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남
제가 대학원 1학기, 아내가 대학 4학년 때, 아내는 종종(사실은 거의 매일) 제가 살고 있던 아파트에 학교가 끝나면 와서 놀다 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방 2개를 마치 자신의 방처럼 (하나는 아틀리에로 다른 하나는 공부방으로) 꾸며서 취미생활과 대학원 입시 준비를 병행해 왔습니다. 공부는 제발 학교 도서관을 이용하라는 제 간곡한 부탁에도 '방에서 공부하는 것이 집중이 훨씬 더 잘된다'라며 에어컨을 아끼지 않고 틀어 젖히며 돌아다녀서 관리비 낼 때마다 피꺼솟하게 만들었었죠.
그날도 놀다, 공부하다 배가 고파진 그녀는 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려 부엌으로 나왔다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잘됐다 하고 "야, 나 배고파. 라면 끓여줘"(아내는 지금도 음식을 정말 못합니다)라며 현관으로 나왔다가, 제 어머님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제 티셔츠와 너무 짧아서 가린 것이 거의 없는 핫팬츠만을 입고 있던 그녀는 너무 당황해서 '꺅!' 소리를 질렀는데, 어머님께선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시고는 "내가 이 집 주인 엄마라오" 하시곤 태연히 그녀 옆을 지나 아들 굶어 죽을까 바리바리 싸 들고 오신 반찬을 차곡차곡 냉장고에 채워 넣으셨다고 합니다. 말 그대도 얼어붙어 꼼짝 못 하고 있던 그녀는 정말이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너 주혜 맞지? 국민학교 때 영훈이 짝 주혜, 어릴 때 모습이 그대로 있네" 어머님께선 그녀의 얼굴과 이름까지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녀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예"라고 말했고, 어머님께선 배고픈 것 같으니 당신과 늦은 점심 먹으러 가자며, 어서 옷 갈아입고 나오라고 하셨답니다. 이미 그녀와 나의 단골집이었던 단지 옆 스시집으로 그녀를 데려가셔선 주방장 특선(오마카세 같은)을 먹이시고, 초밥 세 세트를 들려주며 하나는 제게 주고, 두 개는 부모님께 가져다드리라고 하신 어머님은 마지막으로 쇼핑센터에 그녀를 데려가셨습니다. 그곳에서 극구 사양하는 그녀에게, 제게 사주신 양복의 세배가 넘는 가격의 투피스 정장을 선물하시고는 조금 전 그녀의 모습이 생각나셨는지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여름 원피스 두 벌까지 쥐여주셨습니다. "여자는 그렇게 꽉 끼는 것 입고 있으면 안 좋아"라고 하시며(평소 뭘 입고 돌아다니는 지 보셨다면 절대 그런 생각 않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 머뭇머뭇 망설이시다가 아주 조용하게 "혹시... 지금 둘이 같이 사는 건 아니지?"라고 물으셨다 합니다. 그녀의 강력한 부인에 "그래. 아니지. 내가 괜한 걸 물어봐서 미안해. 그리고 다음부턴 가기 전에 전화하고 갈 테니까, 오늘처럼 주혜가 당황할 일은 앞으로 없을 거야"라고 그녀를 안심시키시고, 당신께서도 안심하시고 돌아서셨다고 그녀는 기억합니다.
저녁 7시가 넘어 집에 돌아온 저는 못 보던 원피스를 입고 완전히 넋이 나간 모습으로 앉아있던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고, "그 집 부모님이 알면 어쩌려고 그러냐?" "네 형 같은 사고 치면 아주 호적에서 파버릴 것이니 알아서 잘해라(?)"라는 야단을 좀 맞았고, "이거 정말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다"라는 그녀에게 "어머니가 단지 네가 예뻐서 이런 선물을 하셨을 리 없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니 그냥 받아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여전히 영혼이 탈탈 털린 모습으로 "나, 오늘은 그냥 갈래"라고 말하는 그녀를 제가 집에 데려다주는 것으로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미래 시어머님과 만난 아내의 하루는 막을 내렸습니다.
초밥과 매우 비싼 것이 분명해 보이는 정장을 받아온 그녀에게 그녀의 어머니는 출처를 물었고, '길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 어머님께 받은 것이라 하자, 누가 이렇게 좋은 옷을 네게 사주냐며 그녀 어머님은 추궁 하셨고, 결국 다음날 그녀의 아버님께서 제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10년 전 큰 사고를 친 형의 사건을 수습해 주셨던 그녀의 아버지에게 어머님께서 사례를 하겠다고 하자, 손사래 치시며 "나중에 우리 막내딸 어른 되면 예쁜 옷이나 한 벌 사주시면 어떨까요?"라고 반농담으로 말씀하셨던 것이 그녀가 그날 옷 선물을 받은 이유였습니다. 이렇게 비싼 걸 받을 수 없다는 그녀의 아버님에게 어머님은 "그러면 나중에 우리 막내 회사 들어가면 양복이나 한 벌 맞춰달라"는 반농담을 건네셨고, 이것 역시 2년 후 지켜졌습니다.
이것이 아내의 어머님에 대한 최고의 기억입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한 아들의 여자친구를 데리고 나가서 좋은 것 먹이시고, 부모님 드릴 음식도 전해 주시고, 옛날 약속 잊지 않으시고 좋은 옷까지 선물하신 후, 앞으로 자신을 당황하게 하지 않겠다는 배려까지 해주신 어머님의 모습은 자신이 상상했던 좋은 시어머니, 그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꼭 어머님 모시고 살고 싶다는 생각도 그날 했었다고 합니다.
2. 미움
그러나 10년 후, 제가 아내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처음엔 "정말 똑똑하고 예쁜 손주를 볼 것 같다"라며 축하해 주시고 좋아하셨던 어머님께서 갑자기 '내 눈에 흙'이라는 아침드라마 시어머니의 상투적인 패턴을 선보이시곤 그녀에게 심한 말을 많이 하셨습니다. 형수를 비롯한 주위의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머님의 예비 새아가에 대한 자랑에 눈꼴시었는지 "전에 의사랑 결혼한다고 엄마가 자랑하던 애 아니었어?" "그거 결혼 직전에 의사 집안에서 깼다잖아. 그래서 그 애 엄마가 혼인빙자 어쩌고 하면서 고소하겠다고 난리 쳤었고" "그럼 처녀 아니라는 거네?" "몸만 버리고 차인 거지. 둘만 무슨 여행도 갔다 오고 그랬다던데"와 같은 자극적인 말들을 어머니께 흘렸던 겁니다. 그 가운데 몇 개의 이야기가 사실임이 드러나자 이건 명백한 사기 결혼이라며 분노를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고등학교와 대학 후배인 그녀의 어머니를 불러 "넌 이런 흠 있는 딸을 어떻게 감히 우리 아들에게…" 라고 나무라셨고,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내가 찾던 우리 아들의 짝은 아닌 것 같다"라며 처음엔 그런대로 직접적이지 않은 화법으로 결혼에 반대한다는 뜻을 내비치셨습니다. 모든 건 어머니와 그녀의 만남이 있고 나서 2년 후, 의사/판검사 사위 욕심이 매우 많으셨던 장모님으로 인해 결국 그녀와 제가 헤어지게 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녀 어머님의 말씀에 심한 상처를 받고 전 그녀를 포기하겠다며 떠났고, 이런 나의 돌아섬에 자포자기 상태가 된 그녀는 "그래, 그럼 엄마가 골라. 그럼 그 사람과 결혼할게"라고 항복해버린 겁니다. 열쇠 3개를 앞세워 개업이 쉬운 인기과의 의사를 그녀의 짝으로 정하였고, 둘이 20분 정도 만나본 것이 전부인 상태에서 양가 부모님끼리 만나고, 날을 잡았습니다. 고작 몇 시간 만난 것이 다인 사람들이 결혼한다는 게 자신들이 봐도 심하다고 생각했던지, 당시 이런 식으로 맺어진 커플들은 결혼 직전, 약혼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3박 4일 정도의 여행을 함께 다녀오는 것이 하나의 루틴이었습니다. 이미 양가에서 결혼을 약속한 상태라 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이미 부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었던 거죠. 그래서 방도 하나만 잡고, 남자가 요구하면 여자는 몸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게(마치 신혼여행에서 아내가 남편의 동침 요구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여겨졌기에, 속도위반도 많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신랑의 손을 뿌리치는 것 같은 볼썽사나운 광경은 안 봐도 된다는 점 때문에 신부 측에서도 큰 거부감 없이 이런 결혼 연습 여행을 승낙했습니다. 처형 역시 이런 방식으로 결혼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마지막 남은 막내딸도 그렇게 시집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주위로부터 들으신 어머님께선 그녀는 이미 한 번 결혼한 것과 다름없는 소박데기라고 생각하셨고, 그런 여자와 숫총각(?)인 저와의 결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반면 저는 "조금 천천히 가는 것이 어떨까"하는 그녀를 "이러다 우리 또 결혼 못 한다. 거기다 우리 나이 벌써 서른 셋이라고"라며 압박하여 혼배할 성당을 예약하고, 주례 신부님 구하고, 혼인 관계 증명서를 떼었습니다. 화가 나신 어머님께선 그녀를 부르셔선 그 앞에서 제게 "넌 딴 놈이 실컷 가지고 놀다가 내다 버린 저런 애가 네 새끼의 어미가 되어도 좋냐?"며 고함을 치셨습니다. 전 남의 소중한 딸에게 그런 막말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린 후, 약혼 여행 전날 '더 큰 열쇠 3개'에 결혼을 깨버린 남자 측의 후안무치한 행동 덕에,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같은 해명을 다섯 번째 드렸지만, 어머님은 더 심하고 모욕적인 말로 그녀에게 상처를 내셨습니다. 제 말이 다 맞는다고 해도, 돈 잘 번다는 이유만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내와 결혼 전 함께 잘 결심을 했던 애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며, 입 달린 사람마다 뒤에서 수군수군할 텐데 당신께서 왜 그런 수모를 겪어야 하냐고 하셨습니다(전 이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생각합니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고 있는 그녀를 보자 더 이상 이런 말을 듣고 있게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머니의 말을 가로막고, 그녀의 어깨를 안고 방을 나서는데, 우리의 뒤통수에 어머님의 가혹하고도 잔인한 말들은 계속 날카로운 비수처럼 날아들었습니다.
눈을 꼭 감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물을 꾹 참으며 떨고 있는 아내의 모습에서 그녀의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선 그녀를 진정시켜야 했기에 차를 몰고 가다 눈에 처음 띄는 호텔에 방을 잡고 그녀에게 "It's not your fault"라는 Good Will Hunting의 대사와 "It's MY fault"라는 제 대사를 반복해 주었습니다.
"주혜야. 네 잘못 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야.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다 내가 잘못한 거라고. 넌 잘못하지 않았어. 그때 도망친 내 잘못이야"
그제야 그녀는 소리 내어 꺼이꺼이 울었고, 전혀 과장 없이 제 품에 안겨 울던 그녀의 눈물(+콧물+침?)에 셔츠의 절반 정도가 축축하게 젖었습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참 못 할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이라고 달랑 둘 있는 게, 하나는 여기저기서 여자애들과 사고치고 돌아다녀서 그거 빌러 다니고 수습하기 바빴는데, 이젠 다른 한 놈이 어떤 사내하고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계집을 데리고 와서 결혼하겠다고 하니... 차라리 사고 치던 네 형이 백배 낫다. 그래도 그놈은 멀쩡한 계집이랑 결혼했으니까"
혼배성사 일주일 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혼자 찾아뵌 어머님의 반응은 예상대로였습니다. 그녀와 결혼하면 모자간 인연을 끊겠다고 하신 어머님께 마음대로 하시라고 하고는 대신 손주 만나는 건 앞으로 꿈도 꾸지 마셔야 할 것이라며 대들었습니다. 화가 나신 어머님은 그런 year이 낳은 애는 네 애는 될지언정, 내 손주는 아니라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으시며, 너희끼리 잘해보라고, 이제 당신에겐 아들이 하나밖엔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어차피 쟤네들은 이제 말릴 수 없다며, 참석 않으시면 더 많은 사람 입에 오르내릴 것이고, 기어이 자식 가슴에 대못을 박을 것이냐는 주위의 만류에 혼배성사엔 참석하셨지만, 고개를 돌리며 우리 인사는 받지도 않으셨고, 사진 촬영 중에도 얼굴을 풀지 않으셨으며(나중에 아들이 이 사진을 보고 "할머니 마귀할멈 같아"라고 해서 어머님의 고소를 자아내었습니다), 덕담은커녕 말 한마디 없이 냉랭하게 성당을 떠나셨습니다.
3. 화해
아내의 임신 소식을 알렸을 때도 "꼭 유전자 검사를 해봐야 한다"라며 아내에 대한 불신을 숨기지 않으셨지만, 결국 첫째와 둘째를 낳았을 때, 모두 미국을 방문하셨고 아내에게 "아가, 수고 많았다" 말씀해 주시고는, "이런 데 돈 쓰는 것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라며 장모님 도착 전까지 사람도 붙여주시고, 아내가 두 주간 아무 신경 쓰지 않고 몸의 회복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돈을 '펑펑' 쓰셨습니다. 덕분에 아내와 저는 아직도 진정한 육아 지옥이 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 일들이 고맙기는 해도 아내는 어머님을 몹시 어려워하고 무서워했습니다. 아무리 부드럽게 말씀하셔도 "xx 에미야" 한마디에 움찔하며 몸이 굳어지는 그녀를 보며 마음이 항상 무거웠습니다. 어머님께서도 그런 그녀를 보며 "얘는 왜 아직도 날 무서워한다니?"라며 푸념하시기도 했지만, 제게 "내가 참 모진 말 많이 했다. 지금 너희 둘 잘 사는 거 보면, 그때 그런 말 한 것 가슴 치고 후회한다"라며 슬픈 표정을 지으시곤 했습니다. 일 년에 서너 번은 꼭 들어오셔서, 아내에게 옷도 사주시고, 비싼 건강검진도 받게 하시고, 보약도 몰래 가져오시고,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 만들어 먹이시고, 가끔은 여행도 함께 다니며 그녀와의 화해를 위해 애쓰셨지만, 사람의 마음은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 어머님이 계실 때 아내는 항상 긴장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님께서 1차 뇌졸중을 겪으시고, 찾아온 아내의 손을 잡고 "내 평생의 한이 네게 모질게 대한 거란다. 에미야, 날 좀 용서해라. 날 볼 때마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널 보면 가슴이 너무 아프다"라고 말씀하셨고, 그때 처음 아내는 어머님의 눈을 바라보며 "예, 어머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4. 헤어지는 중
6년 넘게 치매로 투병 중이신 어머님을 뵈러 어제 아내와 병원을 다녀왔습니다. 코로나로 한 사람 밖엔 면화가 되지 않는다는 말에 아내는 자신이 어머님을 뵙겠다고 했습니다. 방호복을 입고 15분 정도 어머님을 뵙고 나와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리고 집에 와서도 계속 그녀는 '펑펑' 울었습니다. 어머님께서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신다며. 그동안 섭섭하고 어머님으로 인해 가슴 아팠던 기억 모두 말씀드리고, "이제 저는 30년 전 만났던, '더없이 포근하고 자상했던 어머님의 모습'만을 기억할 것"이라고 말할 기회를 영영 얻지 못하게 되어버렸다고.
그래도 치매라는 무서운 병이 오기 전에 두 분이 화해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행복하세요
가족의 행복을 빕니다.
어머님께서도아내분도 마음이
편안 하시리라 생각이 듭니다
더 드라마같다는 두 분 연애사 얘기도 꼭 들려주세요
하나님이 쓴 가장 슬픈 소설이라니... 너무 궁금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풀어내는건 정말 힘든일인데
어머님도 멋진 분이시고 아내분도 좋은 분이시네요
사람이 산다는게 질곡과 회한을 거치지 않을수 없는 일인지라
글쓴님과 주변분들이 잘 헤쳐나가시길 기원합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그때 왜 그렇게 했을까, 그 때 조금 더 다르게 대처했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텐데, 라는 후회가 드는일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만, 이미 지난 일 그렇게 되버린 일 바꿀수 없는 일을 계속 되내이는것이 미련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살아가는데에는 도움이 되더군요.
그런면에서 어머님이 대단히 멋진 분인것 같습니다. 치매가 참 잔인한 병인데, 자신의 잘못도 잊게 해준다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되지 싶습니다.
저희시아버님도 지금 치매초기-->중기 단계시작이라 남일같지 않네요.(좋은분이세요)
그래도 두 고부님께서 기본적인 마음이 좋으신분들이시라 해피엔딩이라 될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앞으로도 물뚝님댁에 좋은일+행복한일 가득하시길...
감사합니다. 행복할게요.
자식입장에서 더잘해야지...
조언감사합니다.
아내분의 이야기에 귀함이 있기에 눈물나지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행복하세요 두분
부인분도 그런 시어머니를 미워하지 않아서 착하신 것 같고요.
부인분의 마음은 어머니께서도 알고 계실 거예요.
진짜구나 깨닳는순간 눈물이 흘러버렸습니다.ㅠㅠ
어머니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미용실에 염색약 바르고 앉아있는데
두 눈에 눈물이 와라락 고입니다.
몇해전 돌아가신 저의 어머니 생각도 나고.ㅜㅜ
아내분과 어머니 두 사람은 이미 서로를 포근히 안아준듯 합니다.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어머니 건강을 기원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전 어제 '기회를 영영 얻지 못하게 되었다'며 눈물짓는 아내 모습에, 목이 꽉 메이며 제가 아들이 아니라 집사람이 딸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모님께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다시 한 번 느낌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솜씨도 좋으십니다!
치매로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하나뿐인 저희 아버지를 못 알아보신 날, 문 걸어잠그고 하루종일 방에서 나오시지 않던 아버지 모습이 떠오르네요 ㅠㅠ
하나뿐인 아들, 하나뿐인 손자도 못 알아보는 병입니다. 치매는 정말 무서워요 ㅠㅠ
몇해전 먼저 떠나신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납니다ㅠㅠ
가족분들의 건강과 행복을 빕니다...
어머님과 물뚝님의 가정에 주님의 평화와 은총이 함께 하길 빕니다.
와이프분도 어머님도.....그리고 물뚝님도....행복하시길요...글 보며 저를 돌아보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