 주자학 근본주의자들의 신념체계로 유지되는 종교국가에 다름아니고 현대의 북한이나 IS 와 비교해야 그 정체성에 다가갈수 있습니다. 그걸 인정해야 비로소 그 안에 꽃피운 것들이 눈에 보이죠.
윗글대로 25년마다 민란이 발생할만큼 허술한 국가체제에도 이웃끼리 아이를 바꿔서 잡아먹든 말든 마을 전체를 불태워버리는 대응으로 유지된 나라라는 점을 간과하면 안됩니다.
그 많은 기록을 남겼음에도 그와 비교할수 없는 양의 방대한 역사적 사료를 주자학과 맞지 않다고 불태워버린 나라라는 점도 마찬가지고요.
심지어 양명학을 수용할 그릇도 안됐죠.
다들 아시겠지만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경성역(서울역)에서 '왕조가 5백년이나 이어진 나라에는 내려볼 필요도 없다' 고 기차에 앉아 있었던 이유가 그거라고 생각해요.
나라도 죽었고 백성도 죽은 나라..
그게 조선이죠.
이병도 사관과 마찬가지로 이런 글도 조선을 이해하는데는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조선왕조실록을 백성들이 볼수있었을까요?
보관을 위해 몇권 만든건 알지만
조선왕조때에도 그걸 연구하거나 하는 노력은 어떠했는지 그것도 귱금하네요
조선에도 엄연히 수학이 존재했고, 세금이란게 있고 예산을 편성해서 국가를 굴려야 하는 집단이 무슨 부족사회도 아니고 정확하게 셈을 하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일했을리가 없지요.
그리고 그 숫자에 관한 기록은 후세를 위한게 아니어도 내역 관리를 위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없었을 수가 없습니다.
거북선도 그 설계를 종이에 한번 그려보지도 않고 그냥 말로만 만들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또 거북선을 만들기 위한 자재 조달 인원 편성 그걸 그냥 말로 했을리가 없잖아요.
근데 어찌됐을까요?
다 불타버린거지요.
가장 중요한 기록 중 하나인 승정원일기가 절반이 불타고
왕조실록도 1카피 전체가 타버리는 와중에 그런 자잘한 행정데이터가 무사히 남아있을 수가 있을까요.
훈민정음 해례본을 지키는것조차 버겁던 시기입니다.
관료주의 뭐라 하시는데 그렇게 해서 600년 버틴 왕조입니다. 우리한텐 그게 헌것이라 해도 그 당시엔 선진정치였을텐데요. 조선시대에 투표로 대통령 안뽑았다고 후진나라가 아니잖아요
열심히 공부해서 한국의 고서들을 번역하는 일에 일조하도록 하겠습니다!!!!
왕이 모든 것을 다하고 다 할 수 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기도 했죠.
이게 무슨 말이냐.. 왕이 정상적으로 일을 하고 통치를 한다면 절대 권력자로서 모든것을 자유롭게 마음대로 행동 할 수 있었으나, 만약 어긋나기 시작하면 바로 털리는 구조가 조선의 정치 시스템이었죠.
이게 임진왜란 이전 시대에 조선의 통치자가 만든 틀이고 이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권력의 견제장치가 하나둘 무너져 내려가며 몰락한거죠.
기록도 후손인 누군가를 위해 남기는 목적도 있으나, 왕인 니가 하는일이 언제인가는 만인들에게 알려질 수 있으니 알아서 잘하라는 하나의 견제 장치 역할이기도 한거죠.
위에 수치가 부족해서 의미없다는 말은 현대적 관점일 뿐이죠. 제대로 된 기록조차 없는 나라가 수두룩하고 유럽 국가들 공식 기록도 과장되거나 허황된 숫자가 어느 시기까진 넘쳐납니다.
유교 탈레반에 IS랑 비교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은 그냥 웃고 갑니다 ㅎㅎ
후진국과 중진국 을 거쳐 선진국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나름 연 식 있는 1인입니다.
50년대는 어린 나이라 잘 모르고 60년대까지도 길거리에 (추운 겨울이면) 동사 하거나 아사한 시체가 가마니 에 덮여있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납니다.
당시엔 상이 군인이 매우 싫었습니다.
아마 보훈법 이 있었겠지만 나라에 돈이 없었겠지요.
목 발로 사람들을 후려치며 돈이나 먹을 것을 내놓으라는 ,경찰도 어쩌지 못하는 그냥 무서워서 피하는 그런 후진국도 거치면서 말입니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이 나라가 적화 되지 않고 유지되어 왔는데 국가에서는 그분들에게 밥 한 그릇도 제대로 못해주는 시절을 말입니다.
근래 에 들어 세계가 두려워하는 제조업에 문화 강국에 ,재정적으로도 세계 10대 강국 에 들어가는 요즘을 보면 나이든 사람들은 실감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그러니 60~70대 는 뉴스나 카톡 에 매달려 분별없는 집단이 된 것이겠죠)
하지만 이제는 살만한 나라가 되었으니 이제 생각도 하고 즐기기도 하는 여유 들이 생겼으니, 허성도 교수님 이 강연 하신데 로 역사적인 것도 관심을 가져야죠.
과학적인 부분과 문화적인 부분은 또 그쪽의 전문가들이 잘 하실거구요.
한 가지 조상님 들의 변명?을 대신하자면 2 천여년 간 배고픔의 지난한 세월 속에서 저만 한 사료 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대단한 기록의 정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록 문화는 좋은 문화니 이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노통이었습니다. 기록을 검색할 수 있도록 디지털로 만들어 넘겨주려고 만들어놨더만 컴퓨터를 들고 국가 기록물을 빼돌렸다는 등, 쥐새끼같은 MB가 말도 안되는 죄를 노통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MB는 석방시켜주면 안됩니다. 한국의 디지털 기록 문화도 중지 시켰고 심지어 디지털 대한민국 실록을 만들려고한 문화자체도 망가트렸죠.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기록물은 명확하게 알려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조선시대의 조상들은 위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학과 과학 공업도 더 잘하면 됩니다. 실제로 그러고 있구요. 전투기 만드는 나라 아닙니까!
원자력 발전소는 이미 지진이 수없이 많이 난 곳에 지었습니다.
1. 전 세계 단일 왕조 가운데 500년 이상 지속된 사례는 조선 말고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렇게 안 좋았으면 어떻게 518년 간 나라를 지속할 수 있었을까요? 회사도 100년 이상 지속 시키기 힘든데, 한 나라를 500년 이상 이끌어나간다는 건 장점이 단점보다 많았다는 겁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백성들이 무식해서..그렇다고 하던데, 그 당시에 전 세계 사람들 대부분 다 무식했습니다. 민란 자주 일어난 거야 본문에서 했으니 넘어가겠습니다.
2. 제국주의 때 남의 나라 침탈해서 경제 발전 한 게 그렇게 떳떳한 짓은 아닐텐데요. 무슨 짓을 해서라도 국가만 부흥시키면 됩니까? 그런 논리면 히틀러의 만행도 용서가 됩니다. 독일 국가의 번영을 위해서 학살을 했으니까요.
안타깝게도 그런 나라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 보입니다. 이러니 굥이 뽑혔겠죠.
3. 기록 부분만 해도, 지금 놀라는 분이 많은 것처럼, 학교에서 왜 제대로 안 가르쳤을까요? 조선은 망해야 마땅한 나라고 => 일제의 병탄을 합리화. 망할 나라인데 일본이 근대화시켜줬다. 이런 빌드업을 하려고 조선은 망해야 마땅한 나라라고 계속 주장하는 건 아니시죠?
망할만해서 망했다.우린 거기서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로 가야하는데,
일본을 끼워 넣으면 식민지근대화론으로 헤까닥하는 겁니다.
4. 민란은 수도 없이 일어났고, 조선 백성은 한없이 깐깐했습니다. 이 DNA가 지금까지 내려와서 한국인은 뭘 하든 진심으로 한다는 게 된 거라고 저는 봅니다.
5. 전 세계에서 자국 역사를 부끄러워하고 잘 망했다. 망할 만 했네. 이렇게 가르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합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겠지만, 제가 학교 다닐 때 국사 선생들 80% 이상은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6. 좋은 건 받아들이고, 안 좋은 건 고쳐나가면 됩니다. 일방적인 국뽕이나 일방적인 자국비하는 결국 비슷한 지점에서 만납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선조들의 장점이 있었다고 하는 글에서 굳이 단점을 꺼집어 내서 이러니까 망했지.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x밥이었다. 이런 분들 의도가 뭔지 참 궁금합니다.
세종대왕의 "한글" 단 하나로 다른 나라 전부 x밥 만들 수 있습니다. 전 세계 왕 중에서 어떤 왕이 백성들 위해서 이런 위대한 일을 했는지. 찾아보세요. 없습니다.
국뽕은 개뿔. 최근 들어서 문화적으로 좀 뛰어나니까 나온 말이지. 우리가 언제부터 국뽕에 젖었다고 그러는지 원.
우린 국뽕은 커녕 자기 비하만 강제로 수십 년 간 해온 국민입니다. 일제+토착왜구 때문에.
해방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일제 때의 마인드로 단점만 눈에 불을 켜고 떠드는 사람들이 보이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없으면 이런 마인드에 자신도 모르게 젖어있다고 봅니다.
발전해야죠. 언제까지 잘 망했다. 꼴 좋다. 그러니 망했지.... 이렇게 비하만 하고 있을 겁니까?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자주 쓰이는 국사 수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