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 명량대첩 아래 : 칠천량해전 황현필 선생님 임진왜란 강의 추천드립니다. 강의 보시면 이해되실거에요.
Lightuser
IP 61.♡.253.223
08-23
2021-08-23 13:11:17
·
@님 이야 강의 좋네요 잘보겠습니다
IP 210.♡.41.89
08-23
2021-08-23 13: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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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ghtuser님 황현필 역사쌤 임진왜란 65편짜리인데..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습니다. 임진왜란=이순신 만 알고 있던 저는 역사관심이 별로 없었구나 반성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순신이 선조에게 "저에게 3척의 판옥선이 남아있습니다"라는 장괘는 저를 믿어주세요 가 아닌 이순신보고 육군으로 참여하라라는 선조 말을 거역하고 내 맘대로 할거야 라는 뜻이었다는걸 이제야 알았네요.
Lightuser
IP 61.♡.253.223
08-23
2021-08-23 13: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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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앞부분만 잠깐 보는데도 스케일이 생각보다 훨씬 크네요. 역사 공부 제대로 안한걸 반성합니다 ㅠㅠ
@님 탄금대 전투는 한편으로 이해가 되는것이 (그러면 안되지만) 거의 절망적인 상황과(고니시를 잡아도 옆에 가토군) 군사 질도 떨어지는 상태에서 장기인 기마전 배수진을 치고 도박 했다고 볼수있어서
랜슬럿
IP 118.♡.110.74
08-23
2021-08-23 13: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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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Late님 그게 탄금대에서 전멸한 건 맞는데 전투 자체는 탄금대에서만 벌어진게 아니라고 하더군요. 일본군이 보병 주제에 당시 조선군이 상상 할 수 없는 진군 속도를 보인게 핵심이라고...... 탄금대에서 전멸 할때는 이미 강건너 퇴로 조차 막힌 상황이었다고 ......
Riverside
IP 221.♡.224.66
08-23
2021-08-23 13:08:05
·
1번은 영화로 만들어도 사기죠. 실제로 명량을 보고 나온 아는 사람이.. 역시 역사도 약간 MSG가 들어가야 멋있어!! 네? 뭐가 MSG에요? 이순신이 아무리 대단해도 1척가지고 어떻게 싸워. 말이돼? 아닌데.. 진짜 1척으로 싸웠는데요? 응?? 레알??
1번은 ================================== 승리의 요인 주요 승리 요인으로는 울돌목의 지형과 시간에 따른 조류의 변화를 이용한 이순신의 뛰어난 전술과 잘 훈련된 병사들이 있다.
또한, 판옥선을 앞세우고 그 뒤에는 백성들이 피난하고자 타던 배를 열지어 늘어놓아 더 많은 배가 있는 것 처럼 위장전술을 폈다.
전투의 전개 과정은 아직 학계에서 연구 중에 있으며 조선 수군의 전술적 우위는 아래와 같다.
당파 전술과 함포 전술 조선 수군에게 함포전은 백병전 중심의 일본 수군을 상대로 효과적이라 할 수 있으며, 다양한 종류와 구경의 화포를 사용하였다.
오늘날 다연장 포에 비교할 수 있는 신기전, 박격포에 해당할 비격진천뢰, 대형 로켓 병기라 할 만한 대장군전 등의 신무기를 사용하였다.
일본 수군 역시 함포를 사용하였으나 조선 수군에 비해 사용이 서툴렀으며 일본 수군의 함포 적재량이 조선 수군에 비해 열세였다.
조선 수군은 백병전에 불리하므로 함포전으로 일본 전선의 근접을 저지했으며 또한 조선 수군은 함포전 뿐만 아니라 판옥선이 적선보다 견고한 점을 활용하여 일본의 전선과 충돌하여 부서뜨리는 당파전술(충각전술)도 구사했다.
판옥선과 왜선의 비교 일본 수군의 전선은 뱃머리가 뾰족한 첨저선으로 아타케부네(安宅船) 등이 있다.
길고 좁은 각재 하나만을 바닥에 깔고 그것을 뼈대로 외판을 붙여나가는(V자형 바닥) 첨저선과 달리,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배 밑이 평평한 평저선이다.
판옥선은 바닥이 평평하고 뱃머리가 뭉툭하며, 크기는 일본 수군의 가장 큰 배인 아타케부네보다 조금 크다.
평저선은 첨저선 보다 배가 물에 잠기는 지점인 흘수선이 낮으며, 물에 깊게 잠기지 않으므로 전선을 회전시키는 선회기동에서 물 속의 저항을 덜 받는다.
하지만 평평한 바닥이 물 표면에 닿는 면적은 넓어서 배의 직진 능력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암초가 많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우리나라 바다에서 사용이 적합했는데, 갑작스레 썰물이 되어도 판옥선이 뒤집힐 위험이 없었다.
또한 물과 닿는 면적이 넓어 화포를 발사할 때의 반동 흡수가 용이하다.
판옥선에서 사용한 나무 못은 물을 먹으면서 팽창하여 결합부위를 견고하게 했으며, 판자로는 소나무를 사용했다.
소나무 판자는 일본 수군의 삼나무나 전나무 판자 보다 단단하다.
일본 수군의 전선은 쇠못을 사용했는데, 쇠못은 바닷물에 녹이 슬어 전선의 결합부위가 약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판옥선의 판옥 구조는 높이가 높아서 화포의 사거리를 늘리고, 노꾼과 사부를 튼튼한 판옥으로 보호하여 전투에 안정적으로 임하도록 한다.
또한 내부가 넓어 노 한 자루당 4~6명의 노꾼이 커다란 노를 저었으며 작은 노를 젓는 일본 수군보다 효율적이다.
판옥선의 돛은 역풍에도 사용할 수 있는 세로돛을 사용했으며 일본 수군은 역풍에 무용지물인 가로돛을 사용했다.
일본 수군의 전선은 순풍이 불어올 경우에 판옥선보다 조금 빨랐을 것으로 보인다.
유시(酉時, 오후5시 ~ 7시)무렵, 전투는 끝났다.
실제 전투에 참여한 일본 수군의 전선 130여 척 중 30여 척(31~33)이 격침되었고, 왜군의 중형 군선에는 약 100명씩 타고 있었으므로 약 3000여 명의 전사자가 났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반면, 조선군의 전선은 단 하나도 격침되지 않았다.
다만, 순천 감목관 김탁과 이순신의 종 계생이 전사하였고, 안위의 전함의 격군 일곱 여덟 명이 물에 빠져 죽은 것을 통해 조선군 전사자 수를 대충 유추해볼 수 있다.
이 전투는 조선이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전투가 되었다.
당시 일본 수군이 남해안 대부분의 재해권을 장악하였고 일본 육군은 1597년 9월 25일(음력 8월 15일), 9월 29일(음력 8월 19일) 남원 전투, 전주성에서 조명 연합군을 대파하고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킨 일본 육군은 전라도 점령 이후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하여 명 나라군과 대치중인 상황이었다.
일본 육군과 수군은 수륙 병진을 통한 한양 공격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명량해전으로 인해 일본군의 수륙 병진 작전이 모조리 무산되었으며,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분산되어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정유재란은 농성하는 일본군을 조명 연합군이 수륙 양면에서 협공하는 공성전으로 바뀌게 된다. =================================
제일 궁금한건 화포에 쓰는 화약을 대체 어떻게 조달하셨을까 하는 거죠. 화약 원료를 조선에서만 조달하기 어려웠을텐데요.
돈노마인드
IP 121.♡.101.9
08-23
2021-08-23 15:08:54
·
이순신 장군 휘하에 이봉수라는 분이 염초 대량생산 방법을 개발했다고 합니다. '이봉수는 조정에서 그런 논의가 있기 직전에 염초 제조 방법을 발견했고, 생산했다. 염초 제조가 얼마나 절박했는지는 그 후의 다른 기록에도 나온다. 1595년 5월에는 충청도 서천의 임몽이라는 사람이 5일 만에 염초 1근을 만들고, 또 계속 만들어내자 선조가 임몽에게 정6품의 관직을 내렸다. 그런데 이봉수는 1593년 1월, 3개월 만에 1천근을 만들어냈다. 이는 그가 1592년 가을부터 염초를 생산했다는 이야기이며, 그가 얼마나 탁월한 과학자였는지도 보여주는 사례이다. 철쇄와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 회에 이어서 하기로 한다. 출처 : 일요서울i(http://www.ilyoseoul.co.kr)'
그와중에 대장선 전사자가 한손에 꼽힐 수준이었단게 영화와 다른 점이지만...
(실제 전투는 척 노리스나 스티븐 시걸 리즈시절 영화 수준이었단건지;)
위 : 명량대첩
아래 : 칠천량해전
황현필 선생님 임진왜란 강의 추천드립니다. 강의 보시면 이해되실거에요.
이야 강의 좋네요 잘보겠습니다
앞부분만 잠깐 보는데도 스케일이 생각보다 훨씬 크네요.
역사 공부 제대로 안한걸 반성합니다 ㅠㅠ
탄금대 전투는 한편으로 이해가 되는것이 (그러면 안되지만) 거의 절망적인 상황과(고니시를 잡아도 옆에 가토군) 군사 질도 떨어지는 상태에서
장기인 기마전 배수진을 치고 도박 했다고 볼수있어서
역시 역사도 약간 MSG가 들어가야 멋있어!!
네? 뭐가 MSG에요?
이순신이 아무리 대단해도 1척가지고 어떻게 싸워. 말이돼?
아닌데.. 진짜 1척으로 싸웠는데요?
응?? 레알??
역사 모르는 사람: 충무공이 너무 버프받았네.
역사 아는 사람: 충무공이 너무 너프당했네.
물살이 빨르고 작은 소용돌이같은 흐름으로 진형유지가 힘든 곳으로 골라서 동시에 돌진을 막았을거 같구요.
30%정도 자원소진한 상태에서 왜군 총대장이 상황판단을 못한게 제일 큰 패착원인이겠네요;;;;
그거 말아먹고라도 도망갔어야는데..
배설이 원균에게 여기서 협공당하면 다 죽는다고까지 말했는데..
거절당하자.. 본인 배 12척을 끌고 미리 튀어 버리죠..
요 12척이 나중에 명량대첩에서 이순신장군께서 사용하시는 배가 되겠습니다.
정작 배설 본인은 저때의 트라우마로 ptsd에 걸려 ㅠㅠ..
결국 전쟁 이후 고향에서 잡혀 참수당했다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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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요인
주요 승리 요인으로는 울돌목의 지형과 시간에 따른 조류의 변화를 이용한 이순신의 뛰어난 전술과 잘 훈련된 병사들이 있다.
또한, 판옥선을 앞세우고 그 뒤에는 백성들이 피난하고자 타던 배를 열지어 늘어놓아 더 많은 배가 있는 것 처럼 위장전술을 폈다.
전투의 전개 과정은 아직 학계에서 연구 중에 있으며 조선 수군의 전술적 우위는 아래와 같다.
당파 전술과 함포 전술
조선 수군에게 함포전은 백병전 중심의 일본 수군을 상대로 효과적이라 할 수 있으며, 다양한 종류와 구경의 화포를 사용하였다.
오늘날 다연장 포에 비교할 수 있는 신기전, 박격포에 해당할 비격진천뢰, 대형 로켓 병기라 할 만한 대장군전 등의 신무기를 사용하였다.
일본 수군 역시 함포를 사용하였으나 조선 수군에 비해 사용이 서툴렀으며 일본 수군의 함포 적재량이 조선 수군에 비해 열세였다.
조선 수군은 백병전에 불리하므로 함포전으로 일본 전선의 근접을 저지했으며 또한 조선 수군은 함포전 뿐만 아니라 판옥선이 적선보다 견고한 점을 활용하여 일본의 전선과 충돌하여 부서뜨리는 당파전술(충각전술)도 구사했다.
판옥선과 왜선의 비교
일본 수군의 전선은 뱃머리가 뾰족한 첨저선으로 아타케부네(安宅船) 등이 있다.
길고 좁은 각재 하나만을 바닥에 깔고 그것을 뼈대로 외판을 붙여나가는(V자형 바닥) 첨저선과 달리,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배 밑이 평평한 평저선이다.
판옥선은 바닥이 평평하고 뱃머리가 뭉툭하며, 크기는 일본 수군의 가장 큰 배인 아타케부네보다 조금 크다.
평저선은 첨저선 보다 배가 물에 잠기는 지점인 흘수선이 낮으며, 물에 깊게 잠기지 않으므로 전선을 회전시키는 선회기동에서 물 속의 저항을 덜 받는다.
하지만 평평한 바닥이 물 표면에 닿는 면적은 넓어서 배의 직진 능력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암초가 많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우리나라 바다에서 사용이 적합했는데, 갑작스레 썰물이 되어도 판옥선이 뒤집힐 위험이 없었다.
또한 물과 닿는 면적이 넓어 화포를 발사할 때의 반동 흡수가 용이하다.
판옥선에서 사용한 나무 못은 물을 먹으면서 팽창하여 결합부위를 견고하게 했으며, 판자로는 소나무를 사용했다.
소나무 판자는 일본 수군의 삼나무나 전나무 판자 보다 단단하다.
일본 수군의 전선은 쇠못을 사용했는데, 쇠못은 바닷물에 녹이 슬어 전선의 결합부위가 약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판옥선의 판옥 구조는 높이가 높아서 화포의 사거리를 늘리고, 노꾼과 사부를 튼튼한 판옥으로 보호하여 전투에 안정적으로 임하도록 한다.
또한 내부가 넓어 노 한 자루당 4~6명의 노꾼이 커다란 노를 저었으며 작은 노를 젓는 일본 수군보다 효율적이다.
판옥선의 돛은 역풍에도 사용할 수 있는 세로돛을 사용했으며 일본 수군은 역풍에 무용지물인 가로돛을 사용했다.
일본 수군의 전선은 순풍이 불어올 경우에 판옥선보다 조금 빨랐을 것으로 보인다.
유시(酉時, 오후5시 ~ 7시)무렵, 전투는 끝났다.
실제 전투에 참여한 일본 수군의 전선 130여 척 중 30여 척(31~33)이 격침되었고, 왜군의 중형 군선에는 약 100명씩 타고 있었으므로 약 3000여 명의 전사자가 났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반면, 조선군의 전선은 단 하나도 격침되지 않았다.
다만, 순천 감목관 김탁과 이순신의 종 계생이 전사하였고, 안위의 전함의 격군 일곱 여덟 명이 물에 빠져 죽은 것을 통해 조선군 전사자 수를 대충 유추해볼 수 있다.
이 전투는 조선이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전투가 되었다.
당시 일본 수군이 남해안 대부분의 재해권을 장악하였고 일본 육군은 1597년 9월 25일(음력 8월 15일), 9월 29일(음력 8월 19일) 남원 전투, 전주성에서 조명 연합군을 대파하고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킨 일본 육군은 전라도 점령 이후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하여 명 나라군과 대치중인 상황이었다.
일본 육군과 수군은 수륙 병진을 통한 한양 공격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명량해전으로 인해 일본군의 수륙 병진 작전이 모조리 무산되었으며,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분산되어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정유재란은 농성하는 일본군을 조명 연합군이 수륙 양면에서 협공하는 공성전으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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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라피디아라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화약 원료를 조선에서만 조달하기 어려웠을텐데요.
'이봉수는 조정에서 그런 논의가 있기 직전에 염초 제조 방법을 발견했고, 생산했다. 염초 제조가 얼마나 절박했는지는 그 후의 다른 기록에도 나온다. 1595년 5월에는 충청도 서천의 임몽이라는 사람이 5일 만에 염초 1근을 만들고, 또 계속 만들어내자 선조가 임몽에게 정6품의 관직을 내렸다. 그런데 이봉수는 1593년 1월, 3개월 만에 1천근을 만들어냈다. 이는 그가 1592년 가을부터 염초를 생산했다는 이야기이며, 그가 얼마나 탁월한 과학자였는지도 보여주는 사례이다. 철쇄와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 회에 이어서 하기로 한다.
출처 : 일요서울i(http://www.ilyoseoul.co.kr)'
유황도 명나라에서 받았을 테지만, 왜로 부터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이 드네요.
늦게 전투에 뛰어 든 안위의 함에서 백병전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순신 장군과.. 김응함 장군이 도우러 가서 살려 놨다는..
이순신 장군 안계셨으면..지금 쯤.. 우리는 일본말 쓰고 있을 수 도 있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원균은 물론이고 권율도 원균을 곤장치면서 부산포 공격하라고 한 것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