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호는 주요 엔진인 75톤급 엔진에 산화제로 영하 180도 이하의 액체산소를 사용하는 발사체로, 액체산소, 액체수소 등의 극저온 추진제는 성능은 우수하지만 이름 그대로 온도가 극저온으로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에 로켓에 충진해 두기만 해도 외부 온도에 의해 끓어오르는 터라 발사 직전까지 기화된 분량을 로켓 밖으로 방출하고 줄어든 분량을 지속적으로 보충해 주게 됩니다.
발사 대기 중인 누리호의 외부에 극저온 산화제의 낮은 온도 때문에 성에가 끼고 기화된 산화제가 방출되고 있는 모습
그나마 이런 식으로 보충하는 것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발사가 중지되어 나중에 재시도해야 하는 경우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극저온 추진제를 로켓에서 빼낸 뒤에 발사 재시도 전에 다시 주입하는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위성 발사체의 경우 준비에 시간이 걸리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고 추진제의 제거와 재주입도 비용과 일정 문제는 될지언정 발사체로서의 효용성에는 별 영향이 없습니다만 탄도미사일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실제로 소련의 R-7, 미국의 아틀라스 같은 최초의 ICBM들은 누리호와 똑같이 케로신 계열 연료와 액체산소 산화제를 사용했었습니다만 이는 고성능 로켓엔진 기술이 아직 성숙되지 않은 1950년대의 이야기로, 극저온 추진제를 취급하는 대규모 시설이 발사대에 부속되어야 해서 발사 위치가 사실상 고정되어 있던 데다가 즉시 발사할 수 있도록 전투대기 상태에서 미사일을 보관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발사명령이 떨어진 후에야 미사일을 발사대에 기립시키고 추진제를 미사일에 충진하게 되어 '나 미사일 쏜다'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따라서 극저온 추진제 사용 로켓은 곧 군사용 미사일 목적으로는 완전히 도태되고, 군용 미사일은 상온 액체 추진제 사용 로켓과 고체 추진제 사용 로켓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러시아 일부, 중국, 북한 등의 위성발사체에 사용되는 상온보관형 액체 추진제는 끓는점이 높아서 상온에서도 기화되지 않고 보관이 가능한 하이드라진 계열 연료와 질산/사산화이질소 계열 산화제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군용과 민간용 양쪽의 성능 요구에 모두 부합할 수 있는 방식이지만 액체라고는 해도 극저온 추진제와는 그 특성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엔진과 연료 계통 등을 전용으로 새로 설계해야 하는 데다가 독성과 부식성 등의 문제로 취급이 까다롭기 때문에 한국이 인공위성의 궤도용 소형 추진기가 아니라 위성 발사체나 탄도미사일의 주력 엔진용으로 사용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고체 추진제는 보관이 더 편리하여 군용 탄도미사일에 쓰기에는 썩 좋지만, 효율이 높지 않고 연소제어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위성 발사체의 경우 대개 초소형 발사체 또는 발사 초기 단계에서 액체 추진제를 사용하는 주 엔진의 추력을 보조하는 부스터용으로 사용됩니다. 중형급 이상의 단독 발사체용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미국과 러시아 등에서 퇴역된 군용 탄도미사일을 발사체로 재활용하는 경우나 ICBM급 고체 발사체를 쓰는 특수한 케이스인 일본을 제외하면 없으며, 한국의 경우에도 현무 계열 탄도미사일 개발과 별개의 사업인 위성 발사체 개발 분야에서는 초소형 발사체나 부스터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국 핵무기 보유국이 아닌 한국과 ICBM의 사거리 수준으로 떨어져 있는 국가 중 한국이 타격 목표로 삼을 만한 국가가 있지도 않으니 한국에게 ICBM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누리호는 순수한 위성 발사체로서 군용 위성도 자체적으로 발사할 수 있다는 의의는 클지언정 그 자체를 군용 미사일로 전용할 기술로는 별 의미가 없으므로 누리호와 ICBM은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나로 우주센터에서의 발사 준비 정황이 주변 국가에게 한참 동안 뻔히 보이고 한 번에 한 발만 발사할 수 있는 멍청한 ICBM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누리호로 ICBM을 만들면 아무런 의미가 없죠.
미니트맨은 도미노피자처럼 30분 신속배달인데 말이죠.
ICBM은 로켓을 날린다고 끝이 아니라 분리된 탄두를 만킬로 넘는 목표지점 100m 반경에 꽂아넣어야하는 더 빡센 후속 작업이 필수죠. 이게 훨씬 더 힘들다는거.
나중에 이 이야기도 좀더 자세히 풀어주세요. ㅎㅎ
일본은 종전 직후인 1950년대부터 고체 추진제 발사체의 자체개발을 시작해서 첫 자국산 인공위성도 고체 추진제 발사체로 쏘아올렸으며, 세계 최대의 전고체식 위성 발사체(M-V)도 개발했었습니다. 현용 최대의 전고체식 위성 발사체인 엡실론(미국과 러시아의 ICBM과 비슷한 체급)은 곧 5번째 발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