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에서 주인공 선자가 이주한 오사카 이카이노는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으로 농지를 뺐겨 일본으로 먹고 살기 위해 도일한 제주인들이 정착한 곳이고, 특히 4.3사건때 1만여명의 도민이 난민으로 도피했던 피란처이기도 합니다.
이카이노는 '돼지를 키우는 들판'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더러운 이미지라는 일본인들의 불만으로 현재는 사라진 지명 '이카이노' 지금은 츠루하시로 변경.
광복 직전 일본에 있었던 조선인들은 200만이나 되었고 광복 후 55만명이 남았는데, 전재산 중 1천엔만 가져 갈 수 있었기에 삶의 기반을 두고 고국에 돌아가는 건 쉽지 않았다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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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 전 일본 오사카시 외진 구석엔 과거의 낯선 ‘우리들’이 있었다.
벌목한 나무들로 가득한 좁은 하천 히라노가와의 시큼한 풍경, 제주 해녀 출신 이주민들이 잡은 해산물을 팔던 이쿠노의 조선시장이 시선을 파고든다. 그 시장 골목 안쪽에는 ‘개장국’이라고 선명하게 적은 골목 식당의 간판이 있고, 웃통을 벗은 조선인 장정이 그 앞을 걸어가고 있다. 골목 더 안쪽에선 볼이 퉁퉁한 조선아이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할머니·아줌마들은 어딘가 나들이를 하려는 듯 한복을 차려입었다.
지난 15일부터 서울 강남역 인근의 사진공간 스페이스22에 차려진 재일동포 작고 사진가 고 조지현(1938~2016)의 회고전은 1970년대 일본 한인촌의 모습을 지금 이 땅의 관객들 앞으로 옮겨 놓았다. 제목인 ‘이카이노(猪飼野)-일본 속 작은 제주’는 제주 출신의 사진가가 1948년 밀항해 이주한 뒤 유년기와 성장기를 보낸 오사카 동포마을의 이름이며, 그가 먹먹하게, 담담하게 찍은 사진의 배경이기도 하다.
https://m.hani.co.kr/arti/culture/music/883149.html#cb
파친코에서 선자가 도착한 거리에 돼지가 돌아당긴 묘사가 이러한 배경이었습니다.
추성훈 역시 산증인이었군요.
피와 뼈 원작 소설가 양석일이 바로 이카이노 출신입니다.
역시 네트는 광대합니다.
감사합니다. ^^
고맙습니다.
광동대학살의 기억에 많은 분들이 닦아놨던 삶의 기반을 버리고 귀국했을 거 같습니다.
당시 한인들의 임금이 일본인의 반에 못 미쳤다고 합니다.
임금이 당연하다는 당위성 보다는 그들에게 짐승 취급당했던 배경을 봐줬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이 글의 목적이기도 하고요.
아닌건 알 수 있을텐데요.
지금은 사회운동가가 된 한 일본인이 말하기를 자신은 당시 조선인들은 때려도 가만히 있는 짐승인 줄 알았답니다.
그러다 한 번은 또 때렸는데 그 사람이 따귀를 때리더랍니다. 그 때가 우리가 광복되던 날인데, 그 때의 충격으로 아, 저들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사회운동가가 되었다고요.
자세히 글 올릴 시간이 없는데 나중에 쪽지로 링크 드리겠습니다. 제가 님에게 증명할 의무는 없습니다만, 그 정도는 하겠습니다.
보는 시선이 저와는 다름은 확실히 알겠네요. ^^
여기 글과 기억이 혼재되었던 거 같습니다.
https://brunch.co.kr/@bigissuekorea/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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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루하시의 이민 역사는 제법 알려져 있습니다. 후대에 이르러 잊혀져 갈뻔?하다 빠친코 덕에 상기되는것 같아 다행이면서도 안타깝네요. 지금도 츠루하시에서 이마자토에 걸치는 이 일대가 일본내 최대 도일 한인촌일 겁니다.
말씀하시는 내용이 맞습니다. 경솔한 표현 사과 드립니다.
그 당시 둘째 고모와 고모부가 찾아 오셔서... 따라서 저곳을 갔던 기억이 납니다. (일본에는 고모만 일곱 분이 계세요.)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저 물이 엄청나게 지저분했었다고 하셨지요.
그 말씀을 하시면서 참 묘한 표정을 지으시던 기억이 납니다.
- 그땐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일제시대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구두 수선공, 제작일로 자리를 잡으셨는데,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드라마 파친코를 보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고모부, 고모들은 모두 무탈하신지... 그때 인사를 했던 사촌 형님들은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면목이 없지만 이제라도 연락 드리고 찾아 뵈어야겠어요.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인데 덤덤하게 잘 풀어나가는 영상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제주의 고기 국수도, 오사카 쪽과 제주 쪽의 교류에 의해 만들어진 음식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계속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주 향토음식 연구가 분께서는, 몸국의 변형으로, 과거 늘 돼지고기등을 삶으면 국수도 삶아먹던 것이 제주도 고기국수의 원형이라고 하시던데.. 전 사골국물등, 아무리 생각해도 돈코츠라멘의 영향이 아닐까 싶었거든요.
왜 오사카에 제주도에서 온 분들이 많을까..도 오랫동안 궁금했었는데….
설렁탕에 국수를 말아 먹으면서 발전됐다눈게 더 설득력 있을거 같네요
그곳에 관련된 조선인들의 대체적인 삶의 방향이 어떠했다는 관점에서 의미가 선명한 거죠.
임진왜란 때 조선에 투항해 앞잡이하던 일본인도 있었고
일본에 투항해 앞잡이 하던 조선인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들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죠.
감사합니다.
중국이 돈 좀 준다고 내용을 이상하게 만드는 공중파 종편방송들 반성해야 합니다.
고맙습니다. ^^
개인적으로 자갈치 사장 장면에서 제 어릴적 기억과 너무나 같아서 정말 놀랬습니다..
7세에 미국으로 이민 가신분인데도 불구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