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조선황실재건에 대한 게시글에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비판이 있길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대하여 다음 THIS IS TOTAL WAR 카페의 동양사 게시판에 짧게 댓글로 작성하신 ★海東天子☆ 님의 글을 가져와봅니다.
얘기가 나온 김에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대해서도 몇마디 하죠. 흔히 '4불가론'을 들어서 "이길 수 있는 전쟁에 쫄아 회군"한 것 처럼 얘기하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이성계는 당시 대륙의 정세를 아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거든요. 애초에 최영의 요동정벌은 [북원정권]의 협공을 고려한 것이었습니다. 근데 이 무렵의 북원은 꽤나 쇠퇴한 상황이었죠. 특히 1387년에 있었던 '나하추'의 투항이 아주 치명적이었습니다. 때문에 북원의 애종(哀宗)은 카라코룸에서 보다 요동에 가까운 '쿨룬 부이르'로 근거지를 옮겼습니다. 요동정벌이 있었던 1388년 4월, 북원정권은 쿨룬 부이르에서 남옥의 15만 명군의 급습을 받아 궤멸했고, 애종이 카라코룸으로 도주하는 도중에 살해당함으로써 북원정권이 멸망합니다. 근데 잘 생각해 보시면, 위화도 회군이 5월입니다. 뭔가 연관성이 보이시죠?!...^^; 이성계는 [여진족 정보망]을 통해서 이미 4월에 북원이 사실상 망했다는 정보를 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위화도 회군이 5월이니, 겨우 1달 사이에 '특급정보'를 이미 알고 있었단 얘기가 되죠. 게다가 이성계는 단시간에 판세를 파악하고, 전쟁의 승산이 이미 날아갔음을 인지- 위화도에서 회군하게 된 것입니다. 조선왕조에 의해서 찬양되어 과장된 정보가 있기는 하되, 애초에 이성계가 상당히 걸출하고 유능한 정치인-무장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솔직히 위화도 회군에 긍정적인 입장으로서 그리고 이성계라는 입지적인 인물에 긍정적인 사람으로서 또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가지 의견이 많겠습니다만 이러한 사실도 있다라는 점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왕욕심은;;;;;
熱島沈沒님// 북원과의 공조를 염두해 두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북원에서도 고려에게 연합을 요청하죠. 그리고 명이 북원을 치기 위해 15만을 동원했고 이에 요동의 명군도 일부를 제외하고 동원되어 요동이 공백상태임을 최영이 확인했다고 하나 그 또한 이후의 전황에서는 어떻게 작용할지 모를 일입니다.
공민왕 때도 여러 이유를 들어 비석하나 세워두고 길을 다시 돌렸던 요동입니다. 그리고 만주의 야인들이라면 여진족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들이야 자신들의 이익에 우선하는 세력을 고를테니 어찌될지 모를 일입니다. 실제로 명이 세워진지 35년 영락제 때 명군에 의해 털리죠.
오히려 여진보다는 북원과의 연합을 고려했고 북원이 이미 사실상 궤멸한 상황에서는 전황이 좋을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말씀하신 다른 사실이라는 것들이 오히려 외면한 사실에 비해 크게 가치가 떨어진다고 보이네요. 아! 참고로 요동수복에 동원한 군사수가 4-5만 밖에 안됩니다;;;
공민왕 때의 요동 공격을 말씀하셨는데 당시 고려군이 겨우 2만이었습니다. 선봉장은 이성계였구요. 5만...그것도 2만명이 순수 기병인 병력으로 무주공산인 요동을 점령하지 못할까요? 그리고 원의 주력으로 말하는... (그리고 요동의 주인이기도 했던) 나하추는 고려로 쳐들어왔다가 이성계에게 탈탈 털리고 나간 장군이었고 이런 전과로 이성계는 여진족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겁니다. 나하추가 항복했다는게 명나라가 상대 못할 강군이란 증거는 아니란거죠.
그리고 요동정벌의 목적은 점령 & 영구지배가 아니라... 철령 이북을 내어달라고 생떼를 쓰고 있는 명나라에 한 방 먹이는 거였죠. (영구지배 할 수 있었다면 뭐, 참 좋았겠고... 할 수 있었을거라 믿고 싶지만) 그런데 주원장은 단지 고려가 군사를 동원했다가 돌아갔다는 소식만 듣고도 더이상 철령 이북 (고려국토의 1/4)을 달라는 소리를 못합니다. 그러다 말씀하신대로 영락제 때에 와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