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돈때문에 생활이 힘든적 있으셨나요?
저는 제대하는날 아버지 사업이 부도났다는 말을 들었죠.
복학은 해야하는데 갑자기 살 집도 없어지고 등록금도 없고…
친척에게 백만원 빌려 학교앞에 하숙집 구해서 알바하면서 학교 다녔네요.
장학금 못받으면 학교 다니기 힘들었고 당시 학생식당 밥이 1,200원 조교식당 밥이 1,500원이었는데 매번 300원으로 고민했었죠.
조교가 아니어도 이용할수 있는데 퀄리티 차이가 좀 났었죠. ㅎㅎ
300원만 더 내면 그나마 밥같은 밥을 먹을수 있는데…주머니 속의 돈을 생각하며 주로 학생식당을 택했죠.
졸업때까지 2년간은 술, 영화, 간식, 옷 등엔 지출을 못했죠. 취업 못하면 큰일이라는 생각때문에 동기중 처음으로 토익 900넘기도..ㅎㅎ
복학후엔 항상 장학금 받으며 졸업했고, 수십년이 흘러 지금은 그 당시 몇년이 추억이 되버렸네요.
살면서 가난해 보신적 있으신가요?
밥을 워낙 자주 굶고, 불규칙하게 식사하다보니, 이도 여러개 빠졌네요.
저 태어나기 전에는 누나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되는데 의료보험 가입이 직장 다닌지 얼마 이상 된 사람만 가능해서 못할뻔하고요.
잘풀리셨겠죠?
돈 때문에 때린다고 하기에는 좀 그러니까
예전에는 뭐 다른 이유를 들어서 때리는 경우가 많았죠.
결국엔 학부모한테 돈 나올 가능성이 없어보이는 애들이 타겟이었고요.
많이 맞다가 부모님한테 이야기 해서 부모님이 학교방문해서 돈 봉투하나 찔러주니까 그만 때리더라는
이야기가 흔히 있던 이야기 인 적이 있었지요.
선생들도 납부실적 가지고
회의 때 엄청 닦였을 것 같아요
그래서 애들을 더 닥달했을 것 같은 느낌
1988년 서울 우신초(국) 5학년1반 아줌마 선생님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없죠
아마 거짓말 하지 말아라는 의도 였지 싶네요
근데 전 젤 잘먹습니다 아직ㆍ ㆍ
그렇게 칼국수 먹으니 어머님솜씨가 좋아 멀리 친척들이 다니러오면 일부러 와서 먹고갔지요
그때 칼국수장살 해야했는데 ㆍㆍ ㆍㅎㅎ
교수식당은 붐비는 시간이 아니면 대학원생이나 학부생도 갈 수 있었는데 늘 학생식당에 갔죠.
그 전에도 아버지 사업이 안 좋을 때가 있었는데 철없어서 그냥 지냈나 봐요.
너무 배 고파서 아무 식당에 들어가 밥 구걸하고 밥 값으로 잠시 일해 주고 나왔었습니다.
그것도 비오는날 야외에서 먹고 있었을 때?
노인분들 들어가면 포기하고 학교에가서 해결하던 시절이 요즘도 가끔 생각이 나네요.
부모님이나 가족 모두 지금까지 살아온것도 은혜인거 같네요...
초딩 방학때 저소득층(?) 가정에게 근처 식당에서
밥 먹을수 있는 제도가 있었는데
제 인생 첫 혼밥은 초5때네요 ㅎㅎ
엄청 창피했었어요ㅠㅎ
지금은 잘 지냅니다.
그 돈이 없어서 학식 밥도 자주 먹지는 못하던 저에게는,
그만한 가격에 그만한 밥을 먹을 수 있다는게 신세계였거든요.
가장 좋은 점이... 원하는 만큼 더 먹을 수 있다는 거였죠.
(몇 년 후에 다른 학교 학식 갔다가, 밥 더먹으려면 공기밥 식권 따로 사오라는 말에 깜짝 놀라기도......)
진짜 주유소에서 가게로 못 돌아올뻔했죠 ㅠㅠ
장사도 안되고 일도 힘들고 다음달 집세도 걱정이고 다음달 가게세도 없고 그냥 진짜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더라구요. 아직도 일은 힘들지만 예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대학땐 만두한접시가 그날 식사였네요.
알바할땐 프림 타마시면서 끼니를 떼웠었죠.
고3시절 병원에서 영양실조 진단받았을때가 당시엔 많이 충격이었습니다.
그때 도움주신 은사님과 여러 좋은분들 잊지않고 있습니다.
동네 구멍가게에가서 사정얘기하니 김치랑 라면 한박스 그냥 주시더군요.
나중에 다 갚아드렸는데 3일 굶어보니 부끄러움같은게 그냥 없어집니다.
그뒤부터는 돈 급할 때 노가다 알바도 뛰러다니고, 이삿짐 알바도 뛰러다니고
사는게 적극적으로 바뀌더군요.
그래도 대학 가야되니 재수해서 대학은 붙고 학자금 100% 대출 낀 채로 다니는둥 마는둥 하면서 일만 죽어라 하고...
그때 얻은 병들이 지금도 가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젠 집 살 수 있을 정도로 돈 모았으니 그러려니 합니다.
근데 정작 전 부모님하고 살 집 사는 거랑 별개로 외국에서 외노자로 또 지내야 하지만요...ㅠㅠ
자신을 위한 시간, 휴식, 선물을 주세요.
저도 제대 후에 가난으로 학교를 못다닐뻔 한적도 있었지만 굶어죽지는 않을 정도였고
옷사입을 돈이 없어 반팔티 두벌로 여름옷을 한 3년을 보내본적도 있었네요.
학교식당에서 밥사먹을 돈이 없어서 밥주고 남은밥 싸올 수 있는 레스토랑에서 밤에 네시간씩 일해본 정도네요.
그나저나. 목돈이 없어서 빚을 내야하는 가난한 정도랑, 밥이 없어 아사 직전의 가난은 한참 다를겁니다.
돈이 없어 장학금을 받기위해 열심히 했던 그 순간들!
삼각김밥에 컵라면 먹으면서 계란을 넣어서 먹고 싶은데
그 300원으로 고민하는 순간…
지금도 전역후에 어설프게 일벌여서 날려먹고 부채까고 있지만, 그래도 한주에 먹고싶은 음식 한번씩은 금액상관 안하고 먹으면서 사네요.
내년에 다 정리되면 다시 시작해보아야죠.
조급함은 버리고, 천천히 올라가보려고요.
가끔 여유생기면 저도 클리앙 회원분들처럼 정치자금 후원도 하고, 인증글도 쓰면서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옛날이네요.
천원에 세개하는 순두부를 반잘라서 아침 저녁으로 먹다가 위염이 생겨서 햇반한개 묽은죽+순두부3개로 1주일을 버티면서 학원을 다녔습니다
시간의 비밀도요..
진지하게 저거 잡아 먹어도 되나 고민했습니다 ㅜㅜ
대학은 등록금 댈 형편이 안되서 1학기 다니고 중퇴요.
전기요금 못내서 전기 끊기고 촛불키고 지내고..
그 위를 쥐들이 뛰어 다니더라는;;; 찍찍 소리와 함께 볼 일을 봤었습니다.
어느날 중요한 pt때문에 새벽까지 야근하고 택시로 퇴근... 현금이 부족한 걸 알고 외곽순환도로 나오자 마자
내려달라고 하고 1시간 넘게 집으로 걸어감... 그날이 내 27번째 생일날임... 살면서 가장 많이 울었을때내요...
그후 카드값은 당시 여친(현재 와이프)이 모두 처리해주고 저는 평생 노예가 됩니다.
댓굴들 보니 저 정도면 무난한 삶이었네요.
감사하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며 나눔할줄아는 삶을 살아야겠어요
학부 연구실은 잠잘곳이 필요해서 들어갔네요..
씻는건 화장실, 자는 것은 긴 책상 위에서 잤고, 아침은 굶고 점심 저녁은 1,200원짜리 백반으로 버텄네요.
정말 서글펐습니다.
집은 돈이 없었지만 제 용돈은 제가 벌었지요.
동기나 후배들 중에 돈없어 굶는 애들이 보였는데 자존심 상할까봐 제가 쏘는 분위기를 만들어서 다 데리고 간적이 많았어요.
술먹을 때도 회비 못내는 애들이 있을땐 제가 쏘는 걸로 해서 많이 먹였지요.
그 사람들은 아마 제가 부잣집 자식이라 생각했을겁니다. ㅎㅎ 그래서 허세 잘 떨고 돈자랑 잘하는 놈으로 알았을겁니다. 그게 좀 슬펐지요.
애들아 그때 우리집도 형편이 많이 어려웠단다.
야간 다니면서 프레스 공장에서 기숙사 생활하면서 저녁 5시까지 일하고 6시에 학교 가서 밤 9시까지..
학교 수준이 얼마나 처참한지 3년간 공부 해 본적 없는데 평균 99점.. 전교 1등
내신 플러스 산업체 전형으로 산업체 전형 있는곳 암데나 갈수 있었지만.. 등록금도 무섭고 일도 해야하고.. (번돈은 집 생활비 드리고 월 만원.. 차비랑 용돈..)
동양공전 전기과 야간에.. 회사에서 젤 가까워서 써서
다니다 병역특례 가느라고 전문대를 6년만에 졸업했네요.
어디 누구 못지 않게 가난해 본적?은 없지만 나름 힘들게 살았어요
대학 다닐때.. 친한 친구놈 주말에 자기차로 스키장 가자고.. 자기가 콘도 예약 하고 자기가 스키 알려 준다는데.. 주말에는 노가다 뛰러 가야 해서 못갔네요.
그냥 가난하면.. 인생이 불편하고 힘들어요.
고등학교 때 가까운 친구가 저와 같은 대학 정치외교학과에 붙어서 더 친해졌는데 이 친구가 공장에서 일하는 형님 집에서 살았더라고요. 좁은 집에 형수와 조카 눈치가 보여 플라스틱 금형공장에 취직해 야간조로 일하며 거기서 자는 건 해결했어요.
그런 소규모공장은 기계를 쉬지 않고 돌리느라 보통 주간조와 야간조를 12시간씩 교대하는데 이 친구는 학교에 가야 하니 야간조로만. 당시 학생운동하며 위장취업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친구는 돈이 궁해서 취업한 거였어요. 학기초 등록시기에 돈이 안 모이면 휴학해가며 학교를 다녔어요. 참 어렵게도 살고 학교를 다녔네요.
교재 못 사고 한 달 정도 일 해서 교재 사고 일 다니며 생활..
뭐 지금도 비슷한 처지지만요.
다음세대들은 그냥 아무걱정 없이 최소한을 누릴 수 있는 삶이 당연시 되었으면 좋겠어요.
많은분들이 덜 괴롭고 덜 힘든 세상이 오면 좋을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그러시데요... 명절때 우리는 왜 라면 먹어?라고 제가 물어봤었다고...ㅎㅎ
어머니 가슴에 대못을...ㅡㅡ;;
근처에 어선 만들고, 수리하는 작은 조선소들이 많이 있었는데 거기서 나오는 톱밥하고 폐목, 폐오일 얻어다가 겨울나기 하고 그랬습니다. ㅎ
조개탄 좀 얻어오면 아주 좋았죠. ㅎㅎㅎㅎㅎ
좀 지나서 아버지 하시던 일이 잘 풀리는가 싶더니, 이젠 다단계가 습격하더만요.
대충 저의 20대는 보증빚 갚다가 날아가버렸습니다. ㅎㅎㅎㅎㅎ
등록금은 부모님 부채증명서 떼어 극빈자 보조금과 학자금 대출로 때웠습니다. 그렇게 20대 보내고 지금은 취직해서 와이프, 애기랑 등 따숩게 삽니다.
지금에 만족하며 살랍니다.
그때 아버지는 막노동하다 떨어지셔서 입원중이고 어머니는 간호하시고,
저흰 옆집 살던 이웃집에 몇달간 얹혀살면서 학교 다녔었죠.
그리고 나서 부산 외삼촌 집에서 몇년 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댓글로 허허, 그런 때도 있었지 하며
편한 집에서 쓰는 글이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남은 날들은 모두 행복하시기를!
저는 그 당시 가장 잘 차려 먹을때가 3분 요리 탕수 완자에 ㅂ락만두 였습니다
탕수육을 제일 좋아했는데 비싸서 저렇게 두개 섰어 먹었죠 ㅎㅎ
아 돈이 없음을 가장 뼈저리게 느낄때가 전기 끊길때 같아요
낮에 오셔서 밖에 계량기에서 끊어 버리더라고요 집에 사람이 있건 말건요
애 많으면 세도 안줬죠.
그리고 집주인 애랑 나이 비슷하면.... 어휴 거의 조선시대 종처럼 대햇죠. 물론 안그런 사람도 있었지만.. 전 그랫엇네요.
자기집 연탄 떨어지면 빌려 갓다가, 안 갚기도 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유치 뽕짝이네요.
고등학교 2학년부터인가 교육비는 지원 됐으나 급식비 때문에 3년 내내치욕 많이 당했죠
그래서 제가 선생들을 쓰레기로 생각합니다
야자때는 굶거나 컵라면 먹거나 친구가 외부저녁급식 양보한거 먹었습니다ㅋㅋ
재수와 군대 끝난후 알바한 돈으로 대학 갈랬는데 집에 알바 한 돈 다 뺏기고 학자금 받았으나 돈 없어서 중퇴
여기에 제 명의 대출로 인해 바로 신용불량
10대 20대에 정말 불행했었습니다
지금은 월급 받으며 겨우 살고 있네요
뭐 울 애들은 소고기도 배부르면 안먹겠다는 풍족한 삶을 사니 만족합니다.
이렇게 정리해보니 저는 사회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고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엄마랑 손잡고 옆집 살던 할머니집에 가서 천원 빌려본적 있습니다.
어렸을때 가난해서, 방학때마다 말그대로 초가집, 돼지가 똥먹는 제주 전통 화장실이 있는 할머니댁에 맡겨졌습니다.
지방 살았지만 좀 더 나은데는 부담 돼서 그냥 포기 했습니다. 저보다 어려운 친구가 집근처 학교 안갔는데 정말 그친구 보면서 대단하다 생각했습니다.
지금 둘다 웃으면서 난 과거로 절대 안돌아간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에 만약에 과거로 돌아가면 찌질한 역사를 견뎌야 하니까요.
초등학교 5학년부터 돈 벌어서 학교다니고 밥 먹고
결혼도 부모님께 돈 그리고 결혼하고
결혼후 처음으로 내집이라는걸 갖고
중간내용은 처절하니까 생략합니다
지금의 저는 잘 살고 있습니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제 방이 생겼고 연탄 때던 시절 어머니 소원이 겨울되기 전에 연탄 200장만 사다 재어놓는 거였죠.
40살이 안되었는데 여태껏 이사횟수가 70번이 넘습니다
초본 뽑으면 한 4장 나오는 것 같아요
(전입신고 못하고 여기저기 살던게 있어서 적게 나오는..)
서울바닥에서 어떻게든 산다고
네가족이서 10평 방하나에서 살았네요 ㅎㅎ
그 고비를 못넘기거나 아직도 그 상황인 사람들도 있겠죠.
수금하는 사람들 와서 노크하면 어른 없다고 거짓말하고, 겨울에 전기/가스 끊긴집에서 찬물로 씻고 알바 나가고, 알바비로는 이자도 다 못내는 상황이고, 고등학교 졸업하면 군입대해야 하는데 상담받으러 동사무소에 가서 이야기하다. 구걸하는 것처럼 되서(?) 라면 한박스 받아 뿌셔 먹던 시절이요? ㅎㅎ
어렸을땐 질리게 라면 먹어서 나중엔 라면 안먹는다 했는데…
요즘엔 라면이 그렇게 맛있네요. ㅎㅎ
와이프가 뭘 해줘도 시큰둥이 먹다가 라면에 만두 넣어주면 그렇게 잘 먹는다고 하는거 보고, 제가 그리 라면을 좋아하는구나 싶습니다.
먹을게 없어서 교과서 신문지 찢어먹었죠
종이 맛을 알고나서는 배고픔을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에 행복했네요
전기 수도 가스 끊겨서 지하철로 화장실 다녔구요
씼는것도 지하철에서...
서울 4년제 대학교 합격했는데 등록금 없어서 등록 못할땐...... 하
(등록은 해서, 대학교 다녔습니다. 어렵게 이율 60%짜리 대출받았습니다)
대학교 1학년 마치고 취업해서 회사랑 대학교랑 같이 다녔습니다.
빚쟁이들이 들이 닥치고, 내쫓겨 이사가고, 지하방에서 그리고 어디론가 이사다니다가,
부모님 이혼 등의 과정을 거쳤지요.
언젠가는 배고파서 거리를 걷다가, 누군가 집 앞에 자장면 그릇을 내놓았는데,
먹다 버린 만두가 있길래, 눈치보다 입속으로 꾸역꾸역 집어넣은후 도망치듯 달아난 적도 있었네요.
배고픔이 창피한 건지, 남이 버린 만두라도 내것이 아닌걸 먹었다는 것에 죄책감이 든 건지
엉망이된 감정의 흉터가 남아 아직까지 그 때 기억이 가끔 되살아 납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동전을 모아서, 두부 한 모를 사서, 요일별로 잘라 나누고,
조금씩 먹으면서 4일을 버틴적도 있었네요.
지금은 인생의 큰 경험이 되었고, 글쓴이와 같이 아련한 추억이 되었네요.
그 만두사건? 이후 못먹는것 없이 아무거나 잘 먹는 식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 살아남았다
전 처음 회사 취직하자마자 건강보험공단에서 월급통장 압류한다는 우편을 받아봤습니다.
부모님이 건강보험을 안내셨더군요;; 무려 몇천을..
저도 중학교때 부도로 집에 노란딱지 붙여지고.
간신히 대학 붙어서 다니다가 명절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버스조합과 3년동안 소송하고...
경찰서도 들락날락...
정말 대학 책살 돈이랑 점심 값이 없어서 친구들 선배들 빌붙어 먹는데 그것도 오래 못할짓이더라고요
겨우 학기 버티고 휴학하고...
잘 버티고 버텨서 졸업한지 20여년 지났는데
건강은 또 왜그런지 암에 걸리고...
인생 파란만장 합니다.
안 좋은것만 쓰니 좀 인생이 그렇네요.
좋은 점도 많아요. 여기 쓰기는 뭐하지만.
함께 가져간 고추장과 라면은 아끼고 아끼다 결국 썩었고, 5학년이였던 나는 고추장과 라면이 썩는 음식인지 몰랐어요.
물 상태가 안좋아서 찾아보니 Clorox를 소량 넣어 마시랬는데, 이게 원래는 락스인데 당시 번역기는 세재라 그래서 가루세재를 물에 타서 마셨어요.
썩은 요거트 먹고 새벽 3시에 ㅍㅍㅅㅅ하다가 변기 위에서 졸도했는데, 깨서 나온다음 '밤 늦게 깨워 정말 죄송합니다, 화장실이 저 때문에 너무 더러워졌는데 지금 차마 치울수가 없어 너무 미안합니다' 라고 아픈와중 횡설수설하고 기절했었어요.
이혼과정중 그저 혼자 내팽겨졌던거고, 이때 같은 어학연수원 통해 온 아이 집에 가보고 자본주의를 쎄게 느꼈었어요. 그 아이는 2층짜리 대리석 깔린집에 컴퓨터와 침대가 있는 자기 방, 웃음기 넘치는 호주백인 가족과 커다란 골든 리트리버.
학교에서 어떤 트러블이 생겨도 제 편은 없었어요. 말도 잘 못하는 동양 꼬마놈이 돈이 없으니 어학연수원에서도 그닥 신경 안쓰고, 부모도 없으니 참 손쉬운 먹잇감이었죠.
이후 귀국 전 잠시 현지 한국인 집에 4일정도 머물렀었는데, 그집 엄마는 초면부터 날 무지막지하게 싫어했어요. 빨랫감 내놓지 마라, 화장실 자주쓰지 마라 등. 그래서 빨랫감은 따로 비닐봉지에 넣어놨었어요. 그리고 먹을것도 인색하게 굴어서 하루에 초코파이를 하나 줬었는데, 하나 더 먹을수 있을까요 그러면 불같이 화냈었어요.
그 짧은 기간동안 하루는 차에 타다가 그 집 딸이 제 손을 차 문에 끼게 한 채로 문을 닫았고, 이걸 보고 너무나 행복하게 웃어재끼던 그 모습이 아직도 생각나요. 뒤에서 제 슬리퍼를 밟아 찢어지게 하고선 제 탓을하며 나무라서 맨발로 다녔어요. 마지막 날에는 딸을 시켜 밤에 제게 초코파이를 하나 주곤, '오빠는 울엄마 어때?' 라는 질문을 해 5학년 아이였던 나는 '빨래는 했으면 좋겠어, 나를 싫어하시는것 같아' 라고 했더니 바로 엄마방으로 쪼르르 가서는 일러바치는 모습을 화장실 가는길에 보고 배신감에 휩싸였고, 문 앞에서 '제 얘기 하시는거에요?'라고 물으니 불같이 화내던 모습도 기억에 남아요.
이후 귀국하니 아버지가 Ps2를 사주셔서 굉장히 기분이 좋았었는데, 집에와서 설치하고 플레이를 하고있는데 싸우는 부모의 모습. 나중에 보니 이혼 과정 이였고, 이 일은 이후 모친이 제게 '너 때문에 이혼했잖아', '요즘 이혼이 유행이다' 라는 말을 5학년때부터 듣게 되요. 이렇게 이혼 이후 친가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1~2때 캐나다, 미국으로 또 혼자 가요. 여기서도 여러 일이 있었지만 위에 쓴게 너무 길어진감이 있어 축약하자면, 좋진 않았으니 다시 귀국했겠죠.
이후 국내 적응 잘 못하다가 어영부영 고등학생 되버리고, 영어 빼고는 절망적이던 성적 때문에 고3때 직업반을 택해 직업학교에서 제과자격증과 제빵자격증을 취득하고, 뒷배 든든한 지방대를 들어갔다가 너무나 개차반인 학생들 상태를 보고 교수 통해 해외교류 프로그램으로 미국 호텔에 인턴을 나갔었어요.
당시 교류 프로그램 신청시험을 봤었는데, 20 문제중 대충 수준이 부모님을 영어로 쓰시오, Twilight의 뜻은? 이런 정도였는데 이것도 거의 백지로 낸 선배들도 합격을 했던.. 1, 2학년 통틀어 10명 갔었는데 의사소통이 가능한게 저 혼자밖에 없어서 졸지에 인솔자가 되버렸어요. 하필 학교측에서 돈 아낀다고 중국 경유해 오가는 항공편이여서 많이 힘들었었습니다.
여튼 남들 당근 껍질까거나 랍스터 살 발라낼때,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저는 원하는 부서(레스토랑 스테이션, 베이커리 등) 에서 찍먹 경험을 할수 있었고, 이 때 기억이 너무 좋아 미국에서 일해야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프로그램 과정이 오전에는 호텔 내에서 진행하는 영어수업과 오후에는 현장실습 이였는데, 오전수업때 저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스마트폰이 나오던 시기라 다들 핸드폰만 만지고 선생님은 개무시해서 저만 얘기했던게 기억이 나요.
하루는 어차피 수업이 제겐 필요없는 단계라, 선생님과 딜을 해서 '내일 오후 현장실습이 없는 날이니, 나는 뉴욕으로 필드트립을 가고싶다. 혹시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에 적극 동의해서 다녀오라는 말을 듣고 다음날 아침, 중국인들 무리에 섞여 호텔측 뉴욕 차이나타운 출퇴근 직원버스에 섞여들어가 뉴욕에 처음 가봅니다. 저녁7시 같은 위치에서 호텔로 간다는 말을 듣곤, 숙소 와이파이로 인터넷 검색해 캡쳐해놓은 사진 주소를 보며 열심히 돌아다녔었죠.
5th Ave, 그랜드 센트럴, 한인골목 등등.. 그러고 6시쯤 다시 차이나타운으로 돌아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안보여서 해당장소에 있던 호텔에 들어가니 죄다 중국인.. 물어봐도 모른다, 아니면 영어 못한다만 줄창 듣고, 가뜩이나 어두운 차이나타운과 낯선장소에서 미아가 된 공포감.
어딘가에 연락을 취할 핸드폰도 없고.. 총체적 난국 속에서 유일하게 밝은 장소였던 가로등 하나를 찾아 거기서 새벽 1시까지 서있었습니다. 당시 1월이라 무진장 추웠던게 기억에 나네요. 벌벌 떨며 행인들에게 물어봤지만 역시나 중국인이라 말이 안통하거나 모른다.. 추운 와중에 짱돌 굴려 '남자는 내게 불친절하다, 여자는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서로 잘보이고 싶은 커플에게 묻는것이다..!' 하여 지나가던 외국인 커플에게 사정을 설명. 이들은 천사였습니다.
당시 초행길이던 뉴욕이라 몰랐지만 이 둘은 생판 초면인 저를 위해 차이나타운에서 그랜드센트럴까지 함께 걸어서 이동해줬고, 호텔이 있는 지역의 기찻표 구매를 도와주고 뭘 먹고싶냐는 말에 '이미 시내 돌아다니면서 뉴욕 핫도그는 먹었고.. 뉴욕핏자나 뉴욕 치즈케이크?' 라고 했더니 지하에 있던 쥬니어스에서 치즈케익과 핫 아메리카노를 먹었는데.. 그 치즈케이크가 제 인생 최고의 치즈케이크였습니다.
너무나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에 명함을 졸라 받았었고, 일식 레스토랑 주인이였던게 기억 나네요. 언젠간 보답하겠다 했는데 아직 형편이 나아지질 않아서.. 여튼 그 우여곡절을 겪고 호텔로 와서 택시를 불러 숙소를 가려했는데, 택시가 2시간 뒤에 해뜨고 옴.. 아놔. 그렇게 숙소에 가니 문이 잠겨있고, 같이 지내던 형이 일어나질 않아 숙소에 왔는데도 못 들어가는 상황.
숙소 로비에 가서 자초지종 설명하니 열 방법이 없다그러고, 오늘 뉴욕 갔다온 썰을 푸니 프론트 직원과 엄청 친해져서 '어차피 아침에 손님도 없는데 로비에서 놀고있어' 라며 로비 TV에 닌텐도 위를 설치해줘서 마리오카트 했던 기억.. 이후 귀국도 마찬가지로 또 인솔자를 하고, 다시 지방대로 들어오니 굳건하게 여길 벗어나서 미국에서 일해야겠다. 싶어 휴학 후 입대를 하고, 제대 후 미국 하얏트 호텔로 가서 일하고.. 학위 필요해서 CIA를 가고.. 이런저런 일 이후 귀국후 방황하다 현재는 과자 구워 파는중이네요. 쓰다보니 저도 모르게 갑자기 무지 길어져서 마지막엔 건너뛰었습니다.. 다른분에 비하면 별 시덥잖은 고생 했구나 싶네요 ㅠㅜ 괜히 속이 후련하네요 감사합니다
아, 중2때 귀국하고 나서는 친가 외가 트레이드당하며 자랐었네요. 귀국당시에는 외가쪽 트레이드 상황이라 모친 집에 갔었는데, 대문 걸어잠그고 없는척하며 안 열어줘서 이민가방 끌고 다시 친가로 갔던 기억이 납니다. 참 거지같은 기억은 선명하게도 남네요. 여튼!! 소설이 아니라 레알입니다 ㅋㅋ 구움과자 판매는 창업할 자본이 없어 공유주방을 통해 제조후 스마트스토어를 통해 온라인 판매중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쭉 읽었어요
어린애에게 어떻게 그럴수있나 싶네요
고생하셨습니다
저때 달마다 홈스테이 가족들이랑 대야에 식촛물 받아다가 촘촘한 쇠빗같은걸로 머릿니 발라냈었네요.
카톡이고 페이스타임이고 없던 시절이라 얼마 남아있는지도 모르는 플라스틱카드로 눈치보며 집에 전화하기도 하고. 조카가 갓 초졸했는데, 얘 5학년때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핏덩이같은 애한테 자기자식인데도 그렇게 대했다고..?
조카네 집은 외동에 유복하고, 카톡도 있어서 캐나다갔을때 코로나가 터져 일찍 오긴 했지만 저완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고 오더라구요. 살자도 여러번 생각했었어요. 어릴때부터 베란다에서 해뜰때까지 서있거나, 가끔 방충망을 열어 몇초정도 걸릴지 생각해보거나
술자리 가난배틀에서 어지간하면 안 집니다. ㅋㅋ
어릴때 집 사업이 크게부도 났습니다.
대학은 학비 없어서 접었고요.
지하실에서 2년 가까이 살아봤고 집안 어른들이 절 고아원 보내거나 공장 보내려고 작업쳤었죠.
지금도 명절에 집안 인간들 안봅니다.
밥솥을 이불 안에 넣고 끌어안고 자면 따뜻하다는 사실요. (당연히 보일러에 기름 X ㅋㅋ)
학교에서 사정이 좋지 않은 집에 복지차원으로 쌀을 40kg를 줫는데, 그걸 들고갈 수 없어서
택시 불렀더니 택시 아저씨가 쌀을 내려주곤 요금을 안 받으시더군요..
지금은 수입도 꽤 괜찮고, 경기도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힘든 시기가 있어야 절망에서 극복하는 법을 배우고,
가난은 의미 있는 한 때에 불과하단걸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젊었을 때는 돈이 없는게 당연하다는 것두요.
그냥 가난했었습니다.
가난했던 기억이 추억으로 남을만큼은 아니네요
과거는 늘 그것을 돌아보는 현재가 더 중요한 거겠죠.
저는 감수성이 예민한 고딩 시절 컨테이너에서 살았던 적 있습니다.
담임이 가정방문하고 촌지를 거절하고 가시더군요.
90년대 중반에 저희 아버지가 개차반이었고 저도 초딩시절이라 -_-
가스도 끊기고 전기도 끊기고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어서
김치 한 접시 옆집에서 얻어다가 정육점에서 거져주는 비계덩이 받아와서
그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그거에 소주 한잔하고 저희 보고 그걸 밥 대신 먹으라고 끓여준 걸 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겨울이서 추워서 이불을 다 꺼내고 , 환자용 찜질 물주머니를 어디서 구해와서 그걸로 잘 때 난방했었네요
그 이후에 아버지가 집을 날려서, 자가였던 주택을 법원에 몰수했고, 여관방 살이를 하면서
차비가 없어서 중학교 때 두어달 동안 3km 정도 거리를 걸어서 통학했죠.....
시골은 아니었고 성남이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루 굶고 친구한테 연락해서 10만원 빌리고 회사 정리하고 일당일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철이 빨리들어서 그때당시 국민학교 5학년때부터 석간신문을 돌려서 용돈 마련했지요 고등학교때는 조간 돌리구요~
20살때 대학가서는 근로장학생과 주말알바로 버티다가 방학때는 노가다했네요 대학 등록금을 부담하기 힘들어서
그때당시 2년2개월 군생활해야해서 부사관으로 선택해서
군생활하구요 돈때문에 못먹고 고생한적은 없지만 평범한 가정이 부러웠네요 저녁에 엄마가 해주는 밥먹을수있는...
내 자식에겐 행복한 기억만 남겨주고 싶다는 욕구가 강렬해지는 하루네요..
항상 행복하세요 :)
그래도 오늘 하늘이 참 에쁩디다.
제겐 고시원 살면서 월 20으로 1달 병원비와 밥값을 전부 댔어야 했던 때가 있었죠... 그 때 병원비가 꽤 나와서 월 10 가까이는 고정 지출로 빠졌었으니, 사실 상 고시원에서 주는 라면이 주식이었네요. 그거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 시절 상상하면 현재의 제 상황에 감사하게 됩니다.
초중학교 수업 끝나면 밭에서 일하고 논에가서 벼베면서 살았네요.
고등학생 때는 기숙사 생활해서 학교에만 있었고요.
이런 이야기 들으면 어르신이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30대 중반입니다.
살면서 가난이 고민이 된적이 아주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있는집 자식으로 태어났어도 내가 지금까지 이런 열정을 가지고 살아갈수 있었을까? 그런 의문은 듭니다
가난해서 중학교 시절부터 지긋지긋한 생활을 벗어나고픈 첫바퀴같은 곳을 탈출하기 위한 탈출구는 돈이었습니다
학업에 대한 욕심은 없었고 그당시 내가 할수있는 안정적인 직장은 공무원밖에 없었고 일단 거기까지라도 도달하고 싶었습니다
대학을 가서도 학업보단 건설현장에서 일하는게 좋았던 시절이었으니깐여
무언가 간절했기에 직장도 20대초반에 박봉인공무원을 선택하고 부업을 늘 해왔었네여
그렇게 살다보니 부모님이 보이게 되네여
나를 먹여주고 키워준것만으로 감사한 마음이 생기더군여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다보니 부업을 다시 시작하기엔 다소 부담이 있어 주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후회는 없었는데 정말 주변인이 살면서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수도 있다는걸 그때 절실하게 느꼈습니다...주식에 대한 선입견...
그전까지만해도 주식은 도박이어서 평생 하지않겠다고 여겨왔고 , 주변을 봐도 공부하며 주식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던거 같아여
그래서 나이를 먹고 늦게 시작했는데 주식시장만큼은 자기그릇만큼 벌수있다는 열정과 노력덕분에 그 이상을 얻고 제 인생에 많은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가난하지않았다면 이런변화를 이런 성과를 낼수 있었을까?
그만큼의 간절하고 절실했을까?
살아보니 가난 이런건 고민거리가 될수없는것에 지나지않네여
바꿀수 없는 결과...사람은 거기서 무너집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수 없는 가족들의 건강
지금도 병원 응급실에서 딸아이 입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너무 쉬운것에 절망하고 바꿀수 없다고 미리 좌절하지 마세여
인간이 바꿀수 없는것은 딱 한가지일뿐입니다
모두 희망을 가지고 사시면 좋을거 같아여
우리 모두 그렇게 힘든 시기를 보냈는데
ㅡ다들 너무 대견합니다
그리고 맨밥에 김치.. 싫타고 투정부렸던 철없던 제가 기억나네요…
이제는 제가 엄니 먹여살릴수 있는데..
제곁에 없으십니다..
가난이 먼지…휴…
촛불 켜고 부르스타에 생수로 밥해먹었습니다.
교내식당 라면 500원에 공기밥 300원이었는데, 친구녀석 다 먹은다음 빈그릇 가지고 한공기 더 달라고 해서 먹곤했죠.
그짓도 한달 이상 못하겠더라구요. 눈치보여서...
부모님께 감사 드려요
자식들 힘 안들게ㅠ열심히 살아 주셔서 ㅠㅠ
지금은 부모님 저 동생 다 집있고 차있고 잘 살고 있습니다
월세 등록금(전장은 못받아서 ㅠㅠ)내고 나면 남는 돈이 없었거든요
저도 썰 한번...
초등학교까지 4식구 누우면 딱 맞는 단칸방에서 살았습니다
매일 술로 사시는 아버지(주사까지), 봉재 공장 다니시면서
한겨울에 세탁기 없이 찬물에 그 모든 빨래하시던 어머님...
매번 라면을 먹을 때면 라면 1개+국수+신 김치 넣어서 양을
불려서 배부르게 먹었던 기억... 가난은 몸이 기억한다고
아직도 어렸을 때 그렇게 먹고 싶었던 만두를 보면 가끔 과식을
합니다
현재는 아버님 돌아가시고 가족끼리 모여서 옛날 얘기 할 때가
있는데... 3식구(어머니, 형, 저) 서로 얼굴 보며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이사를 엄청 많이 다녀서 서류 떼면 이사기록이 엄청 나요.
근대 허리띠 졸라맨적은 많아도 가난하다고 느낄정도까지 간적은 없는거 같네요.
나이들어서 생각해보니 부모님께서 그만큼 노력과 고생을 많이 하셨던거 같아요.
건강과 맞바꾼거긴 하지만..
다들 고생하셨고 힘내주셔서 감사하네요 .
돌아가시기 전부터 가난했었는데
돌아가시고 나서는 더 가난했네요.
애초에 저는 돈이라도 빨리 벌어야겠다 마음먹고
공고에 진학했습니다.
2005년 고3때 첫 취업을 나갔고 안산의 반월공단에서
주야 2교대로 빡시게 일했습니다.
당시 시급이 2950원이었는데, 진짜 많이 일한달에
150만원 넘게 벌었으니까요.
성인이 되면서 운좋게
대기업 연구소에 정규직으로 들어갔는데
급여가 하두 짜서;;; 다른 걸 해야할까 고민하다가
대학 진학을 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얼마 안되는 퇴직금과 연차보상비 등등
주식에 넣어 뒀는데 2008년 수능공부하다가 서브프라임 터져서
이것저것 해서 1천만원 가량
거의 써보지도 못하고 300만원이 되었네요.
그동안 번돈들 다 집에 주었기에
집에서 월 20만원 정도씩 지원 받고
독서실 총무하면서 독학해서 서울의 하위권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사실 대학다닐 돈도 없었는데, 입학금은 누나가 다니던 회사 계약이 끝나서
퇴직금으로 내주었어요. (제가 누나 대학 다닐때 학비를 두어번 내주었거든요)
여튼 그렇게 4년 내내 장학금 받고
학교에서 근로하고 그러다보니까..
어느 새 교수님께 잡혀서.... 대학원생놈이 되어.. 전액 장학으로 석사를 마쳤습니다..
대학원 마치고 돈 적게 받는 화이트 칼라로 일하다가(연구직)
작년에 마이너스통장 뚫어서 결혼하고(와이프도 가난)
10평짜리 작은 임대 아파트에서 살고 있어요.
지금은 때려치고, 작게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제 남 부럽지 않게 돈 벌고 있는데,
둘 다 기반이 없어서 그런지, 아직 갈길이 머네요.
그렇지만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저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노력한 것 이상으로 기회가 잘 맞아서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쓰다보니까 자랑이 되었습니다만,
돌아가신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큰아빠 등등 생각하면
눈물이 나네요.
가난으로 인해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있고
그걸 평생 보듬으며 살면서
되도록 많은 사람이 가난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곤 합니다..
이것이 이제 남은 제 인생의 목표라면, 목표겠네요.
일요일 오후의 장황설 죄송합니다.
존경합니다.
모두가 건강하시고 물질적인 부분도 정신적인 부분도 평안한 내일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지금 힘드신 분들도 좋아지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복잡 다양한 느낌들이 몰려오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